“은행장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명함입니다.”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은 퇴임을 하루 앞둔 3월 30일 본보와 가진 인터뷰에 앞서 4년간 써오던 명함을 돌리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31일 외환은행 주주총회에서 래리 클레인 씨가 새 행장에 공식 선임돼 그의 명함에는 이사회의 ‘의장(President)’이라는 직책만 남게 됐다.
웨커 행장은 제너럴일렉트릭(GE) 부사장을 거쳐 2004년 외환은행 부행장, 이듬해 1월 최연소 시중은행장으로 취임해 주목을 받았다. 임기를 1년 남긴 시점에서 퇴진해 지난해 HSBC의 외환은행 인수 무산에 대한 문책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말 대주주인 론스타 측에 새로운 대주주 찾기 및 은행의 장기 발전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이사회 의장과 행장 업무를 분리해야 할 시점이라고 건의해 이뤄진 결정”이라며 론스타와의 불화설을 일축했다.
앞으로 외환은행 매각에 전념할 계획인 그는 “외환은행에 호감을 갖고 있는 기관이 있지만 현재 금융시장 상황을 감안할 때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매각이 본궤도에 오르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의 98%를 일에 쏟아부었다”고 할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다고 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대부분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11시에 끝나는 ‘나인투일레븐(9 to 11)’이다. 새벽에 업무 관련 메일을 보내 간부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좌진을 늘 긴장시킬 정도로 직설적인 성격의 그이지만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일과 인물을 꼽아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 돈 노(I don't know)…”를 연발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만큼 일도 많고 탈도 많았다. 어렵사리 말문을 연 그는 “2005년 파업이 진행 중인 가운데 부임해 일주일 만에 외환카드 합병을 마무리해야 했을 때가 가장 기억이 남는다”며 “허니문도 없이 일했지만 한국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젊고 무모한 외국인(a young and crazy foreigner)’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은행 발전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해 준 외환은행 직원들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의 금융산업이 자신이 한국에 처음 왔던 5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해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실보다 ‘몸집 불리기’를 중시하는 한국의 금융기관 및 기업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시장 점유율, 순위 등 외형을 중시하는 현상은 한국의 금융권은 물론 다른 업종의 한국 기업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라며 “GE 시절부터 외형 경쟁에 치중하다 보면 상황이 나빠졌을 때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서구 은행의 몰락에서 교훈을 찾고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예상되는 미국 재정적자 확대, 인플레이션, 달러 약세 등의 문제에 대해 정부, 금융권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