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해석되고 있는 카르마는 개인적인 차원의 논의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카르마는 개인에게 국한해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카르마를 포르투나(Fortuna)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인도의 고유한 개념을 서구의 용어로 해석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만 그래도 가즈오식의 오류를 범하는 것(혹은 일본식으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보다 유사한 개념을 통해 해석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행운의 여신’으로 해석되는 ‘포르투나’는 ‘카르마’의 개인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方便)인 셈이다.
포르투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이미지는 이탈리아 중부의 산악도시 시에나 대성당의 바닥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다. 그 작품에서 포르투나는 돛을 들고 서 있다. 한쪽 발은 바다에 떠 있는 배(船) 위에 놓여 있고, 다른 한쪽 발은 육지의 땅을 딛고 있다. 육지에 올려져 있는 발아래에는 둥근 공이 놓여 있다. 둥근 공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 있는 포르투나. 들고 있는 돛에 부딪히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어디로 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거친 육지로도 날아갈 수 있고, 망망대해로 휩쓸려 갈 수도 있다. 넘어질 수도 있고, 바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의 포르투나(운명)은 예측 불가능하다.
포르투나를 설명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베네치아의 옛 세관 건물(Punta della Dogana) 위에 청동 조각으로 서 있는 포르투나 여신이다. 베네치아의 포르투나는 시에나의 포르투나처럼 돛을 들고 서 있지만 둥근 지구 위에서 한쪽 발을 들고 서 있다. 위태로워 보인다. 두 손으로 들고 있는 돛에 부딪히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청동상은 360도 회전하도록 설치돼 있다. 아드리아해의 거친 바람이 몰아치면 포르투나는 청동 조각의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삐걱거리면서 방향을 계속 바꾼다. 마치 우리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시에나와 베네치아의 포르투나는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다는 카르마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의 부친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대처승을 허용하는 태고종 스님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분의 부친은 지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창업했다. 그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재벌의 아들로 태어난 것은 그가 내린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그냥 재벌가였다. 그분은 그저 재벌가의 아들로 살아갈 카르마를 타고난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나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재벌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분 중에서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자제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 해답의 힌트를 얻게 된다.
‘무시무시한’ 카르마는 우리에게 그것이 모두 포르투나의 원인과 결과임을 보여준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바라는 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며,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카르마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몸을 떨게 된다. 카르마는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선물해 준 “꿈은 이루어진다”는 간절한 소망의 담론을 부정한다. 카르마는 히딩크 감독에게 말한다. 이뤄졌기 때문에 꿈이 됐을 뿐이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러한 카르마에 얽힌 우파니샤드 철학의 심오한 통찰력을 정견(正見)이라는 불교의 개념으로 풀어냈다는 것이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에서 산스크리트어 ‘Samyag-drsti’, 즉 ‘바르게 본다(正見)’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 다시 말하자면 카르마를 본다는 것이다. 연꽃이 필 때 열매가 함께 피는 것을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개의 길인 팔정도(八正道)에서 첫 번째 가야 할 길이 바로 보는 것, 즉 내게 주어진 카르마를 직시하는 것이다. 중국으로 건너갔던 대승불교에서는 정견을 좀 더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인도에서 추구되던 해탈의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카르마를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카르마 마르가(Karma-Marga)다. 마르가(Marga)는 ‘길’이란 뜻으로, 간혹 요가(Yoga)란 단어로 대체되기도 했다. 둘 다 ‘카르마의 실현을 통한 구원의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인도에서 카르마 마르가, 혹은 카르마 요가는 구원과 해탈의 첫 번째 방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카스트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인도 사회는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통치자, 군인), 바이샤(상인, 농부), 수드라(종)라는 네 개의 카스트로 구성돼 있다. 각 카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카스트가 요구하는 제사 의식과 생애 주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인도 철학에서 강조하는 것은 우선 자신의 카르마를 담담하게 직시하고 그 카르마가 정해진 운명을 순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본의 힘이 시장의 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우리들의 신분을 카스트제도로 환치하자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카르마’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선정(善政)을 통해 국민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하고, 경제인은 주주와 소비자, 그리고 근로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산업과 자본을 일으켜야 하며, 학자들은 학문의 도야를 통해 지적인 분야의 범위를 미래로 넓혀 가야 한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카르마이며, 소방관은 화재 진압을 위한 카르마를 수행하기 위해 현장에 투입되고, 언론인은 이해 계산이 충돌하는 현대 사회의 진정한 목탁이 돼야 할 카르마를 가진다. 재벌가의 자제는 재벌가 자제의 카르마를 지켜야 하며, 근로자는 근로자에게 맡겨진 카르마를 지켜야 한다.
