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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품격

에피쿠로스는 과연 방탕자였을까

김헌 | 380호 (2023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흥청망청 유흥과 향락에 빠져드는 무절제한 생활을 조장한다는 오해가 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쾌락보다 마음의 쾌락을 중시했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만들어 제자, 동료들과 철학을 실천하는 삶의 즐거움을 추구했던 그를 방탕자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인생을 즐겨라, 그것이 행복이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 많이 들어 봤을 것이다. 특히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제목의 영화에서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불리면서 존경받던 키딩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의 역사가 담긴 사진들, 특히 오래전 선배들의 사진을 보면서 했던 말이다. 1989년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그 장면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있다. ‘오늘을 즐겨라,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없으니’ 대략 이런 뜻으로 통한다. 대학 시절에 친구들, 선후배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래 부르면서 외쳤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 라틴어 ‘카르페(Carpe)’는 원래 ‘꽃이나 과일을 따다’이고 ‘디엠(Diem)’은 ‘하루, 날’이라는 뜻이다. 카르페라는 동사는 소나 염소, 양이 풀을 뜯어 먹을 때, 벌이 꽃에 앉아 꿀을 빨아 먹을 때 쓰기도 한다. 거기에서 ‘즐기다, 만끽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예컨대, ‘Carpet nunc molles somnos’라고 하면 ‘그는 지금 단잠을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카르페 디엠이라고 하면 마치 농부가 잘 익은 과일을 따듯, 소가 평원에서 풀을 뜯어 먹듯, 벌꿀이 꽃에 앉아 꿀을 빨 듯이 오늘,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즐기라는 뜻이 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카르페 디엠’이 들어 있는 시의 전문을 감상해 보자.


그대 묻지 마라, 아는 것이 불경이니

나에게 그대에게 신들이 어떤 종말 주게 될는지,

레우코노에, 바빌론의 점성술에 기대지 마라.

뭐든 견디는 것 얼마나 더 좋은가?

더 많은 겨울을 윱피테르가 허락하든,

아니면 지금 튀레눔 바다를 맞선 바위로

힘을 빼는 이 겨울이 끝이든,

현명함을, 술을 흐르게 하라.

짧은 인생에서 긴 희망은 잘라버려라.

말하는 사이에도 달아난다,

샘 많은 세월은.

오늘을 즐겨라,

내일은 가능한 한 조금만 믿고.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 쾌락주의 철학에서 ‘즐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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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쾌락주의에 대한 오해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게 따져보지 않는다면 쾌락주의를 흥청망청 유흥과 향락에 빠져드는 무절제한 모습으로 생각하기 쉽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런 그의 사상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부터 있었다. 특히 이성을 따라 자연에 순응하고, 금욕적인 절제를 통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던 당시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그의 쾌락주의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조롱했다.

물론, 괜히 그런 편견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를 그렇게 비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이런 속담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나는 에피쿠로스학파이다’라고 자칭하거나 그 사상을 따라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방탕해 보였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오죽하면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자신의 육체적 욕망과 이기적 탐욕에 젖어 악에 굴복하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에피쿠로스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까지 했다.

