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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 국가경영 : 극단으로 치달은 당쟁

리더가 당파갈등 조장…
정치보복 악순환 늪

김준태,정리=장재웅 | 428호 (2025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은 46년간 조선을 통치하며 여러 업적을 남겼지만 잦은 환국으로 신하들 간 갈등과 대립을 격화하고 당쟁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기도 했다. 경신환국(庚申換局), 기사환국(己巳換局),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이어지는 순정 때 환국은 모두 숙종이 강제로 집권 세력을 교체하고 일당이 독점하는 정권을 출범시키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러한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은 서인과 남인 간의 관계를 단순히 반대파가 아닌 ‘원수’로 만들었다. 또한 왕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 또 정권 교체를 당할지 모르므로 아예 상대 붕당을 멸절시키겠다면서 서로가 무리수를 두게 했다. 그 결과 우리 정파가 아니면 악이고 적이며 척결해야 할 원수로 여기는 퐁조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1674년 8월 18일, 경신 대기근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한 현종이 승하하고 닷새 후 조선의 제19대 군주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이 보위에 올랐다. 그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였음에도 수렴청정(垂簾聽政) 없이 곧바로 친정(親政)에 나섰다. 신하들로부터 자질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정통성 또한 완벽했기 때문이다.1 이후 숙종은 46년간 조선을 통치하며 여러 치적을 남겼는데 밝은 면만 있지는 않았다. 특히 잦은 환국(換局)2 으로 신하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격화하고 당쟁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든 점은 그가 저지른 큰 실책이다.


일당 독점의 시작

16세기 중반 붕당이 태동한 이래, 동인과 서인이 격렬하게 부딪혔던 기축옥사(己丑獄事)3 , 북인 강경파가 다른 당파를 탄압한 폐모살제(廢母殺弟)4 등 붕당들이 사생결단했던 시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대에 공존의 틀이 무너진 적은 없었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았지만 남인 역시 중용됐고 서로 견제와 균형 속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민생과 직결되는 개혁이나 국가적 재난 앞에서는 합심해 난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이 같은 추세는 이념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예송(禮訟) 후에도 유지됐다. 2차 예송이 남인의 승리로 끝났지만 조정의 요직은 여전히 서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런데 숙종의 시대가 시작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현종이 승하하자 송시열에게 지문(誌文)5 을 지으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유생 곽세건이 효종을 서자로 폄훼해 현종에게도 큰 죄를 지은 죄인인 송시열에게 그런 막중한 일을 맡겨선 안 된다고 상소했다. 서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곽세건을 공격하고 송시열을 두둔하자 숙종은 크게 진노했다. 여기에 ‘민신 대복(代服)’ 사건까지 벌어졌다. 민신이란 사람이 할아버지가 죽자 정신병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참최삼년복(斬衰三年服)’6 을 입고 상주 노릇을 했는데 당시 타당성 검토를 의뢰받은 송시열은 송나라 황제 영종의 사례7 를 거론하며 문제가 없다고 자문했다. 이는 왕실의 특수한 예법을 함부로 사가에 적용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숙종은 상(喪)을 잘못 주관하게 만든 죄를 물어 송시열을 처벌하도록 했다. 이 두 사건이 중첩되며 송시열은 결국 덕원, 지금의 원주 땅으로 유배를 간다.8 그와 함께 송시열을 옹호하던 서인의 상당수도 관직에서 쫓겨났고 조정은 남인 위주로 채워졌다.

하지만 남인 정권도 오래가진 못했다. 1680년(숙종 6년) 3월 28일, 숙종은 남인의 군권을 빼앗은 데 이어 닷새 만에 조정을 서인 일색으로 전면 교체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했다. 남인은 손 써볼 틈도 없이 밀려났는데 남인의 영수 허적과 윤휴, 남인 군부를 대표했던 유혁연이 사약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이조판서 이원정이 장살(杖殺)9 당하는 등 큰 참화를 입었다. 표면적인 명분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숙종의 당숙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형제10 와 역모를 꾸몄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남인이 막강한 군권(軍權)을 가진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11 를 설치하는 등 권력을 휘두르자 숙종이 왕권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벌인 일이다.

