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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엽편 소설: 우리가 만날 세계

연봉 협상, 만족하시나요?

이경 | 359호 (2022년 12월 Issu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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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안 씨, 들어오세요.”

면담실 입구에서 명랑한 ‘실비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안은 대기실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출전이 임박한 복서처럼 어깨를 크게 돌려 풀었다.

‘좋아, 할 수 있어! 지안아! 할 수 있어! 된다! 된다! 아자!’

입속으로 소리 없는 응원을 중얼거리며 결연한 자세로 입실한 지안은 면담실 중앙의 하얀 테이블까지 똑바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눈에 힘을 주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입꼬리를 당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그건 지안이 이 ‘결투’에 임하는 결의의 표현이었다.

‘지지 않아!’

“안녕, 실비안.”

지안은 또렷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3D 홀로그램으로 투사된 실비안은 마치 맞은편에 실제로 앉아 있는 것처럼 두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이다. 숏커트한 검은 머리, 검은 눈, 광대가 도드라진 약간 둥근 얼굴형, 보통 체격. 지안은 고등학교 동창 중 실비안을 닮은 친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다른 사원들도 제가 아는 사람 중 실비안과 닮은 이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실비안의 인상은 극히 평범했다. 자세히 보아야 세련되게 머리를 빗어넘긴 방식이나 품이 큰 하얀 셔츠를 자연스럽게 걸친 모습에서 비주얼 디자이너의 취향이 언뜻 엿보이는 수준이다.

“준비되셨나요?”

실비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선을 잡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다.

“전년도 대비 물가 상승률이 8.6%나 돼. 40년 만의 최고 상승률이라더라.”

“지안 씨 말이 맞아요. 정확히는 물가 상승률이 13.7%였던 41년 전 이후 최고치죠. 그때와 달리 이번 물가 상승률은 러시아 전쟁의 여파가 한국을 덮쳤기 때문이지만요.”

“나는 올해 팀 인사고과도 좋고, 개인 인사고과도 좋았어. 동료 평가도 괜찮았고. 팀장님도 내년 연봉은 최소 12% 인상될 것으로 보셨어.”

“그렇군요. 그간의 좋은사람그룹 평균 연봉 인상률에 비쳐 보아 지안 씨 연차만 놓고 보더라도 10% 인상을 기대하는 건 합리적으로 보여요.”

지안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말 연봉 협상 안건을 들고 직접 들이대야 했던 팀장님과 비교해 보면 본사 인적자원부 소속 인공지능(AI) 실비안은 확실히 대화하기 편한 존재였다. 매일 부대껴야 하는 사이라 당연한 요구인데도 눈치를 봐야 할 필요도 없고, 또 권위에 눌려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킬 필요도 없다. 사람 상대로는 말을 고르고 골라 하더라도 서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 빚어지기 마련인데 실비안에게 말할 때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본사는 실비안과 대화할 때 편하게 반말하기를 권장하기도 했다. 그래야 편안한 상황에서 심금을 터놓고 여러 사안을 명료히 전달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어떤 사원들은 실비안이 그래서 스파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사람들을 방심시켜 실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면담 내용을 전부 인사 기록 ‘인성’ 난에 남긴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지안은 실비안을 둘러싼 소문을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실비안과 대화할 때는 조심했다. 사소한 건의사항을 전달할 때가 아닌 연봉 협상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더더욱.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조건을 던져보거나 떠보는 것은 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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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는 지안도 대담하게 나가보기로 했다. 올해 실적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격려금을 제외하고 18% 인상이 적절하다고 봐. 연차도 쌓였고, 올해 프로젝트 성과도 정말 좋았어. 보고회에서 우수 평가를 받아 내년에 확대하기로 했고. 연봉 초과 인상을 기대해도 되는 부분이지. 게다가 물가 상승률이 8.6%나 되잖아. 물가 상승률 반영 없이 10%만 인상되면 실질적으로는 연봉이 줄어드는 셈이나 다름없어. 책임은 늘어만 가는데 실질 임금이 제자리걸음이면 의욕도 떨어지기 마련이야. 내가 회사에 기여한 바가 연봉에 적절히 반영되길 바라는 마음이 허욕은 아니라고 생각해.”

지안은 또박또박 준비한 논리를 펼쳤다. 친한 파트원 두 명 앞에서 리허설까지 마친 내용이었다. 이 얘기는 여기 넣자, 이 얘기는 그냥 빼자, 15로 할까? 20 지를까? 아니야, 20은 좀 과해 보이지? 뭐? 10? 제정신이야? 하고 머리를 맞대고 세 명 분의 전략을 짜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실비안은 지안의 말을 경청했다. 진지하고 평온한 그의 얼굴에서 수긍이나 반발을 읽어내기 어려웠으므로 지안은 속으로만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네 한 마디에 내 내년의 행복이 결정된다고!

그리고 영원 같은 몇 초가 지난 후, 실비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안 씨, 제 생각은 이래요.”

지안의 고등학교 동창을 닮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어, 지안이 왔다!”

회사 근처 카페에 들어서자 이현과 호준이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지안은 샷을 두 번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터덜터덜 걸어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너도 망했네. 그치?”

눈치 빠른 이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몸을 뒤로 젖히고 빨대를 쪼옥 빨았다. 호준도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앞에는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와… 어떻게 셋이 다 망하냐.”

지안은 피곤한 눈을 문질렀다.

“됐다, 됐어. 우리가 슈퍼컴퓨터를 어떻게 이겨.”

“아니, 근데!”