그러면 에피쿠로스는 잘못된 쾌락주의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악용당한 것일까? 혹시 그 자신이 그런 빌미를 준 것은 없을까? 그런데 남아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에피쿠로스가 빌미를 제공한 점도 있는 것 같다. 그가 했다고 하는 말 가운데는 이런 말이 있다. “미각적인 쾌락을 떼내고, 성적 쾌락과 청각적 쾌락과 형태들에 대한 시각적 쾌락을 제거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우리에게 좋은 것은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무엇을 좋은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이 말만 놓고 본다면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쾌락을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감각적 쾌락을 폄하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무절제하게 탐닉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에피쿠로스가 감각적인 쾌락이 우리 사람들에게 나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좋은 것이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데 기여도가 높은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무분별하게 빠져드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훨씬 더 긍정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장이 감각적인 쾌락을 무작정 무시하지 말고 긍정하되 적절하고 적법하게 즐기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면 정말 자연적인 본성에 잘 맞는 건전한 사상과 생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에피쿠로스가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때 그의 제자였던 티모크라테스가 그를 아주 부정적인 의미의 쾌락주의자인 것처럼 말한 적이 있다. 에피쿠로스가 식탐을 주체하지 못해서 하루에 두 번 토했다는 둥, 매일 식탁을 차리는 데 1므나(100드라크마)를 썼다는 둥(이는 당시 노동자 100일 치 임금인 대략 1000만 원 정도(!)에 해당하는 엄청난 돈이었으니,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낭비의 끝판왕일 것이다) 관계를 가진 기녀들의 이름만도 무려 다섯 명이나 된다는 둥, 무분별한 생활로 인해 여러 해 동안 가마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망가진 상태였다는 둥, 이런 식의 말만 들으면 에피쿠로스가 쾌락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리석고 타락한 향락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악의적인 비방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면 에피쿠로스의 말도 들어 볼까? 그는 종종 ‘나는 물과 소박한 빵 하나면 충분하다’ ‘치즈가 든 작은 단지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원할 때 진수성찬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검소한 식생활을 통해 미각의 즐거움을 긍정한 철학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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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정원

에피쿠로스는 주변에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있었고,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처럼 치명적인 매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소아시아, 지금의 튀르키예 서쪽에 있는 뮈틸레네와 람프사코스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기원전 306년, 아테네로 돌아와 ‘케포스’, 즉 정원을 조성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정원을 구입하는 데 약 80므나(8000드라크마), 즉 노동자의 대략 20년 임금에 해당하는 돈(대략 8억 원 정도로 추정)을 썼다고 한다. 이를 흔히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고 하는데 프랑스의 노벨상 수상 작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자신의 명상록에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곳에서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삶의 방식에 따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친구들을 모아 학교를 운영했다.

정원이 학교라니, 학교 다닐 맛이 났을 것 같다. 그곳에서 함께 생활했다면 기숙 학교 기분도 난다. 그런데 학교라고 표현은 했지만 좀 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곳에 모여서 자신들의 삶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아 나가면서 그것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고 다시 그 실천을 반성하면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를 원했다. 그런 삶의 방식을 서양 고대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을 실천하며 숙고하며 사는 삶, 그것이 ‘에피쿠로스의 정원’이 지향하던 것이었다. 그 정원은 당시 아테네에 가장 유명했던 학교인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제논의 스토아학파 학교의 중간쯤 되는 곳에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종류의 쾌락

그런데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부정적인 편견을 가졌던 사람들은 ‘에피쿠로스의 정원’도 유흥가나 퇴폐적인 장소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를 공격하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달리 아테네 시민의 많은 수가 그를 존경했고, 나중에는 그의 동상까지 세워줬으며, 그의 생애를 기렸다. 그가 죽은 후에도 학교는 계속 유지됐고, 많은 학자와 지성인, 인재들을 길러냈다. 사적으로 에피쿠로스는 부모에게 효자였고, 형제들에 대한 우애가 깊었으며, 심지어 노예나 하인들에게도 친절했다는 미담도 전해진다. 공적으로는 에피쿠로스가 보여준 신들에 대한 종교적인 경건함, 애국심도 칭찬과 존중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건전하고 품격 있는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주의자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런 이름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그것은 대체로 오해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에 대해 오해하고 편견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추구하던 쾌락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배고파 죽겠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면 아주 강한 쾌락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허기를 채우고 배부르고 난 뒤에, 편안한 상태에서 우리는 또 다른 쾌락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되고 사치스러운 것일까? 그리고 이 두 가지 쾌락 중에 어떤 쾌락이 더 강하고 클까?

다른 예도 살펴보자.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너무 아팠다가 치료를 받은 뒤 아픈 배가 서서히 가라앉을 때도, 발가락에 가시가 박혀 따갑고 걷지도 못하다가 다른 사람이 그 가시를 빼주었을 때도, 앓던 이가 빠졌을 때도, 느끼는 쾌락이 있다. 반면 음식을 조심해서 먹어서 전혀 배가 고프지 않고 아프지도 않은 상태, 가시도 안 박히고 치아 관리도 잘해서 아예 아프지 않은 건강한 상태일 때 느끼는 편안함이 있는데 이것도 쾌락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다 쾌락일 수 있으며 둘 다 모종의 고통에서 벗어나 고통이 없는 상태, 즉 아포니아(aponia)이다. 그런데 이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둘 중에서 어떤 쾌락이 좋게 보이나?

