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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下

시대를 앞선 ‘발칙한 상상’ 결국 세대를 관류하다

김혜옥 | 107호 (2012년 6월 Issue 2)



 
모차르트, 공감을 위한 네트워크
 
네트워크 이론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크리스타키스(Christakis)는 ‘주관적인 연결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얼마나 인정받는가’뿐만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의 척도 역시 그 사람의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요소라는 것이다.1
 
모차르트는 ‘내가 이만큼이다’는 생각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0대부터 아버지, 누이와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각국의 귀족이나 왕족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고 가는 곳마다 주목받는 스타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이는가 하면 바흐의 막내 아들이자 유명 작곡가였던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와 런던에서 교분을 쌓으며 평판을 높이기도 했다. 심지어 1771년 15살의 나이로 밀라노에서 선보였던 오페라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는 초연부터 극장을 메울 정도로 성황리에 상연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곡가 알레그리(Allegri)가 남긴 ‘미제레레(Miserere)’를 한번 듣고 그 음을 채보해 오늘날에 전한 것도 그의 10대 때 업적 중 하나다.2
 
모차르트의 가장 대표적 업적은 지금껏 ‘듣기 쉬운 작품’을 지향했던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 유산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그는 양식적으로 충돌할 것이라 생각되는 표현들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 효과적으로 소화해 내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무곡 스타일의 리듬과 종교적인 코랄(Choral)풍의 선율이 조화를 이루는가 하면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성부 간의 연결이 기악 부분과 성악 부분의 조합을 통해 구현됐다.신의 위대함, 인간의 고민, 사랑과 감동과 같은 메시지들을 선율적으로 구현하는 데 능숙했던 것이다. 창작자 이전에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오케스트라 지도자이기도 했던 그는 미성숙한 카테고리로 남아 있었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을 고전시대의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 경험은 모차르트를 다소 자기중심적으로 만든 듯하다. 그는 감정 기복이 심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자신과 잘 맞는다고 판단한 인물들에 한해서 교분을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Handel)의 네트워킹 전략처럼 부가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이들과 소통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며 ‘천부적인 작곡가’라는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해심과 인지 수준을 갖춘 상대방을 원했다. 모차르트가 일평생 신임했던 보마르셰, 로렌조 다 폰테 같은 이들은 그의 음악을 ‘이상주의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귀족의 자제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비싼 레슨비를 받기도 한 모차르트는 스스로가 부여하는 이름값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3
 
“정해진 시간에 어느 마님의 댁으로 찾아가 그 집의 따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리고 저는 약속한 대로 특정한 음악의 악절을 가르치고 반복해서 연습시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 비위에 맞는 행동 같지 않습니다. 그냥 바보 같아요. 저는 천성이 작곡가요, 카펠마이스터인지라 이런 일들은 주님이 저에게 주신 재능에 합당한 행위가 아닌 것만 같이 느껴집니다.”4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대작곡가’는 결국 자신의 가치를 가장 잘 인정해 줄 수 있는 사람들로 제자 결연의 방향을 바꿨다. 1784년에는 가능성이 충만한 건반 연주자였던 바바라 플로이어(Babara Ployer)를 제자로 들여 직접 작곡한 피아노 콘체르토를 지도하는가 하면 미처 10살이 되지 않은 영재들을 발굴해 연주 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도 했다. 훔멜(Johann Nepomuk Hummel) 같은 이들은 7살에 모차르트에게 레슨을 받았고 멀리 영국에서 온 토마스 애트우드(Thomas Attwood)는 화성법과 작곡을 배우기 위해 빈에 머무르기도 했다. 제자 교육으로 모차르트는 당대 문화계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입소문 효과 덕을 봤다. 극장의 경영자들이나 오케스트라의 행정 담당자들도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황제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혁신적인 트렌드의 주도와 성공
 