그런데 환국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689년, 숙종이 희빈 장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원자(元子)’12 로 삼으려 하자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은 중전이 적자를 출산할 수 있으니 기다려야 한다며 반대했다.13 숙종은 이를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하는 것으로 여겨 격노했고 중전을 폐위하고 조정을 남인으로 전면 교체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시행한다. 이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영의정으로 조정을 이끌었던 김수항이 사약을 받았고 재상을 지낸 김수흥, 민정중은 귀양을 가 유배지에서 죽는 등 서인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또 환국이 벌어졌으니 1694년(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중전이 된 장희빈과 왕세자를 등에 업은 남인 정권이 전횡을 휘두르며 숙종의 왕권 행사에 방해가 되자 숙종은 남인을 축출하고 조정을 다시 서인으로 채웠다. 그 과정에서 영의정 권대운과 좌의정 목내선이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되고 우의정 민암이 사사되는 등 남인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희빈 장씨도 중전에서 빈으로 강등됐고 인현왕후가 복위했다. 이상이 숙종이 벌린 세 번의 환국이다. 모두 숙종이 강제로 집권 세력을 교체하고 일당이 독점하는 정권을 출범시키는 형태로 진행됐다.


환국이 초래한 파국

이러한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은 조선 정치를 크게 변질시켰다. 숙종은 붕당 간 갈등을 해소하거나 조율하지 않고 오히려 심해지도록 조장했다. 갈등을 조장한다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건전한 경쟁을 촉발하고 성과를 내려면 꼭 필요한 전제가 있다. 게임의 규칙이 공정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하며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싸우더라도 선을 지켜야 하고 이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방법이 다르더라도 나라와 백성에 대한 상대방의 진심을 부정해선 안 된다. 반대파는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갈등 속에서 합의를 도출할 수 있고 대립하면서도 협력을 끌어낼 수 있다. 적어도 선조에서 현종까지의 붕당들은 그랬다.

한데 숙종은 한 당파가 조정을 독점하고 반대 당파는 모두 몰아내는 환국을 갑작스레, 그것도 ‘거듭’ 감행함으로써 불신과 적대감을 키웠다. 왕이 마음먹으면 언제든 우리 붕당이 버려질 수 있고 상대 당파에 의해 전멸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일종의 ‘분열 지배 전략(divide and rule)’인데 군주가 ‘게임의 규칙 제정자’로 자리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게 됐지만 붕당의 건전성은 사라지고 분열과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정치 보복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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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경신환국 때 허적과 윤휴, 기사환국 때 송시열과 김수항 등 각 당파의 영수들을 죽인 것은 패착이었다. 그로 인해 서인과 남인은 단순히 ‘반대파’가 아니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가 됐다. 또한 왕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 또 정권 교체를 당할지 모르므로 아예 상대 붕당을 멸절시키겠다며 서로가 무리수를 두게 했다. 서인이자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가 남인을 일망타진할 목적으로 김익훈을 사주해 남인이 역모를 꾀하도록 함정을 팠다가 들통이 났고 남인은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역모로 몰아서 서인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다 실패한 일도 있다. 그야말로 파국이었다.

상황이 이와 같다 보니 온건파가 자리할 공간도 없었다. 남인 정시한은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했다가 삭탈관직당했고 갑술환국으로 영의정이 된 남구만은 남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이며 희빈 장씨와 그가 낳은 세자를 보호하다가 파직당했다. 조정엔 오로지 강경론으로 가득했고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의 언어만이 넘쳐났다. 이후 숙종 후반기에서 영조 전반기에 걸쳐 펼쳐졌던 노론과 소론의 극단적인 당쟁, 정조 연간에 진행된 벽파와 시파의 격렬한 정쟁도 이 같은 정치 문화의 산물이다. 우리 정파가 아니면 악이고 적이며 척결해야 할 원수로 여기는 풍조가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성원의 갈등을 증폭해 이익을 보려는 리더들이 극성을 부리고 상호 존중과 신뢰가 사라진 채 분열과 적대의 언어가 횡행한다. 반대편과 공존할 생각은커녕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며 내가 무조건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렸다고, 반대편은 아예 사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위기에서 구성원들이 힘을 합칠 수 있을까? 거대한 불확실성과 맞서기 위해 공동체의 역량을 총결집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숙종의 시대가 저지른 잘못을 지금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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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장재웅

    정리=장재웅jwoong04@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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