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으면, 학습도 없다

43호 (2009년 10월 Issue 2)

중견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김 사장은 지난해부터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다. 그는 건설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으로, 석유 파동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의 규모를 키워왔다. 그러다 2004년 주택 경기 침체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파트 분양이 미달되면서 자금난을 겪은 것이다. 다행히 제조업 투자가 활성화되고 오피스 빌딩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겨우 위기를 넘겼다. 그때 김 사장은 아파트 분양에 다시는 손을 대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후 경기가 좋아지고 집값이 치솟았다. 다른 건설사들이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해 아파트를 광고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다시 아파트 분양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경기 호황이 2007년 여름을 절정으로 내리막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2008년 내내 본사 사옥, 골프장 대지 등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았다. 김 사장은 2008년 11월 S건설이 부도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 밤 잠을 자다가 갑자기 밤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떨려왔다. 손발이 저리고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심장이 멈춰서 죽을 것만 같았다. 겨우 가족들을 깨워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힌다는 그의 말에 놀란 의료진은 링거액을 놓고 심전도를 촬영했다.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자 김 사장은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의 회사는 1, 2차 구조조정 때 가까스로 B등급을 유지했다. 올해 상반기부터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아파트 분양 시장도 좋아져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피스 빌딩의 건축주가 얼마 전 잠적해버렸다.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은행들로부터 회사의 재정 상태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러던 중 같은 B등급에 속해 있던 H건설의 부도 소식을 접하고는 그의 가슴이 탁 막혀왔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이켜봤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은행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혹시라도 건축주 중 한두 군데라도 건축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이제는 가족들에게 돈을 꿔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할 형편이다.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채무를 떠올리자 온몸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차라리 부도를 내버리면 속 시원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날 밤잠을 자는데 또다시 가슴이 아파오더니 숨이 막히고 손발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또 응급실에 실려 갔지만 이번에도 검사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의사는 정신과 질환인 공황장애인 것 같다며 심장의 이상은 아니니 집으로 가라고 했다. 하지만 김 사장은 너무 불안해 도저히 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자 의사는 정신과 개방병동에 입원하라고 권했다. 정신과 입원이라고 하니 불쾌하긴 했지만 집으로 갈 순 없어 결국 입원을 했다. 병원에서 준 진정제를 먹었지만 회사, 가족,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걱정돼 견딜 수 없었다. 병실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통이 클수록 학습 효과 커
위험을 피하는 인간의 능력은 본능과 학습의 결과다. 뱀을 보고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능은 인간이 공룡과 같은 파충류의 먹잇감이었던 시절을 통해 얻은 것이다. 뜨거운 것과 날카로운 것을 피하는 위험 회피 능력은 끝없는 학습의 결과다. 아기는 어머니로부터 수없이 “안 돼” “위험해” “피해”라는 말을 듣고, 때로는 실수로 고통을 당하면서 스스로 무엇이 위험한지 학습하게 된다. 이러한 본능과 학습이 합쳐져 위험이 닥칠 때 우리는 순식간에 판단한다. 이러한 직관 덕분에 인간은 수없이 많은 위험이 있는 도시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경제적·사회적 위험에 대해서는 인간의 뇌에 본능으로 저장돼 있는 게 없다. 아이에게 “장기 호황 끝에는 꼭 불황이 오니 남들이 투자하는 대로만 따라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는 없다. 설령 가르친다 해도 아이가 이해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위험이 개인에게 지니는 의미를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배우는 때는 20∼30대부터다. 즉 취직해서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자신의 자산이나 회사의 자산을 관리하면서부터다. 따라서 경제적·사회적 위험을 피하는 것은 성인이 되고 나서 경험을 통해 익힐 수밖에 없다. 고통이 없으면 학습도 없다. 지금 고통이 심하더라도 현재의 위기를 넘긴다면 그 학습 효과는 크고, 다음에는 위험을 피할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는 점을 명심하라.
 
끝없는 고통은 없다
힘든 상황에 놓이면 마치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든다. 고통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하지만 끝없는 고통이란 없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상황에는 끝이 있다. 설혹 고통이 계속되더라도 그에 대해 인간은 둔감해진다. 어린 시절 예방 접종을 할 때 주사를 맞기 바로 직전이 가장 두렵지 않았는가. 물론 막상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힘든 세월이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끝이 난 후에도 삶은 이어진다. 그 삶은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지만, 지금의 예상과는 반대로 다른 형태의 기쁨을 안겨줄 수도 있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끝없는 고통이란 없으며,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끝 이후에도 삶은 지속된다.
고통을 통해 성장함을 믿어라
인간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제목을 통해 기업가가 사업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 중 하나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없어서, 기회를 얻지 못해서,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서 성공을 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신이 능력이 없는데 누가 큰 돈을 맡기고, 큰 기업을 맡기고, 함께 큰일을 도모하겠는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때는 이력서에 드러나지 않는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어느 정도까지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지 경력을 통해 판단한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하고, 골프를 치고, 여행을 하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자신의 삶에서 벌어졌다 생각하고 오직 고통을 피하려고만 든다면 성장은 없다. 하지만 고통을 통해 자신이 보다 큰일을 감당할 됨됨이를 키워 성장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고통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당신이 보다 큰 됨됨이의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과거의 불행에 집착하는 사람은 행운의 배달부가 옆을 스쳐갈 때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친다. 반면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저 멀리서 행운의 배달부가 다가설 때 이쪽에서 먼저 뛰어가 조금이라도 일찍 행운을 차지할 수 있다.
 
필자는 중앙대 의대를 졸업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았으며, HSM(Health Sector Management)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부여다사랑병원 원장과 경희대 경영대학원 의료경영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 <심리학 테라피>가 있다.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기업을 운영하거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계신 독자 분들에게 상담을 해드립니다. 최명기 원장에게 e메일을 보내주신 분들의 사례 중 적절한 것을 골라 이 연재 코너에서 조언을 해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소속과 이름은 익명으로 다룹니다. 이번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가상의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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