카르마는 진흙에 뿌리를 내린 연꽃그렇다면 카르마는 우리를 숙명론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이미 각각의 카르마가 부여돼 있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면 우리의 운명은 신이 이미 정해 놓은 재미없는 삶의 연속이 아닐까? 카르마에 대한 직시는 역동적인 사회, 혹은 열린 사회(Open Society)의 활력을 방해하는 적(敵)이 아닌가? 『국가』란 책에서 통치자는 지혜를, 수호자는 용기를, 일반 시민은 절제를 덕목으로 삼으라던 플라톤의 주장은 철학자 카를 포퍼(Karl Popper)에 의해 이미 ‘열린 사회의 적(Open Society and Its Enemy)’으로 규정되지 않았던가?
여기서 우리는 카르마의 두 번째 속성을 보게 된다. 인도 철학에서 말하는 카르마는 절대로 기계적인 운명론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예정론(Predestination)도 아니다. 수드라(종)는 수드라라는 카르마를 타고났으니 죽을 때까지 수드라로 살란 말이 아니다. 꽃이 필 때 동시에 열매를 맺는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린다. 검고 거칠고 지저분한 진흙에 뿌리를 내리지만 연꽃은 연분홍의 순수한 색을 꽃피우며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카르마의 두 번째 속성이다. 진흙이라는 환경 속에서 황홀한 색을 만들어 내는 연꽃처럼 카르마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허용하고 있다. 벌은 꿀을 만든다. 벌이 꿀을 잘 만든다고 해서 우유를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다. 벌에게 주어진 카르마는 최고 품질의 꿀을 만드는 것이다. 소는 우유를 만든다. 소가 우유를 잘 만든다고 해서 꿀도 만들 수는 없다. 소에게 주어진 카르마는 최상의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태양은 빛을 비춘다. 태양이 찬란한 빛을 비춘다고 해도 달빛처럼 은은한 야밤의 풍경을 만들 수는 없다. 태양은 작열할 때, 태양이다. 그것이 바로 태양의 카르마다. 달은 은은히 비춘다. 작열하면 달은 달이 아니다. 그것이 달의 카르마다.
그렇다면 다르마란?불교를 통해 인도 철학을 건너짚어 이해하고 있는 우리는 다르마를 법(法)으로 번역해 왔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용례는 불법(佛法, Dharma of the Buddha)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법륜 스님이란 분도 유명한데 법륜은 ‘불법의 수레바퀴(Wheel of Dharma)’란 말의 줄임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법을 하셨을 때 ‘법륜’을 돌리셨다고 표현한다. 또 다른 중요한 용례는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 ‘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기도 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도 하는 복잡한 개념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도 철학에서 다르마는 최소한 20가지 이상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번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서도 다르마란 단어를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사용하겠다.
카르마가 개인의 포르투나에 대한 성찰과 가능성에 대한 염원이라면 다르마에 대한 논의는 공공성에서 시작된다. 미묘한 그 차이를 분석할 순 있겠지만 일단 카르마를 개인이 지닌 특징과 운명의 지향점(Destination for personality)으로 본다면 다르마는 개인이 수행해야 할 공공의 의무(Communal duties)와 탁월성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카르마가 개인을 주목한다면(personality) 다르마는 개인의 역할과 책임(role and responsibility)을 강조한다. 카르마가 개인의 본질에 대한 직시를 요구하고 개인의 의무에 대한 내면적 성찰을 강조하고 있다면 다르마는 공적인 존재가 지니는 사회적 책임과 탁월한 의무의 수행을 요구하고 있다.
