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名에서 使命을 읽다

450년을 한결같이 ‘시대를 앞서는 투자’

248호 (2018년 5월 Issue 1)

16세기 중반, 일본 전국 통일을 꿈꾸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특권상인제도를 폐지했다. 상거래의 독점권을 폐지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이 무렵 오사카, 교토를 중심으로 일본의 3대 상인이 부상하는데 오사카(大阪) 상인, 오미(近江) 상인, 이세(伊勢) 상인이 그들이다(우리나라 개성상인처럼 지역 이름을 따서 불렀다).

이들 가운데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라고 특출난 자가 있었다. 1622년생인 그는 51세가 되던 1673년에 미쓰이에치코야(三井越後屋)라는 포목점을 도쿄 니혼바시에 연다. 그 주변에는 이미 유사한 점포들이 있었는데 후발주자였던 그는 기존의 판매방식을 분석해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다. 당시 옷감은 초부유층에게만 팔리는 상품이었다. 가격은 흥정하기 나름으로 일 년에 두 번 정도 몰아서 지불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판매 단위는 필(16m 정도)이었다.

그는 누구(customer)에게, 어떤 가치(value)를, 어떤 경로(channel)로 제공할지 고민했다. 일단 고객층을 확대해 어느 정도 소득 수준이 되면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려면 소량 구매가 가능하도록 해야 했다. 그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개념인 조각 판매를 실시했다(수박을 4등분해서 1쪽씩 파는 식이다). 여기에 판매가격을 낮췄는데 정찰제를 도입해 현금만 받았고 이를 통해 회전율을 높였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도입은 성공적이었다. 점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변의 다른 가게들이 발만 동동 구르는 상황이 벌어졌다. 못된 경쟁자는 에치코야 앞에 오물을 뿌리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뒤늦게 자리 잡은 주제에 손님을 다 빼앗아 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에치코야의 장사 수완은 금세 막부(幕府, 쇼군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무사정권)의 귀에 들어갔고 막부는 물품을 대는 어용상인으로 에치코야를 선정했다. 주변 경쟁자들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에치코야를 건드리는 것은 막부에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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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던 미쓰이 다카토시는 기발한 사업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에도 시대였지만 큰 상인들은 여전히 오사카에 있었다. 막부는 도쿄에 있다. 막부는 상인들로부터 세금과 유사한 명목의 돈을 거뒀다.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돈이 움직여야 했다. 당연히 비용이 들었다. 오사카에서 110원을 보내면 수송, 보안 등 비용이 10원 발생해 막부에 100원이 간다고 가정해 보자. 다카토시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오사카 상인은 내게 110원이 아닌 107원만 보내라. 내가 막부에 무사히 100원이 아닌 103원을 전달하겠다. 실제로 그는 103원을 전달한 뒤 본인이 4원을 취했다.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다카토시는 에도에서 물건을 판다. 당연히 돈이 에도로 모인다. 물건은 오사카에서 떼 온다. 오사카로 돈이 흘러간다. 막부와 돈의 흐름이 정반대다.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 다카토시는 굳이 원단을 구하려 돈을 들고 오사카로 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오사카 상인에게 돈을 받으니까 그 돈으로 구매하면 된다. 막부에 돈을 전달하는 것도 에도에서 포목을 팔아 번 돈에서 정산하면 된다. 오사카 상인, 막부, 다카토시 3인 모두에게 이익이다. 이 시스템은 원활하게 돌아갔고 다카토시는 포목점 외에 환전상이라는 또 하나의 업태를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환전상은 추후 미쓰이은행으로 발전한다).

2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1872년이 됐다. 에치코야의 성과는 예전만 못했다. 초창기 비즈니스 모델은 대중화됐다. 과거에는 막부가 주 고객이었는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천황 및 변방 사무라이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양복이 유행하면서 포목 매출은 계속 감소했다. 다른 사업 부문인 환전상 쪽에서 자금을 지원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때 메이지 정부 재무대신이었던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로부터 “포목점 사업을 분리하고 은행 설립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넌지시 받는다. 당시 일본에는 은행이라는 제도가 없었다. 결국 일본 최초의 은행을 만드는 데 미쓰이그룹이 가장 많은 자본금을 출자했고, 이 은행이 오늘날 미즈호 은행이다.

포목점 사업을 분리해야 했지만 다카토시는 미쓰이라는 상징을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미쓰이(三井)와 에치코야(越後屋)의 앞글자를 따서 미쓰코시(三越)라는 이름 지었다(越이라는 한자는 상황에 따라 ‘에치’, 또는 ‘코시’라고 읽는다). 이후 일본 최초로 쇼윈도 설치, 에스컬레이터 설치, 전관 난방 실시 등 시대를 앞서는 투자를 시도하면서 일본 최고의 백화점으로 자리를 잡는다.

우리나라에는 1906년 ‘미츠코시 경성 출장 대기소’라는 이름으로 진출한다. 1929년 경성지점으로 승격됐다. 1945년 해방 이후 주인도 여러 차례 바뀌고 이름도 바뀐다. 이 백화점은 1968년 삼성에 의해 신세계라는 명칭으로 재탄생한다. 삼성이 당시 동방생명(현 삼성생명)을 인수하면서 백화점도 인수한 것이다. 이후 신세계는 한국 유통산업을 이끌었다. 신세계 출신 인력들이 유통업계 곳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유통업계의 사관학교’로 불리기도 했다.

미쓰이 에치코야 창업주의 장남인 미쓰이 다카히라(三井高平)는 1722년에 부친의 유지를 모아 가헌(家憲)을 제정한다. 마츠이 가문의 처세술, 사업상 조치, 재산분배율, 자손 교육법 등 미쓰이 상가의 발전과 번영을 유지하기 위한 규약과 이를 준수하도록 한 내용을 50개 항목으로 정리해 기록했다. 오늘날 미션과 유사하다. 이 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사람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일을 해야 하므로 이유 없이 은거하면서 안일함을 탐닉해서는 안 된다.” 근면성을 강조한 문구다. “장사할 때는 포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일시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다음의 더 큰 손실을 불러오는 것보다 낫다.” 매몰비용(sunk cost)의 개념을 당시에 갖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이 밖에도 전문경영인을 두더라도 그 일이 무엇인지를 본인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거나, 정치인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말고 혹시 돈을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조금만 빌려주고 받을 생각을 포기하라는 문장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비록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개념은 없었지만(그 당시 여기까지 생각했던 가문은 피렌체의 메디치가문 정도가 아닐까 한다) 가업을 영구히 존속하도록 하는 깊은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요즘 도쿄에서 전통적인 백화점을 경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 백화점과 차별화된 유통업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2016년 신주쿠 뉴오만, 2017년 긴자 식스, 2018년 미드타운 히비야처럼 말이다. 미쓰코시 니혼바시 본점도 2020년 봄 완전 재개장을 목표로 내부 공사 중이다. 늘 시대를 앞서 왔던 미쓰코시. 이번에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지 궁금하다.


신현암 팩토리8 대표 nexio@factory8.org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성균관대에서 박사(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제일제당에서 SKG 드림웍스 프로젝트를 담당했고, CJ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했으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및 사회공헌연구실장을 지냈다. 저서로 『브랜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공저)』 『잉잉? 윈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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