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신제품 보강 회의가 있는 날. 지난 번 컨셉트 보드 평가 결과 제품 차별화가 부족하다는 소비자 의견이 많아 이를 보완하기 위한 회의다. 지난 한 주 동안은 컨셉트 보드 평가 이후 가라앉아 있던 팀 분위기도 쇄신할 겸 팀원 모두가 초심으로 돌아가 바쁘게 움직였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우리 제품을 바라보니 기능과 디자인 면에서 새로운 차별화 요소를 찾을 수 있었다. 오늘 회의는 이를 토대로 새롭게 제품 컨셉트를 만들고 시제품 관련 계획도 대략 잡아보는 자리다.
이처럼 중대한 날, 아침부터 찬물을 끼얹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손대수!
회의 자료를 준비하기로 한 당사자가 회의 시간인 오전 9시가 넘어서도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30분이 지나서야 헐레벌떡 출근한 손대수의 차림새는 그야말로 가관이었으니, 부스스한 머리에 구겨진 옷차림에선 술 냄새도 풍기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면서 회의실에 들어선 손대수. 알고 보니 인사팀 박 과장님의 장모상에 다녀왔다는 것이다. 상가인 대구까지 가서 조문객 접대도 돕고 인사도 하고 고스톱도 치느라고 밤을 꼬박 새우고 왔다는데, 첫 기차를 타느라고 발인을 보지 못하고 온 것이 미안하다나 어쩐다나.
친부모 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부서나 학교 선후배 관계도 아닌데 왜 저렇게 오지랖이 넓은지 모르겠다. 회사 일이나 좀 그런 정성으로 해 보시지!
어쨌거나 회의는 시작됐고, 좀 더 다양한 의견을 들어 보는
게 좋겠다고 해서 이번에는 일반 소비자가 아닌 전문 소비자군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FGI)를 진행하기로 했다. 내가 기획한 제품이어서 내가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 인터뷰 준비와 진행을 직접 맡기로 하고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식견과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어서 우리 제품에 대한 좋은 의견을 내줄 수 있는 믿을만한 대상자가 누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으∼ 어쩌면 좋지?
궁여지책으로 미니홈피 1촌 명단을 살펴보기도 하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 명함첩까지 뒤적여 봤는데 수많은 이름과 번호 중에 연락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이름도 3분의 1은 되는 것 같다.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손대수가 슬쩍 말을 걸어온다.
“인터뷰 대상자 찾기 어려우시면 제가 좀 도와 드릴까요?”
“나도 헤매고 있는데, 네가 할 수 있겠어?”
“프로급 일반인으로 찾으면 되는 거죠? 아! 생활 가전 얼리어답터나 파워 블로거들은 어때요?”
“그럼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찾는 게 어디 쉽나?”
“잠시만요”라고 하더니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을 여는 손대수. 5분도 안되어 50여 명의 명단이 출력돼 나온다.
“이 정도면 되나요?” 하는데 명단을 보니 연구원부터 회사원, 가정주부, 학생, 대리점 사장 등 구성원도 무척 다양하다.
순서대로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는 손대수를 보니 이들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다. 이 가운데 시간과 여건이 허락하는 10명 정도가 참여해 주기로 해서 FGI 건은 무난하게 해결됐다.
이제 한시름 덜게 된 건가? 그런데 왠지 모르게 찜찜한 이 기분은 뭐지? 손대수, 얜 대체 뭐야? 대체 무슨 재주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알고 있고, 또 저렇게 능청스럽게 부탁할 수 있는 거지?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 왔는데, 입사 1년도 안된 손대수가 1시간 만에 해낸 일을 하나도 못 해내다니…. 이러다가 새파란 후배한테도 밀리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