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존재와 무> 혹은 자유와 사랑

62호 (2010년 8월 Issue 1)

 
내가 어떤 타자를 사랑하는데 그 타자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비극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비극일까? 다른 방식으로 물어보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도 반드시 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이것은 행복한 사랑일까? 분명 어떤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진정 행복한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이런 사랑만 존재한다면 사랑이 가지는 불확실성, 설렘, 두근거림과 같은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나의 사랑이 타자의 사랑을 강제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타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랑의 비극이 우리에게 자유의 문제에 대해 숙고하도록 만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그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대상은 아름답게 장식된 의자나 성능 좋은 컴퓨터가 아니다. 바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태어난 어떤 한 사람의 타자다. 아름다운 의자는 내가 창문 쪽에 갖다 놓으면 어떤 저항도 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게 된다. 내가 컴퓨터를 켜서 어느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명령대로 실행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좋아하는 타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내가 만나달라고 애원해도 그 혹은 그녀는 나를 만나주지 않을 수도 있고, 이 옷을 입으면 예쁘겠다고 제안해도 그 혹은 그녀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자나 컴퓨터와는 달리 도대체 성가시기까지 한 존재가 바로 타자다. 이것은 타자가 바로 자신만의 자유, 혹은 그만의 타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라면 컴퓨터나 의자와 같은 것을 ‘존재’, 인간을 ‘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의 주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 따르면 ‘존재’는 컴퓨터나 의자처럼 스스로 행위를 결정하지 못하는 부자유스러운 것들을 가리킨다. ‘무(le Néant)’는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Nothingness)’는 것과,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외적으로 규정되거나 결정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무’, 즉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인간에게 ‘무’의 측면, 즉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자유의 역량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반성하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반성의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사르트르가 인간을 ‘대자(對自, pour-soi)’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물과는 달리 ‘자신(, soi)’에 ‘대해서(, pour)’ 존재할 수 있는 존재다.
 
사랑과 관련한 그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져야만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자기를 선택한 것이 ‘다른 애인들 중에서’라고 생각하는 경우,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화가 나고, 자기가 값싸진 것으로 느낀다. “그렇다면 만일 내가 이 도시에 오지 않았다면, 만일 내가 누군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다면, 너는 나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이런 생각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슬프게 한다.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사실 사르트르의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다. 사랑에 빠진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타자가 자유롭게 나를 선택하는 상황이다. 물론 여기서 사르트르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를 달고 있다. 타자의 선택은 절대적인 선택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가 어떤 조건에 얽매여서가 아니라 어느 조건에 처하더라도 반드시 나를 선택하기를 원한다. “만나본 사람 중에 상대적으로 잘 생겨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상대방이 무심결에 던진 이런 말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충족시켜주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되레 우리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들이 우리를 그토록 화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에 대한 사랑을 철회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을 만나거나, 나보다 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상대방은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매우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조건이 달라졌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버려질 수도 있다면,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노이로제에 가까운 정신 상태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조건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기를, 다시 말해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기’를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불과하지 않을까? 상대방은 자신의 자유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상대방이 현재 나를 사랑하는 것도 그의 자유로부터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나를 버리는 것 역시 그의 자유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이 나를 절대적으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불가능한 소망 이면에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불길한 직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L’enfer, c’est les autres)”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돌아보면 타자란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멋진 지옥 아닌가? 한때는 즐겨 앉았던 의자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나는 법이다. 의자는 더 이상 우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의자는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반성할 수가 없고, 따라서 이런 불행한 상황을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반면 자유를 가진 타자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상대방의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는 언제든지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아직도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다시 그 혹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고뇌의 나날을 반복할 것이다.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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