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의 인생론
Article at a Glance
‘나’라는 개체가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성층권위에서 바늘 하나를 떨어뜨려 작은 색종이 위에 정확하게 꽂힐 확률 정도일지도 모른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너무나 당연한 듯 주어져 있는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넘기지 않고 진지하고 깊이 있게 사색하고 성찰하는 게 철학이라는 얘기다. 이 땅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퇴계 이황 선생도 세상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고,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였다. 퇴계 이황에 따르면, 우리는 하나의 ‘리’를 공유하는 하나인 존재인 동시에 제각기 다른 모습과 다른 일을 하며 전체의 조화에 참여하는 존재다. 누군가를 똑같이 따라하고 완전히 닮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나다움’을 긍정하고 사람다움에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 |
‘사람’이라는 기적과 철학의 시작
우리는 사람이다. 호모사피엔스의 형상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종의 특성대로 살아간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오늘도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잠을 잔다. 가끔 골프도 치고 술도 마시며 여행도 가고 문화생활을 즐기기도 한다. 필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닌, 우리의 일상이며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과연 이 일들이 정말로 당연할 것일까?
‘나’라는 개체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사람은 지구상의 생물 개체 중 몇 퍼센트나 차지할까? 지금 살아 있는 사람의 수를 대략 60억 명이라고 치자. 아마도 지구상에는 우주상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혹은 그 이상의 생물 개체가 살고 있을 것이다. 정말로 셀 수 없는 수의 개체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을 텐데 그 생명체 중에서 사람은 고작 60억 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같은 부모 사이에서 다른 이가 아닌 ‘내’가 수정돼 태어날 확률은 또 얼마인가? 이렇게 본다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쩌면 성층권 위에서 바늘 하나를 떨어뜨려 작은 색종이 위에 정확하게 꽂힐 확률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이라는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우 극적이고 특수한 일이다.
철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너무나 당연한 듯 주어져 있는 이 세상과 자신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넘기지 못하고, 진지하고 깊이 있게 사색과 성찰을 더한다. 이 세계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과 만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철학의 질문이다.
사실 이 물음은 철학자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충분히 품을 수 있고 또 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 존재의 의미에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은 소위 철학자나 철학 연구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존재와 삶의 의미를 묻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내려는 노력, 그것은 호모사피엔스의 형상을 가진 존재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숙제일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날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할 기회를 박탈당하기 일쑤다. 이러한 생각은 이내 ‘딴생각’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된다.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성적은 미끄럼틀을 탈 테고, 사회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금방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자세와 세상에서의 일이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성찰 없이는 진정한 삶의 성공을 성취해낼 수 없다. 주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삶에서 진정한 성공과 행복을 이뤄낸 인물은 이 질문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눈앞에 주어진 일에 쫓기지 않고, 넓고 긴 안목으로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력(觀照力)이 진정한 삶의 성공과 행복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진리는 결국 하나지만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은 다양할 수 있다. 마치 목적지에 가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선택지가 여럿인 것처럼, 진리에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진리 자체는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찾는 길은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자가 처해진 상황, 그리고 자신의 성향에 맞는 길을 택해 그 길을 갈수 있도록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는 길은 고르게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 오늘은 퇴계 이황 선생(1501∼1570)에게 길을 묻는 시간을 갖기로 하자. 우리 땅, 우리 문화 안에서 철학을 하신 분이니 조금 더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 세상은 무엇인가
먼저 퇴계의 세계관을 살펴보자. 퇴계는 이 세계를 어떤 눈으로 바라봤을까? 퇴계는 유학자이며, 그중에서도 주자학의 맥을 이어받은 성리학자다. 따라서 퇴계의 세계관을 엿보기 위해서는 번거롭지만 리기론(理氣論)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리(理)니, 기(氣)니 하는 촌스러운(?) 옛날 용어는 벗어던지고 세련된 현대어로 바꾸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 아직 필자는 그런 능력이 되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의 졸음을 유발해서는 안 될 테니 최대한 쉽고 친절하게 해석해 보고자 한다.
유학의 전통은 자질구레와 구질구질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와 개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나 물고기를 잡는 통발과 같은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한 분석보다는 직관적 이해를 중시한다. 그래서 용어와 개념은 다양하게 분화되지 않고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다. 가령 공자가 사람의 사람다운 속성, 남을 사랑하는 마음,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 따뜻한 사회 등과 다양한 층차의 의미를 인(仁)이라는 한 글자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리학에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은 리(理)와 기(氣)뿐이다. 성리학은 리와 기라는 두 개념으로 이 세계가 생성되고 운행되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다.
“천지 사이에는 리가 있고 기가 있다. 리는 형이상의 도(道)로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다. 기는 형이하의 물질로서 만물을 낳는 재료이다.” 1 “리가 있으면 반드시 기가 있으니 나누어서 말할 수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리이고 모든 것이 기이니, 어느 것인들 리가 아닌 것이 있으며, 어느 것인들 기가 아닌 것이 있으랴?” 2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에게 세상은 무엇으로 돼 있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세상은 리와 기로 돼 있다. 그러나 리 따로, 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리와 기는 함께 있다. 세상은 전체가 하나의 리와 기의 조합이며 각각의 사물도 또한 하나의 리와 기의 조합이다.” 이게 무슨 선문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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