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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 국가경영: 효종 시대의 경세가들

자신보다 국가 위하는 희생 리더십의 힘

김준태,정리=장재웅 | 409호 (2025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효종의 시대가 대격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안정과 국가 운영의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까닭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명감을 지닌 신하들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효종의 첫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은 나라를 위해 개인의 오욕을 감수하면서 청나라의 요구에 따라 삼전도비 비문을 작성했고 효종 즉위 후에는 청의 압박 속에서 반청 인사로 몰리는 것을 감수하며 책임을 스스로 떠안았다. 또한 효종 시대를 대표하는 재상인 김육은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흔들림 없이 대동법을 추진해 효종 정권의 정책 추동력을 제공했고 왕의 불쾌감을 무릅쓰고 간언을 멈추지 않는 태도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진 이 같은 정치가들의 희생과 결의는 불확실성과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리더십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효종과 현종의 시대가 대격변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무난하고 평화로웠던 시기로 기억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군주의 리더십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분이겠지만 정치가들의 활약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한 신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그중에서도 효종 시대에 활동했던 경세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번의 희생, 이경석

나라를 위해 오욕을 뒤집어쓰거나 백성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은 정치가가 보여줘야 할 태도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신념과 용기도 필요하지만 자기 한 몸뿐 아니라 가족과 후손들까지 고초를 겪을 수도 있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두 번이나 그런 결단을 보여준 인물이 있다. 조선의 2대 왕 정종의 후손으로 효종의 첫 영의정이었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다.

이경석은 서인의 거두 김장생의 제자로 광해군 때 소성대비(인목왕후)의 폐서인에 반대하다 과거 급제가 취소돼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야 관직에 나설 수 있었다. 병자호란 직후 예문관 제학1 을 맡고 있었는데 이때 사건이 벌어졌다. 청나라가 자신들의 승리를 기념하고 청 황제의 공덕을 칭송하는 ‘대청황제공덕비’, 이른바 삼전도비를 세우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이 매국노 취급을 받는 마당에 누가 나서서 비문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청나라 ‘오랑캐 두목’을 예찬하라니, 누구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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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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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장재웅

    정리=장재웅jwoong04@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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