에피쿠로스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운동 과정에서 느끼는 극적인 쾌락(운동적 쾌락)보다는 아예 고통 상태에 들어가지 않고 처음부터 항상 편안하고 진정된 상태에 머물면서 느끼는 쾌락(정지적 쾌락)을 더 좋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 쾌락이나 편안함에서 오는 쾌락보다도 마음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즉 마음의 쾌락을 육체적 쾌락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겼다. 그런 상태, 즉 ‘흐트러짐이 없는, 요동치지 않는 평정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이런 상태에서 느끼는 쾌락이 지고의 고품격 쾌락이고,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생각한 그에게 도대체 어떤 비난을 던질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쾌락을 존중하되 그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았고, 절제를 동반한 쾌락을 통해 평온을 누리려고 했으니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닐까?


죽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즐겁게 살아라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구 ‘카르페 디엠’은 ‘하루하루를 즐겨라, 인생을 즐겨라’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대표하는 표어처럼 사용된다. 그리고 이 구절과 함께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향락과 방탕한 생활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런 오해와 잘 통하는 성경 구절도 있다. 예언자들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이사야의 글이다. 그는 정신 못 차리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쳤다. “당신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구나!”(이사야서 22:13) 이 성경 구절은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문구로 자주 사용됐다.

사실 죽음을 생각하면 인생이 허무하긴 하다. 그래서 하루하루 즐겁게 살자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생 뭐 있나, 먹고 마시고 놀자’라는 말도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 허무하다고 생각해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 에피쿠로스학파의 말 그대로 ‘쾌락주의’가 귀에 솔깃한 건 사실이다. ‘죽음으로 끝나버릴 인생의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인간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인데 그래서 ‘죽기 전에, 살아 있는 동안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라는 의미의 에피쿠로스 철학이 지금도 살아 있는 것 같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과 함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죽음을 기억하라!’ 이 말은 ‘인생을 즐기라’는 카르페 디엠과 잘 어울린다. 앞서 인용한 성경 구절과도 잘 어울린다. 실제로 에피쿠로스학파를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을 인생의 모토처럼 사용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메멘토 모리는 정확하게 새겨보면 ‘당신은 지금 죽어가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예언의 뜻을 품고 있다. 사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제국에서는 이 말을 개선장군들에게 했다. 개선장군들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시민들은 환호하면서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했고, 그의 업적과 무공을 기렸다. 할 수 있는 한 아낌없이 개선장군에게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한 번의 승리에 취해서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언제나 그렇게 승승장구할 것처럼 오만하게 행동하다가 실수하고 실패하지 말라는 경고를 덧붙였다. 개선장군 뒤에 노예를 세워두고, 개선장군을 향해서 메멘토 모리를 외쳤다.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승리의 기쁨과 영광도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당신은 점점 쇠약해지고, 끝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이었다. 사람들은 ‘당신의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이 인간임을 기억하라(Respice post te! Hominem te esse memento!)’라고 외치기도 했다.

매우 의미 있는 관행이다. 그런데 그런 뜻으로 했던 메멘토 모리는 카르페 디엠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흥청망청 놀고먹고 마시고 세월을 허송하기보다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라면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은, 단지 인생을 즐기라는 향락적 의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소중하게 가꾼 열매를 따듯이 알차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꿀벌이 꽃송이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하듯이 삶을 소중하게 가꾸어 나가라는 뜻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쾌락이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진정한 쾌락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루를 즐긴다’라는 것은 결국 ‘하루를 의미 있게 산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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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즐겁게 살아라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허무하기도 하고 두렵지 않은가? 그래서 죽는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사실 메멘토 모리는 에피쿠로스가 했던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죽음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면 죽음은 살아 있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죽음이 우리와 상관이 없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모든 사람이 결국 죽는데 어떻게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의 논리는 아주 명쾌하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에게는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겠구나’라고 상상하지만 정작 그것은 상상일 뿐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한번 따져볼까? 언젠가는 나에게 찾아올 죽음이지만 죽기 직전까지 나에게는 생명이,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나에게는 죽음이란 결코 없다. 반면 삶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 나는 사라진다. 내가 죽어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나의 죽음을 느낄 주체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살아 있든, 죽게 되든 나에게는 결코 죽음은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나에게 죽음이 없고, 죽으면 죽음을 의식할 수 있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경우에도 죽음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상관없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주장이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 같은데 궤변 같기도 하다.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자체 때문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상태에서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인생을 하루하루 즐겁고 알차게, 진정한 쾌락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은 삶을 매우 사랑할 것이다. 그래서 더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고, 삶의 즐거움을 더 많이, 계속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죽음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와 나의 삶을 없애버린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음으로 없어질 삶, 삶의 기쁨일 테니까. 게다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즉 죽음이 나의 삶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내가 겪어야 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아닐까?