사실 모차르트가 성공을 거두던 시기는 살리에리가 개인적으로 흥행의 힘을 받지 못했던 시기와 묘하게 겹친다. 독일인 작곡가와 이탈리아인 작곡가에 대한 시장의 선호가 계속해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살리에리는 ‘독일 문화’의 정수를 강조하는 풍조가 왕실을 중심으로 퍼지게 되면서 조금씩 불이익을 받게 됐다. 그 자신이 정통 독일 음악의 계보를 계승한 예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이었다. 이탈리아어 오페라가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시도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이것이 기회 요인이 됐다. 새롭게 오페라를 운영하려던 요제프 황제의 의지 및 방향과 맞았던 것이다. 실험적 성향이 컸던 독일어 오페라인 ‘징슈필(Singspiel)’ 작곡가를 원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무대로 다시 돌아온 ‘신동’ 모차르트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1782년 빈에서 왕실 귀족과 대중에게 선보여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K 384)’는 처음으로 독일어 오페라를 상연했던 모차르트에게 흥행을 안겨 줬다. 황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너무 좋은데, 내가 듣기에는 음표가 너무 많아. 그렇지만 아무튼 좋네.” 모차르트는 까다로운 감식안을 피력했던 요제프 2세에게 “저는 이러한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음표가 꼭 필요했습니다”라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 성공의 기쁨을 표현했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궁정 문화계에 깊게 관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빈으로 이사한 지 6년이 넘은 1787년에서야 궁중 실내악단의 전속 음악가로 임용됐다. 그나마도 자신의 작품을 쓰기보다는 기존 곡들을 연주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주류 음악인들의 오페라가 연주되지 않는 시기에 집중적으로 연주될 수 있었다. 외국의 중요한 사절이나 국왕급의 국빈이 방문할 때는 ‘글룩’처럼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작품을 올리는 것이 당대의 관행이었다. 모차르트 작품의 진가를 높이 샀던 주변 지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딱하게 여겼다. 오페라 극장의 전문 경영인이었던 오르시니 로젠베르그 백작(Count Orsini Rosenberg)은 젊은 천재가 직면해야 하는 불이익을 보다 못해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다른 이탈리아인 또는 프랑스인 작곡가들이 쉬는 기간에 가볍게 공연할 수 있는 이탈리아어 오페라 부파(Opera Buffa)를 써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정공법과 가격 전략으로 기존의 제품들을 압도하기에는 브랜드 영향력이 부족하니 조그마한 센스와 펀치 포인트로 충분히 감흥을 줄 수 있는 콘텐츠를 공급하자는 전략을 쓰자는 셈이었다. 이러한 조언을 바탕으로 1785년 모차르트는 또 다른 흥행 아이템을 성공리에 시장에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e Figaro)’이었다.5
 
모차르트는 극의 흐름을 이끌어 가는 주역부터 오케스트라의 단원에 이르기까지 흥행에 도움이 될 만한 연주자들을 일일이 직접 섭외했다. 그는 오랫동안 연습해야만 곡을 소화할 수 있는 범재들보다는 무대의 사정이나 지휘자의 해석 포인트에 따라 공연마다 발생할 수 있는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있는 임기응변을 가진 사람들과만 작업했다. 모차르트가 목소리만을 사랑해 교제했던 여자가 있다거나 특정 가수를 지나치게 편애했다는 설도 이런 이유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살리에리가 전문화된 명인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제품 자체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모차르트는 지휘자로서의 자신을 충분히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량 있는 신인들을 기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처음의 흥행은 다음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오페라 ‘돈 조반니(Don Giovanni)’는 ‘피가로의 결혼’이 성황리에 마무리되는 것을 눈여겨보던 오페라 기업이 모차르트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으로부터 시작된 작업이었다. 이 시절 모차르트는 대본가 로렌조 다 폰테와 가장 밀접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본은 음악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모차르트였지만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언어의 차이에 따른 감상의 변화, 음운의 조절에 따른 청중의 반응 등과 같은 세밀한 부분에까지 비평가들의 관심이 이어지자 보다 진일보된 음악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모차르트는 ‘남의 덕’을 본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은 천재였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1791년 그가 마지막으로 오페라 ‘마술피리(Zauberfloete)’를 남기고 죽기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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