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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최고의 미래학 교과서

우종근 | 30호 (2009년 4월 Issue 1)

요즘은 ‘역사 범람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때는 ‘역사의 고도’ 하면 으레 경주를 먼저 떠올렸는데 신라 천년이 파묻혀 있어 어디를 파건 역사가 나온다고 했지만, 지금은 서울의 세종로를 파도 역사가 나왔다고 야단들이다. 그뿐이랴. 요즘 서점에 나오는 인문 분야 책들은 어쩌면 그렇게 역사 일색인지 놀랄 따름이다. 마치 지금 조선시대를 살고 있나 착각할 정도로 역사 관련 내용과 제목들이 즐비하다.
 
이 많은 역사들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것일까. 어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한글로 번역되고 인터넷에 개방되면서 누구나 손쉽게 읽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키워드 검색까지 있으니 ‘기녀’를 입력하면 곧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기녀들에 얽힌 사건들을 한눈에 찾아볼 수 있고, 조금 부지런하면 수많은 기녀 스캔들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할 수도 있다.
 
이런 공급 측의 사정 말고 수요 측면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인문학을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문명의 중심 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술문명에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인간 사고와 행동 원리가 담겨 있는 법이다. 그래서 한 문명이 한계 상황에 부딪히면 자연스레 인문학을 되돌아보게 된다. 인문학을 ‘지식의 미네르바’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1990년대 이후 인문학 위기론 속에서도 인문학, 특히 역사의 범람 현상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역사의 가장 큰 덕목은 우리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주는 것이다. 눈앞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지혜와 힘을 역사는 넉넉하게 품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듯이 문명과 기술은 발달할지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상호 이익과 생존을 위해 공동체를 만들고, 리더를 선출하고, 추종자를 모으고, 갈등과 분열이 생겨나고 해소되는 인간의 삶은 반복적 측면이 강하다. 수천 년간의 역사에 남겨진 수많은 사례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도 생생한 교훈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특히 단기간 고도성장을 이룬 우리나라 기업의 CEO들에게 역사는 반드시 필요한 아이디어의 원천이고 미래학 교과서다.(‘저자의 글’)
 
역사 마니아인 김경준 딜로이트컨설팅 부사장이 또 한 권의 저서를 내놨다. 매우 폭넓은 독서 이력을 지닌 그는 수년 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2006년)로 호평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역사 이야기를 추린 ‘CEO, 역사에게 묻다’(위즈덤하우스)로 지평을 넓혔다.
 
저자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실용적이다. 단순한 스토리텔링의 재미라든가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취향만으로 많은 역사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앞날을 조명하는 미래학’이다. 이른바 옛것에 현재를 비추어보고 미래를 대처한다는 ‘호고(好古)-우금(憂今)-설래(設來)’의 정신이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메시지를 추려내 전달하는 힘을 견지하고 있다.
 
‘역사에서 찾은 위기극복 전략과 리더십’이라는 부제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특히 이번 책에서는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금융위기를 이겨나가는 지혜에 중점을 뒀다.
 

위기가 닥치면 리더도 불안하다…. 미국의 짐 스톡데일은 베트남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8년 동안 베트남의 하노이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수용소에서 가장 일찍 죽는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라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크리스마스에는, 추수감사절에는 석방되겠지 믿고 일종의 자기 최면을 걸고 희망을 가졌다가 이것이 좌절되면 극단적인 실망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다. 반면 분명히 풀려난다는 신념을 가지되, 단기간 석방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을 받아들이고 견뎌냈다.(‘합리적 낙관주의로 무장하라’)
 
위기는 갑작스럽게 다가왔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 어두운 터널, 이것을 극복하는 리더의 덕목은 ‘스톡데일 패러독스’에 있다. 저자는 이를 눈앞에 닥친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되 희망의 믿음을 잃지 않는 합리적 낙관주의라고 표현한다.

서요(西遼)의 황제 야율대석(1087∼1143년)은 요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200명의 인원만을 이끌고 탈출해 7년 만에 중앙아시아에 강력한 유목제국(카라키타이)을 세운 인물이다…. 요의 창업주 야율아보기의 8대손인 그는 금송(金宋) 연합군의 협공으로 멸망 위기에 빠진 요를 되살리기보다 새로운 국가를 세워 요를 잇자는 대담한 전략을 세웠다. 이슬람의 요충 사마르칸트를 함락한 그는 낯선 땅에 자신의 제국을 세웠다. 이슬람 세력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 포용 정책과 중국식 제도로 대제국의 기틀을 정비했다.(‘판을 바꿔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라’)
 
중세 유럽인들에게 ‘동방의 기독교왕’ 프레스터 존의 환상을 불러일으킨 야율대석의 과감한 행동 방식은 위기 돌파의 방법을 생각하는 경영자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주는 대목이다.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는 정면 돌파하는 방법도 있지만, 우회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가능성이 높은 전략이기도 하다. ‘사고의 틀을 한번 바꿔보자.’ 위기일수록, 아니 위기이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발상이 아닌가 한다.
 
나폴레옹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군대의 사기였다. 그는 “사기가 병사들의 숫자보다 세 배는 더 중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도 나폴레옹이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금전적 보상뿐만 아니라 명예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사기를 높이는 훌륭한 방안임을 깨닫고 있었다.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훈장이 결국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역할을 하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데 효과를 본 이 무공훈장제도는 다른 나라에도 도입되었다.(‘확실한 보상구조를 만들어라’)
 
역사의 상식 또한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의 하나다. 모두 14가지 주제에 50개가 넘는 이야기들이 빼곡히 든 ‘앤솔로지’ 스타일의 책이다. 이야기가 단편적이라는 불만도 있겠지만, 보기 드문 ‘토종’ 컨설턴트인 저자가 업무에 적잖이 동원했을 역사 사례들을 직접 읽어보는 계기가 된다.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중국사와 일본사를 공부하고, 언론에 입문해 현재는 한국경제신문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 칼럼 ‘우종근의 사사(史史)로운 이야기’를 한국경제신문에 연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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