죽음이 없는 존재로, 원자론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진정한 죽음은 없다는 존재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다. 이 세상에는 오직 물질만이 존재하고, 그 존재의 근원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가 있다고 했다. 원자를 ‘Atomos’라고 불렀다. ‘A’는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는 뜻이고, ‘Tomos’는 ‘쪼개다’ ‘자른다’는 뜻이다. 그래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존재의 원형을 Atomos라고 불렀다. 나중에 서양인들은 이를 ‘아톰(Atom)’이라고 했고, 우리는 그것을 ‘원자(原子)’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론을 원자론(Atomism)이라고 한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중에 ‘우주 소년 아톰’이 있는데 그 아톰이 바로 그리스 철학의 원자론에서 온 이름이다. 원조는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였고, 에피쿠로스는 그가 사용한 개념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들에 따르면 원자는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변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언제부터인가, 어떤 이유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로 붙어 뭉쳐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원자들이 이합집산에 따라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바로 그런 원자들의 결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이란 우리를 이루는 원자들이 결합한 상태에서 느슨해지고 흩어지는 것일 뿐 우리를 이루는 원자 자체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죽음도 역시 우리를 이루고 결합하던 원자들이 느슨해지고 흩어지는 것뿐이지 원자의 소멸은 아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파멸로서의 죽음, 진정한 의미의 죽음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은 그 사람으로서는 사라지겠지만 그 사람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원자는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결합으로 다른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그 무엇의 구성 요소들이 돼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날 테니까. 죽음은 새로운 존재로 가는 과정이고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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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목욕물에 독주 한 잔,
에피쿠로스의 죽음

에피쿠로스의 말년은 병으로 인해 고통이 심했다고 한다. 요도에 돌이 박혀서 방광결석(또는 요로폐색)을 앓았다. 죽기 직전 14일 동안엔 특히 극도의 고통으로 시달렸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그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들어가서 희석하지 않은 독한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는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을 지켜보던 헤르미포스가 그의 최후를 시로 남겼다. “‘안녕, 가르침을 기억하시게.’ 에피쿠로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네. 따뜻한 물 가득한 욕조에 들어가 물 섞지 않은 독한 포도주 들이켰다네. 그리고 차디찬 하데스를 연이어 들이켰다네.”

당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다는 것은 대단한 사치였다. 독한 포도주를 희석하지 않고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에피쿠로스를 사치스러운 쾌락주의자였다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자살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병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지자, 따뜻한 물에 몸을 덥힌 후 독주를 마셔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비난받을 행동일까? 삶을 사랑하고 쾌락을 지향했던 철학자가 지독한 고통을 단축시키려 했고, 고통을 느끼는 자신을 없애는 방식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을 사치를 부렸다고 비난받을 일인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상에 충실했던 것은 아닐까?

죽기 전에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연구하는 삶이 가장 안전할 수 있도록 에피쿠로스의 정원을 관리하고, 제자들이 어려움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누렸던 가장 큰 즐거움, 즉 철학의 즐거움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대로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재촉했던, 평생 즐겁기를, 행복하기를 바랐던 철학자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 김헌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필자는 서울대 불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및 서양고전학 석사, 서양고전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서양고전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 『천년의 수업』이 있으며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 교수로 일하고 있다.
    kimcho@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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