다르마가 말하는 리더십특별히 인도 철학의 다르마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시키는 힘을 지닌 리더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다. 이를 쉽고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인도 철학자들은 서사문학을 동원했다. 바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란 책이다. 인도의 고전인 이 두 책은 모두 왕과 신하, 통치자와 백성,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 지켜야 할 각각의 다르마를 흥미진진한 이야기 구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라마야나』는 주인공 라마 왕과 그의 아내 시타가 당면하는 시련의 이야기다. 왕은 크샤트리아 카스트다. 크샤트리아인 라마 왕에게 주어진 다르마는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평화적 생존과 번영을 책임지는 것이다. 라마는 끝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왕의 다르마를 지켜 ‘다르마의 왕(Dharma-raja)’이라는 극찬을 받는다. 원래 다르마는 ‘지킨다’ ‘유지한다’ ‘수호한다’란 의미인 드리(dhri)라는 동사에서 파생됐다. 원칙을 지키는 것, 더 나아가 우주의 질서(Rita)를 지키는 것이 바로 다르마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마는 각 개인에게 주어진 공적인 차원의 사명으로 자신의 본성과 진정한 소명에 대한 추구와 실행을 요구하고 있다.
벌에게 주어진 카르마는 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벌에게 주어진 다르마는 꿀을 만드는 행위를 통해서 꽃이 피게 하고, 나무에서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 소에게 주어진 카르마는 초록색 풀을 먹고, 흰색 우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소에게 주어진 다르마는 그 젖을 송아지에게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먹지 못해 단백질이 부족한 인도인들에게 충분한 영양분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 자기의 노력으로 남을 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다르마를 지켜가는 삶이다. 태양에게 맡겨진 카르마는 작열하며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양의 다르마는 생명의 기운이 된다.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봄이 오게 하는 것이 태양의 다르마다. 태양은 끊임없이 타오르며 자신을 불태워야 하는 카르마를 타고났다. 그러나 태양은 그렇게 자신을 소진시키며 다른 생명에게 온기를 주는 다르마를 실현하고 있다.
『라마야나』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마지막 장면은 왕이 지켜야 할 다르마의 최종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판다바스(Pandavas)라 불리는 가문의 다섯 형제가 카우라바스(Kauravas)라 불리는 100명의 형제와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마하바라타』의 마지막 장면에서 판다바스의 다섯 형제는 모든 전쟁과 선정(善政)의 다르마를 완수하고 히말라야 산으로 간다. 그곳에 천상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야마(Yama) 신은 다르마의 화신으로 나타나 개의 모습으로 다섯 형제를 끝까지 따라다닌다. 히말라야로 천상을 향해 가던 다섯 형제의 장남 유디스티라(Yudhishthira)는 항상 그 개를 지켰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강자의 다르마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천상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유디스티라는 그 개를 데리고는 천상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를 듣는다. 이때 유디스티라는 그 개를 돌보아야 하는 다르마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천상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마하바라타』의 마지막 이야기다.
왕이었던 유디스티라가 개라는 미물을 지켜야 하는 다르마를 실천하기 위해 천상의 복락도 포기한 것이다. 이것이 인도 철학이 강조하고 있는 다르마의 가르침이다.
리더는 소수의 개인으로 부름을 받는다. 그 부름받은 소수의 개인은 다르마를 지켜야 한다. 천상의 복락도 포기했던 유디스티라의 모습에서 맡겨진 공공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다르마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그 회사는 다르마 경영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경영학은 사례 중심으로 연구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몇 개의 경영 사례 연구(Case Study)를 읽어 보았다. 성공한 기업, 혹은 실패한 기업의 경영 사례를 분석하는 연구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연구가 다른 기업 경영에 도움을 주는 것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고 싶다. 사례 연구에 등장하는 기업과 실제 경영에 도움을 얻고자 하는 기업은 동일한 경영 환경에 노출돼 있지 않다. 이런 유비적 연구의 한계는 “A라는 기업이 B라는 경영 기법을 동원해서 C라는 매출의 결과를 얻었다”고 했을 때 “D라는 기업이 B라는 경영 기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C라는 매출의 결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B라는 경영 기법과 C라는 매출의 결과는 같지만 A 기업과 D라는 기업은 전혀 다른, 각각의 실체(Entity)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몽룡과 성춘향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눴다고 해서 이몽룡과 향단이 사랑을 나눴을 때 같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길게 뜸을 들인 이유는 아래에 소개하는 사례 역시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밝히려는 데 있다.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그 회사나 개인을 홍보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한국의 한 회사가, 그리고 그 회사를 경영하는 한 젊은 경영자가 자신의 카르마를 추구하고, 더 큰 다르마를 실현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은 ‘사례’로 드는 것이다.
