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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 경영 : 을병 대기근 ②

백성 살리려면 원수와도 손 잡을 수 있어야

김준태,정리=장재웅 | 441호 (2026년 5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17세기 말 조선은 을병 대기근 앞에서 내부 역량이 바닥나자 불구대천의 원수 청나라에 곡물 원조를 요청하는 초유의 결단을 내렸다. 대사간 박태순은 청의 도움을 국가 간 무역이라는 경제 프레임으로 전환해 사대부의 심리적 저항을 풀어냈고, 숙종은 개시(開市)를 위한 사신 파견을 결단했다. 현장 책임자였던 우의정 최석정은 청 이부시랑 도대의 가격 농간과 권제(眷弟)라는 외교적 모욕 앞에서도 판을 엎지 않고 교섭을 끝까지 성사시켜 수만 석의 구휼미를 확보했다. 그러나 숙종이 명분론 강경파의 파상공세로부터 최석정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이후 조선에서는 국가적 난국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인물이 자취를 감췄다. 이 사례는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실용적 유연성과 리더의 정치적 엄호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수에게 머리를 숙이며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17세기 말 조선이 맞닥뜨린 질문이다. 을해년(1695년)과 병자년(1696년)을 거치며 전 국토를 강타한 ‘을병 대기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백성의 진휼을 감당할 내부 역량은 바닥을 보였다. 왕실과 조정의 재정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비축미를 방출했으며 심지어 신분을 높여주고 관직을 팔아서까지 재원을 마련했지만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나라의 곡식을 들여오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그래서였다. 1696년(숙종 22년) 11월 7일 도승지 이유(李濡)가 처음 건의한 이래, 이듬해 5월에는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중강(中江)1 에 공무역 시장인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물을 사 오자고 주장했다.2 외부에서 돌파구를 찾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신하가 동의하지 않았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무역하면 작은 나라가 손해를 본다’ ‘우리가 요청했으므로 저들이 높은 값을 불러도 우리는 무조건 살 수밖에 없다’와 같은 경제적인 우려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오랑캐’ 청나라에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태순은 9월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일은 우리가 부끄럽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통하게 해 이익을 나누는 것일 따름입니다”3 라고 역설했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말고 그저 이웃 국가 간 통상적인 무역 활동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 사이 조정의 기류도 바뀌었다.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까지 확산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해졌기 때문이다. 당장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백성이 죽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 다른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신하들도 더는 반대하지 못했다. 박태순이 ‘청나라의 도움’을 받는 것에서 ‘국가 간 무역’으로 프레임을 바꾼 것도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에 숙종은 청나라에 곡물 교역을 공식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도록 결단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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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의 선의, 도대의 농간

그런데 청나라 강희제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였다. 청나라 예부에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희제는 개시를 허락하고5 육로로 2만 석, 해로로 2만 석을 운반해 중강으로 보내주라고 명령했다. 여기에 무상으로 1만 석을 추가로 제공했다. 이 중 육로를 통해 먼저 도착한 2만 석은 조선 조정에서 사들여 평안도와 서울 지역의 백성 구휼미로 활용했다. 조선에서 요청한 지 두 달여 만에 신속히 진행된 일로 강희제로서는 상당한 선의를 보인 것이다. 그 덕분에 조선은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강희제는 직접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라는 글을 지어 이때의 일을 기록했다. “조선이 흉년을 아뢰자 수천 리를 옮기는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수만 석의 곡식을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고, 나라 곳곳에 두루 나누어 주었으니, 이는 단지 한때의 재해를 구제한 것에 머물지 않고, 실로 번국(藩國)6 에 은택을 널리 베풀어서 선대의 덕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대규모 국제 원조를 통해 번국의 위기를 해결하고 번국 백성들을 위무한 황제의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청 제국의 위상을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황제의 선의는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해당 업무를 자원해 총괄했던 우의정 최석정이 무마하긴 했지만 조선 국왕이 직접 국경에 나와 황제의 은혜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라는 청의 요구가 조선 사대부들의 심기를 건드렸다.7

그것뿐이 아니다. 해상 운송을 감독했던 청의 이부시랑(吏部侍郎) 도대(陶岱)가 해운미의 가격을 이미 조선이 구매한 육운미보다 높게 책정하면서 논란을 불러왔다. 운송 비용이 싸서 해운미가 더 저렴할 것으로 예상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도대는 청나라 상인들이 사사롭게 가져온 곡식과 각종 물화(物貨, 물품과 재화)를 비싼 값에 사라고 요구하며 강희제가 준 무상 구휼미 1만 석을 내어주지 않았다. 청나라 상인과 짜고 폭리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최석정은 한 달여에 걸친 끈질긴 교섭 끝에 사사로운 거래 요구를 수용해 주는 대신 해운미의 가격을 육운미와 동일한 수준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청나라 상인들도 자신들이 가져온 상품을 조선에서 소화해 주지 않으면 손해였기에 최석정의 벼랑 끝 전술이 통할 수 있었다. 이는 현대 협상론에서 말하는 역(逆)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전략과 닮았다. 즉 대안이 없을 때 상대방이 갖게 될 리스크를 감안해 협상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개시를 여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노론 강경파가 청의 태도를 문제 삼으며 반발했다. 특히 사헌부 집의 정호는 “원수임을 잊은 채 동정을 애걸하며, 분통함을 삼켜야 할 곳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제해 줄 것을 바랐으니, 우리의 약함을 보여 주고 저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했으며, 강한(江漢)8 의 물로도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스스로 취하고 훗날 대단히 대처하기 힘든 우환 거리를 남겼습니다”9 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이 일은 본래 내켜서 한 일이 아니다. 온 나라의 백성을 위해 만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라며 무마하려 했는데 바로 다음 날 조선의 사대부들을 경악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석정이 가져온 서한에 도대가 자신을 ‘권제(眷弟)’라고 칭한 것이다.10 권제란 인척간 동년배에게 자신을 겸양해 사용하는 표현이다. 청나라의 일개 차관급 신하가 조선 국왕과 맞먹으려 한 것이다. 외교적 결례를 넘어선 매우 모욕적인 표현이었다.

