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17세기 말 조선은 을병 대기근 앞에서 내부 역량이 바닥나자 불구대천의 원수 청나라에 곡물 원조를 요청하는 초유의 결단을 내렸다. 대사간 박태순은 청의 도움을 국가 간 무역이라는 경제 프레임으로 전환해 사대부의 심리적 저항을 풀어냈고, 숙종은 개시(開市)를 위한 사신 파견을 결단했다. 현장 책임자였던 우의정 최석정은 청 이부시랑 도대의 가격 농간과 권제(眷弟)라는 외교적 모욕 앞에서도 판을 엎지 않고 교섭을 끝까지 성사시켜 수만 석의 구휼미를 확보했다. 그러나 숙종이 명분론 강경파의 파상공세로부터 최석정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이후 조선에서는 국가적 난국에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인물이 자취를 감췄다. 이 사례는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실용적 유연성과 리더의 정치적 엄호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수에게 머리를 숙이며 도와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가?”
17세기 말 조선이 맞닥뜨린 질문이다. 을해년(1695년)과 병자년(1696년)을 거치며 전 국토를 강타한 ‘을병 대기근’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백성의 진휼을 감당할 내부 역량은 바닥을 보였다. 왕실과 조정의 재정 비용을 대폭 절감하고 비축미를 방출했으며 심지어 신분을 높여주고 관직을 팔아서까지 재원을 마련했지만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나라의 곡식을 들여오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그래서였다. 1696년(숙종 22년) 11월 7일 도승지 이유(李濡)가 처음 건의한 이래, 이듬해 5월에는 대사간 박태순(朴泰淳)이 중강(中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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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공무역 시장인 ‘개시(開市)’를 열어 청나라의 곡물을 사 오자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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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서 돌파구를 찾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신하가 동의하지 않았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무역하면 작은 나라가 손해를 본다’ ‘우리가 요청했으므로 저들이 높은 값을 불러도 우리는 무조건 살 수밖에 없다’와 같은 경제적인 우려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오랑캐’ 청나라에 아쉬운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박태순은 9월에 다시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 일은 우리가 부끄럽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고 저들이 은혜를 베푸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통하게 해 이익을 나누는 것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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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역설했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말고 그저 이웃 국가 간 통상적인 무역 활동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