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의 출발은 산뜻했다. 이번 회식은 미래상품 기획팀이 첫 번째 전략 제품을 결정하고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동안 수고한 팀원들을 격려하고자 팀장님께서 특별히 준비하신 자리였다.
1차는 그동안 주머니 사정 때문에 쉽게 갈 수 없었던 회사 근처의 바닷가재 요리집에서 성대하게 치렀다. 팀장님께서는 1차가 끝난 후 법인카드를 넘겨주시고 자리를 뜨셨고, 남은 우리는 이게 웬 횡재냐면서 맥주집으로 향했다.
내 아이디어에 밀려 고배를 마신 유 대리님이 며칠 의기소침해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는데, 회식날 만큼은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사실 조금은 과하게 활발한 모습이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유 대리님 나름의 슬럼프 극복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특히 그동안 업무를 익히고 신제품 기획을 하느라 여유롭게 어울릴 수 없었던 팀원들과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 기뻤다. “회사 생활은 그저 모나지 않게, 무난히 잘 버티는 것이 제일”이라는 박 차장님과 “일단 시작했으면 자기 이름 석자쯤은 알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이 과장님의 설전도 흥미진진했다.
이렇게 팀원들과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마침 마케팅팀 직원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1차에서부터 술을 많이 마셔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던 유 대리님이 이들을 반 강제적으로 합석시켰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게 됐다.
처음엔 서먹서먹했지만 점점 자리에 흥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회사 생활 대부분을 연구소에 틀어박혀 지내온 내가 이렇게 사내 인맥을 넓힐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건너편에는 그동안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나 과장도 있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지만 입사는 2년이 빠르고, 공채 수석으로 들어와 사장님 이하 전 직원의 관심 속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마케팅팀의 재원이다.
나 과장은 빼어난 미모에다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거래처 직원들에게까지 인기가 많지만, 사내 평판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성격이 까칠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며, 그녀의 ‘호전적이고 당당한’ 태도가 회사 임원과의 인척관계 때문이라는 루머도 있다. 게다가 자기 능력만 믿고 직속 차장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차장이 사표를 쓰게 한 전적도 있다. 능력 있는 사람에 대한 시샘도 있겠지만 그녀는 직원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나잘난 여사’란 별명으로 통한다.
유 대리님이 자기보다 직급은 높지만 입사 후배인 나 과장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나서는데 내용이 어쩐지 좀 꺼림칙했다.
“나 과장, 여긴 강 대리야. 우리 팀 최고의 에이스지. 글쎄 이 자식이 나를 제치고 차기 상품 개발 프로젝트를 채갔지 뭐야. 얘가 그렇게 버르장머리가 없어. 아마 잘나가는 나 과장도 앞으로 조심해야 될 걸, 하하하. 물론 농담인거 알지?”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그 진담 같은 농담에 나는 물론 전체 분위기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 대리님은 계속 ‘따발총’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입에 지퍼를 채워버리고 싶었다.
결국 3차로 간 노래방에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미 많이 취했으니 집에 가자는 만류를 뿌리치고 들어간 노래방에서 유 대리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나잘난 여사의, 아니 나 과장의 허리를 휘감은 것이었다. 물론 술김이었고 그저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다 옆에 서있던 나 과장에게 블루스를 청하려던 것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매서운 따귀였다. 회사 여직원협회와 함께 ‘성희롱’에 정식으로 대처하겠다는 나 과장에게 이 과장님과 내가 싹싹 빈 후에야 무마됐지만, 이 일이 정작 내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로부터 며칠 후 특수조명기기의 컨셉트와 관련해 소비자 프로파일을 뽑아 오라는 팀장님의 지시가 있었다. 이래저래 담당자를 수소문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 과장이 담당자였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그런 사단이 있었는데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회사 업무에 필요한 것이니 공식적으로 업무 협조 요청을 하면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만, 사람 일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고민 끝에 나 과장에게 직접 찾아가 부탁을 하기로 했다. 나 과장이 좋아할만한 케이크도 하나 샀다. 설마 이런 나에게 면전에서 거절을 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과장님, 저 기억나시죠? 미래상품 기획팀 강 대리입니다.”
“무슨 일이죠?”
“저기, 저희 팀이 우리 회사 고객들의 연령별 프로파일 자료가 필요한데요. 마케팅팀에서 좀 도와주셨으면 해서요.”
“어디에 쓸려고 그러세요? 그리고 저 지금 아주 바쁜데요.”
“!! 아니…, 저…,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저희도 오죽 급했으면 이렇게 찾아왔겠습니까? 지난 번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사적인 감정은 좀 묻어두시고….”
“이봐요. 강 대리라고 했나요? 그쪽 팀은 예의와 도덕만 없는 줄 알았는데 일의 기본과 순서도 없네요.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해달라고 하면,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줄 줄 알았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