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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중국 왕조 교체 시점의 국가 대전략 실패 (2) 17세기 명청 교체기

병자호란은 ‘우월적 전략’을 폐기한 대가

최중경 | 330호 (2021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명나라와 청나라가 대립하던 17세기 조선은 청나라 편을 들거나 아니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외교 전략이었다. 그런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노골적으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 당시 조정은 군사 작전의 성공보다 전쟁 이후의 왕권 안위에 집중해 수십만 백성을 전쟁 포로로 만드는 실책을 저질렀다. 기업 또한 규제 당국과 경쟁 기업 사이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오너 편중의 사고를 버리고 합리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의문의 병자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과 관련해 학교 역사 시간에 주로 배운 내용은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 인조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삼전도의 굴욕, 야만족 청나라에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은 선비의 절개, 기어이 치욕을 갚기 위해 추진한 북벌계획이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왜 일어났는지, 당시 동아시아 세력 판도와 조선의 외교 전략은 어땠는지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북벌계획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냉정한 분석도 없다. 청나라에 짐승처럼 끌려가 고초를 겪은, 심지어 최대 50만 명이나 됐던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백성의 고통도 애써 외면한다. 병자호란 중에 두 나라의 주력 부대가 격돌한 전투가 없었고, 압록강 도하 5일 만에 청군 선봉대가 한양에 들어왔는데도 조선군의 방어 전략에 대한 평가도 없다. 뭔가 명쾌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과 만주족은 발해를 함께 건국하는 등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반면 한족은 고조선과 백제, 고구려의 멸망 과정에서 우리 민족에게 치욕과 고통을 안겼고 조선 초기에도 공녀와 재물을 요구하며 괴롭힌 적이 있다. 중원의 상황을 보면 명나라는 농민 반란과 만주족의 도전으로 내우외환을 겪으며 국운이 급격하게 기우는 중이었다. 명나라는 병자호란 후 7년여가 지난 1644년에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군에게 멸망했다. 반면 만주족은 부족 통일을 이뤄 주변 민족을 복속시키고 한족을 포섭해 홍이포와 같은 첨단 무기를 자체 생산하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대립하던 17세기 조선은 청나라 편을 들거나 아니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외교 전략이었다. 그런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중립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의 외교 노선을 버리고 명나라 편에 서서 노골적으로 청나라를 적대시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인조는 왜 그런 상식 밖의 선택을 했을까? 만일 인조가 청나라 편에 섰더라면 드넓은 중원을 차지한 후 만주를 비워놓고 중원으로 진출했던 청나라로부터 고구려 옛 땅을 관리하는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한 이로 인해 조선 백성을 만주로 이주시킬 기회를 얻었을지 모른다.

이처럼 의문투성이인 병자호란은 기존 역사 교실의 틀을 벗어나 전략적 관점에서 철저히 해부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가 보는 병자호란에 대한 시각이 다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시야를 넓혀 역사를 이성적으로, 또는 전략적으로 보는 훈련을 하기 위한 관점의 전환 훈련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이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다.

만주족의 굴기와 광해군의 지혜

명나라 정벌의 기치를 올린 누르하치가 이끄는 만주군과 명나라 군대가 1619년 사르후에서 싸웠을 때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병하면서도 도원수 강홍립에게 따로 밀지를 줘 세가 불리하면 누르하치에게 투항하도록 했다. 실제로 강홍립은 적당히 싸우다가 누르하치에게 투항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한 은혜, 즉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대해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인식 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조는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도와줘서 이긴 것이고 조선군은 공을 세운 바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선조실록(1602년 7월23일)에 따르면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해 강토를 회복하였으니 … 이는 호종했던 신하들이 충성스러웠던 덕분 … 우리나라 장졸은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고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다. 국난에 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국난 극복의 공이 명나라 원군을 불러들인 자신에게 있다고 치졸하게 강변한 것이다.

반면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전장을 누볐던 광해군은 조선군을 앞세우고 뒤에서 세만 과시하는 명군의 소극적 태도와 조선 백성 갈취 1 , 여차하면 조선 3도를 할양해서라도 왜군의 명나라 진입만은 막으려 시도했던 위선적 태도, 조선 군관민의 분투를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광해군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명이 조선을 구했는지, 조선이 명을 구했는지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만주 사이에서 힘의 추가 어디로 기우는지를 예의주시했다.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투항해 누르하치의 참모가 된 것은 훗날 힘의 추가 어디로 기우는지를 파악하기 쉽고, 힘의 추가 만주로 기울 때 조선의 행마가 쉬워질 수 있는 묘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광해군이 어렵게 닦아놓은 길을 막아버린 모양새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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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중경choijk1956@hanmail.net

    한미협회장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 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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