새삼 울화통이 터진 듯 이현이 커피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테이블이 다섯뿐인 작은 가게라 사람들이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야, 야, 조용히 말해. 여기도 회사 사람들 있으면 어떡하려고.”

“우리 솔직해지자. 그 실비안 알고리즘, 진짜 공정한 걸까?”

“무슨 뜻이야?”

지안의 심드렁한 대꾸에 이현은 주위를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니, 실비안은 어쨌든 회사가 만든 인공지능이잖아. 우리 논리로는 회사 논리를 논파하지 못하게 걔가 도와주는 것뿐인 거 아니냐고.”

“올해 연봉 제대로 인상됐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팀장도 안 됐대. 내가 우연히 복도에서 팀장끼리 말하는 거 들었거든. 거기서도 잘됐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호준도 분위기를 맞춰 속닥거렸다. 지안은 마침 서빙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킨 다음, 진지한 눈빛의 이현과 호준을 한심하게 둘러봤다.

“호준 씨, 바보야?”

“어?”

“이 상황에 잘됐으면 됐다고 곧이곧대로 말을 하겠냐고.”

셋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한 호준이 다시 반론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현 대리 말도 맞아. 다른 건 몰라도 연봉 협상 알고리즘은 진짜 공정한 건지 모르겠어. 어쨌든 실비안은 따지자면 사측이고.”

“근데, 그 알고리즘 짤 때 엄청났잖아. 사측이랑 노조에서 선발한 프로그래머를 돌아가면서 수십 명씩 갈아 넣어서 짜고, 검수하고 짜고, 검수하고 짜고 검수하고… 실비안은 회사와 노동자 사이를 중재하는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한 창구다, 편견과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합리적 판단이 가능한 인공지능이다, 그렇게 선전했는데. 내 생각엔 그게 전부 다 쇼라면, 매년 허공에 천문학적 돈을 날려 보내는 쇼야. 실비안이 오고 첫해 연봉 협상은 다들 만족했잖아. 말만 협상이지 들어가서 올해는 이렇게 됐다, 통보 띡 받고 아, 넵, 이러고 뒤돌아 나오는 게 그동안의 연봉 협상이었는데. 그래도 실비안 오고 나선 나름 할 말은 다 했고, 납득 가는 설명도 들었고. 난 실비안이 낫다고 봐.”

분명히, 실비안과 하는 건 진짜 ‘협상’처럼 느껴진다. 나의 조건과 상대의 조건을 모두 테이블에 올려놓고 공평히, 실시간으로 뒤집어 보며 맞춰가는 과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지안도 속이 쓰려 견딜 수 없었다. 격려금을 포함한 연봉 인상률 9%라는 초라한 결과를 생각하면 이대로 나가 마라탕 한 사발을 들이켜고 눕고 싶었다. 현 국제 정세가 어쩌니부터 시작해 원자재 수급률과 지속가능한 발전으로의 이행, 친환경 정책 어쩌고를 돌아 작년 회사 글로벌 매출과 이익률 통계, 잉여금의 공격적 재투자와 어쩌고저쩌고. 실비안이 온화한 목소리로 차근차근 전개한 논리는 지안이 듣기에도 어디 하나 구멍이 없었다.

통계와 자료를 제시하며 전개한 논리도 그랬지만 지안의 이해와 동의를 얻기 위해 실비안이 취한 자세도 그랬다. 좋은사람그룹은 성장의 과실을 그 주역인 사원과 나누길 결코 주저하지 않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과실을 나눌 때가 아니다. 사업의 운명이 걸린 위기의 시대다. …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말들인데 뻔한 이야기를 그렇게 진실된 자세로 하니 지안도 홀린 듯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실비안이 펼치는 논리가 정말 합리적이고 중립적인지 아니면 편향적인지, 실비안의 온화한 태도가 정말 우리를 존중하고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분열과 분란을 예방하기 위해서인지는 실비안을 좋아하는 편인 지안조차도 단언할 수 없었다.

실비안은 우리 편일까? 회사 편일까? 아니면 정말 우리 편도 회사 편도 아닌 공정하고 합리적인 중재자일까? 우린 실비안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라야 할까? 실비안은 사원은 물론 이사진과 사장, 회장의 연봉까지도 전부 결정하는 인공지능이다. 관리급까지 그룹 소속 사원 전부가 동참하기 때문에 실비안에 대한 신뢰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실비안은 직급의 고하를 막론한 모두에게 평등하고 공정한 논리를 적용하고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음모론적 의심이 번져갔지만 결국 셋은 포기하고 남은 커피를 홀짝였다. 어쨌든 내년 연봉 인상률은 결정됐고, 적어도 나만 물먹진 않았다는 안도감이 내려앉는 것도 사실이었다. 구석진 카페에 대리급 셋이 모여 앉아 의논한다고 실비안의 정체를 간파할 능력이 뿅 생길 것도 아니고. 애초에 셋은 실비안처럼 강인공지능1 에 준하는 존재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도 잘 모른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다른 평범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아~ 이제 무슨 낙으로 회사 다니냐아~.”

지안은 등받이 뒤로 몸을 젖히고 기지개를 쭉 켰다. 짧은 점심시간도 끝나가고 있었다.


이경 소설가 plumkyung22@gmail.com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2022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가작을 수상했다.
  • 이경 | 소설가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하고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소설 ‘한밤중 거실 한복판에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나타난 건에 대하여’로 2022 문윤성SF문학상 중단편가작을 수상했다.
    plumkyung2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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