조선의 조야는 격앙됐다. “동해의 물을 모두 기울여도 그 치욕을 씻기에 부족하다”11 라며 이 일에 관련된 신하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비판은 우의정 최석정에게 집중됐는데 40여 일에 걸쳐 그를 탄핵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6월 20일에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동으로 최석정을 삭탈관직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12 하라고 상소하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을 처벌하라는 목소리가 조정을 가득 채우는 동안에도 최석정은 묵묵히 소임을 다했다. 청나라 곡식 도입과 관련한 주요 현안들을 마무리 지었고 그 덕분에 북쪽 지방을 중심으로 구휼미가 배급되면서 많은 백성이 기근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큰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한 최석정은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죄를 물어달라고 요청했다.13 최석정은 도대가 준 명첩의 ‘권제’라는 글자를 봤을 때 “그 자리에서 다투고 찢어 버리는 것이 마음에 시원한 일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저들의 일은 정상적인 관례로 대할 수 없고 만약 극력 다투었다가는 저들이 화를 내어 큰 근심을 만들어 낼 것이니 차라리 자신이 조정으로부터 처벌을 받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권제’라는 단어에 반발해 곡식 도입 문제가 어그러지면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아서 자신이 오욕을 뒤집어쓸 각오를 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이런 최석정이 고마웠지만 끝내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지금의 논의는 실로 지나치다”14 라며 역정을 내긴 했지만 신하들의 파상공세를 이기지 못했다. 숙종은 7월 20일 그를 삭탈관직했고 8월 30일에는 문외출송시켰다. 최석정이 비록 11월 9일 판중추부사가 돼 다시 조정에 출사하긴 했지만 청에 아부해 또 다른 치욕을 불러왔다는 낙인은 더욱 짙게 새겨졌다. 숙종 32년 3월 3일, “최석정의 할아버지 최명길이 병자호란 때 화의를 주장하고 절의(節義)를 잃어서 강상(綱常)을 무너뜨리더니” “최석정도 스스로 수치를 잊고 나라를 욕되게 한” 것으로 볼 때 “집안 내림으로 취미가 오랑캐에 영합하고 황조(皇朝, 명나라)에 배반하는 것”이라는 송무원의 상소는 당시 조선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반청(反淸) 사대부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했다. 나라를 지켜낸 할아버지와 백성을 살려낸 손자를 매국노라며 손가락질했으니 앞으로 누가 오욕을 감내하며 자신을 희생하겠는가?


위기 대응의 조건

청나라 곡식 도입을 둘러싼 이상의 과정은 우리에게 몇 가지 시사점을 준다. 우선 조직의 생존보다 우선하는 명분은 없으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용적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청나라는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복수설치(復讐雪恥)’15 의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명나라로 표상되는 ‘중화(中華)’의 정신을 숭상하고 청나라와 같은 오랑캐를 물리치라는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하지만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이 죽어가는 상황에선 대의명분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서두에서 한 질문, “원수에게 머리를 숙이며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조직과 구성원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답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노론 강경파들의 반발이 여전했지만 대사간 박태순이 ‘청의 도움을 받는다’는 프레임을 ‘이웃 국가 간 무역’으로 전환해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하고, 숙종이 개시를 위한 사신 파견을 결단하며, 우의정 최석정이 극심한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도대와의 교섭을 진행한 것은 모두 ‘실용적 유연성’에 기반한 것이다.

다음으로 최석정의 행보는 위기 시 실무 책임자가 갖춰야 할 태도를 보여 준다. 도대의 오만한 태도와 지나친 가격 요구, ‘권제’라는 모욕적인 표현 앞에서도 그는 판을 엎지 않았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굶주린 백성을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릇 리더는 조직과 구성원을 위해 오명을 뒤집어쓰고 개인적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때가 있다.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을 알면서도 “차라리 내가 조정의 처벌을 받겠다”며 곡식 도입을 끝까지 성사시킨 그의 모습은 진정한 책임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다만, 최고 결정권자인 숙종이 이런 최석정을 지켜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숙종은 청나라에 손을 내미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정치적 반발을 통제하지 못했다. 명분론에 입각한 강경파들의 공세에 밀려 최석정에게 책임을 묻고야 만다. 파격적인 대안은 그만큼 위태롭기 마련이다. 그 일을 수행한 담당자에게 닥칠 위태로움을 막아주지 않는다면 다시는 그런 힘들고 궂은일에 기꺼이 나설 담당자를 만나기 힘들어진다. 최명길과 최석정, 두 조손(祖孫)이 고초를 겪은 이후 국가적 난국에 서슴없이 자신을 던진 사람이 지극히 드물었다는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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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장재웅

    정리=장재웅jwoong04@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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