한 청년 사업가가 있었다. 그의 배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어디 출신인지,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지, 알지 못한 채로 그를 만났다. 지금으로부터 7∼8년 전으로 기억된다. 당시 그는 잠실에서 석촌호수가 내려다보는 건물에 세 들어 막 경영을 시작했던 젊은 사업가였다. 약속이 잡혔던 강연 당일, 그 회사 안으로 들어가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젊은 경영자와 함께 20∼30명밖에 되지 않는 직원들 사이로 걸어가는데 어느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CEO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간혹 눈길이 마주치면 처음 보는 내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약간 숙여 목례를 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직원도 없었다.
직원들의 공간보다 크지 않은 사무실 한쪽 구석에 CEO의 집무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집무실로 불리기에는 송구한 작은 공간이었다. 컴퓨터 화면 옆에 내가 쓴 책의 핵심 내용을 메모해 놓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자기 아내가 만든 활자체를 보여주면서 좋아하던 그 CEO는 경영자라기보다는 동네 골목대장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 동아리에서 방장하는 예비역 복학생처럼 보였는데 참 멋진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날 감동받은 것은 음식 배달업을 하던 그 회사가 독거노인들을 돌보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익의 일정 부분을 사회의 약자들과 나누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사실 내 눈에는 그 회사 자체가 승자독식의 정글 같은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약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젊은 사업가는 수익의 극대화가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잠실의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제일 좋은 공간에 직원들이 쉴 수 있는 휴게실을 만들어 놓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보통 그런 전망 좋은 방은 CEO의 집무실이나 외부 손님을 위한 접대 시설로 이용되는 것이 일상적인 관례다. 그런데 그곳을 직원들의 놀이터로 개방하고, 특이한 문구를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투명한 창문에 적어 놓았다. 피터 팬의 옷이 옆에 걸려 있었다. 그 젊은 CEO는 직원들이 피터 팬 복장을 입고 창문에서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이렇게 외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다.
“나도 날 수 있다!”피터 팬처럼 날아다니면서 빨리빨리 음식 배달을 할 수 있으면 모를까, 직원을 피터 팬처럼 날게 하는 것은 결코 기업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직원들에게 “나도 날 수 있다”는 것을 외칠 수 있도록 만든다고 해도 기업의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젊은 CEO의 엉뚱한 발상은 그 회사의 미래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기업의 분명한 목적은 이윤 창출이고 주주 이익의 극대화다.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이 근본 목표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기업은 이 근본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수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권위 의식, 위계질서, 허례허식, 체면치레 등을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기업하는 사람의 카르마가 아님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직원들이 돈을 벌어주는 소모품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피터 팬이 되도록 만들어줌으로써 그 젊은 CEO는 자신에게 주어진 경영자의 다르마를 조금씩 실천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청나게 커진 그 회사와 그 재기발랄했던 경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카르마를 직시하고 다르마를 탁월하게 실천해 나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만 하다.
대한민국 기업의 역사는 이제 1막이 끝났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외치며 동분서주했던 많은 창업자는 이제 유명을 달리했고, 그 무거운 경영의 책임은 다음 세대의 어깨로 이관됐다. 시대도 함께 급변하고 있으니 글로벌은 이미 일상이 됐고 4차 산업혁명은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이끈다. 그러나 누가 책임을 맡든지,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든지,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은 본인에게 주어진 카르마를 직시하고, 부여된 다르마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벌로 태어났으면 최고 품질의 꿀을 만들고, 그것으로 세상을 달콤하게 만들어야 한다. 소로 태어났으면 최고 품질의 우유를 만들고, 그것으로 영양실조에 걸린 세상을 구해야 한다. 그 책임을 맡은 사람은 카르마를 직시하고 다르마를 실현해 이 세상을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필자소개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르네상스 창조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