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퇴임하는 지방자치단체장 중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알리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가나 무리하게 추진할 일은 아니다. 송덕비는 옛날 목민관들이 자신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백성들의 이름으로 세워놓은 기념물이다. 그러나 이 중에는 억지로 세운 것도 많다하니, 일부는 송덕비가 아니라 악덕비인 셈이다. 비석만 보고 옥석을 가릴 일은 아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을 봐도 이름 석 자를 어딘가에 남기고자 하는 욕망은 무척 오래된 인류의 습속인 듯하다. 명산대천(名山大川)에 빨간 색까지 넣어가며 자신의 이름을 돌에 새기는 것은 명욕(名慾)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옹색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것을.영원할 것만 같던 돌도 시간이 흐르면 마모돼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뜻있는 조상들은 자신의 이름을 돌에다 새기는 대신 사람들의 입에다 새기는 구승비(口勝碑)를 소중히 여겼다. 돌이나 쇠에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새기기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름과 업적이 오르내리는 것이 더 영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명심보감(明心寶鑑)> 격양시(擊壤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평생(平生)에 부작추미사(不作皺眉事)하라! 평생에 남의 눈 찡그릴 만한 일 하지 말고 살아라! 세상(世上)에 응무절치인(應無切齒人)이라! 세상에는 나를 향해 이(齒)를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명(大名)을 기유전완석(豈有鐫頑石)이런가? 당신의 이름을 어찌 그 큰 돌에 크게 새기려 하는가? 노상행인(路上行人)이 구승비(口勝碑)니라. 길 가는 행인의 입에 당신 이름을 새기는 것이 돌에다 새기는 것보다 훨씬 오래갈 것이다.’
구승비(口勝碑), 즉 사람의 입(口)이 돌(碑)보다 더 낫다(勝)는 뜻이다. 이 구절은 <서재야화(書齋夜話)>에도 비슷하게 나오는 구절로 결국 사람들의 입에 칭찬과 존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돌에다 새겨 넣은 명성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명예는 다른 어떤 것보다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다. 내 이름을 누군가 불러주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남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자주 불러주면 행복해지고, 거꾸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리하게 돌에다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어떤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며 묵묵히 길을 가는 군자의 모습은 아름답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흥분하지 않으며, 남들이 나를 비난한다고 해서 우울해 하지도 않는 그런 인생철학 말이다. 정신적인 우울과 황폐함으로 고통 받는 요즘의 시대, 다른 어떤 처방보다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낄 줄 아는 든든한 자아가 시급하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마라(不患莫己知)! 내가 알아줄 만한 사람이 되기를 먼저 구하라(求爲可知也)!’ 송덕비를 세우기보다 송덕비를 세울 만한 사람이 먼저 되라는 <논어(論語)>의 충고다. 이름을 남기고 가는 것보다 내 주변 사람의 가슴 속에 좋은 사람으로 오랫동안 기억되는 삶이 진정 위대한 인생이다. 구승비(口勝碑), 사람의 마음에 새기는 영원불멸의 기념비다.
필자는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교환교수, 성균관대 유학대학원 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 <경영전쟁 시대 손자와 만나다> <손자병법으로 돌파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