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출근한 일만해 주임. 헝클어진 머리로 허겁지겁 들어오는 그를 보고 강 부장이 얼굴을 찌푸린다.
“지금이 몇 신 줄이나 알아? 대체 뭐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엉? 하여튼 요즘 어린것들은 시간 개념이 없어! 한 번만 더 지각하면 시말서 쓸 줄 알아!”
“아니… 그, 그건. 부장님이 어제….”
일 주임이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무언가 은밀히 얘기하려고 하자 강 부장이 버럭 성질을 낸다.
“내가 뭘!!”
“아닙니다. 이게 다 제 잘못이죠. 다음부터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절대로!”
누구보다 성실하기로 유명한 일만해 주임의 지각 사태.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어제, 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 2시 무렵. 곤히 자고 있던 일 주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일 주임은 강 부장의 휴대전화 번호임을 잠결에 확인하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화벨 소리에 결국 일어나고 말았다. 전화기 너머로 얼큰하게 술이 취한 강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일 주임. 잤나? 지금 급한 일이 있는데 ××동으로 빨리 와. 지금 당장!”
일 주임이 도착한 곳은 어느 단란주점. 그를 본 강 부장은 대뜸 자신의 자동차 열쇠를 던졌다.
“저, 부장님.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러시면 좀…. 오늘은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대리기사 부르시죠.”
“내가 대리기사한테는 차 못 맡기는 거 알면서 왜 이래? 프로답지 않게. 옜다! 만오천 원! 대리 요금이니까 됐지? 자, 가자고! 딸꾹∼.”
일 주임이 그렇게 술 취한 강 부장을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이 돼서야 깜박 잠이 든 그는 결국 늦잠을 자고 말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 주임에게 화를 내던 강 부장. 이번에는 넌지시 유부단 대리를 부른다.
“자네, 영문과 나왔지? 그럼 이 정도 번역은 바로 하겠네?”
“해외 보고서라도 보셔야 하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 딸 영어 숙제라는데, 아빠 체면에 모른다고 할 수도 없어서 말이야. 허허.”
“!!”
거절할 수도 없는 숙제를 받아들고 돌아서는 유 대리와 체념한 얼굴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일 주임.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니 이제는 당혹스럽거나 화가 나지도 않는다.
다시 고요해진 사무실. 오늘따라 나만희 과장은 전화기를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유치원 다니는 딸아이의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회사 일이 바쁜 자신을 대신해 친정 어머니에게 참석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연락이 되지 않아 애태우고 있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기본 차장은 조퇴하고 아이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지만 괜찮다면서 거절한 나 과장. 그렇지만 아이가 눈에 밟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나 과장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강 부장.
“어이∼ 나 과장! 회사까지 와서 집안일 때문에 그러고 있으면 후배들이 대체 뭘 보고 배우겠어? 일을 하라고, 일을!”
“죄송합니다.”
“거참, 애 엄마면 집에서 애나 잘 볼 것이지. 얼마나 대단한 일 한다고 회사는 계속 다니면서 이리저리 폐만 끼치는 거야, 쯧쯧.”
이때 강 부장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작은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아∼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제수씨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요? 이를 어쩐다, 지금은 시간이 좀 이르긴 한데…. 아니,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모시러 나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짐이 많으시면 제 밑에 있는 친구 하나 데리고 나갈까요? 아, 그건 괜찮으시다구요?”
전화를 끊고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기던 강 부장이 멋쩍은 얼굴로 직원들에게 이야기한다.
“흠흠. 나는 지금 나갔다가 거래처 미팅하고 바로 퇴근할 테니, 여러분도 시간 맞춰 퇴근들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