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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朝鮮: 호패법 논쟁

백성의 현실 외면해 실패한 호패법

김준태 | 243호 (2018년 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호패법은 조선이 징세와 군대 충원 등 원활한 국정 운영을 위해 만든 제도다. 조선은 호패법을 통해 호구를 파악하고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 감독하고자 했다. 하지만 호패법은 백성들의 거주 이전까지 과도하게 통제하면서 백성들로부터 큰 불만을 야기했고 수차례 시행이 중지됐다. 조선은 호패법이 꼭 필요한 제도임을 인식하면서도 백성의 입장과 현실에 맞게 개선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했다. 정책 실수요자를 외면한 호패법은 유명무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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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태종 13년), 의정부(議政府)1 의 건의에 따라 호패법(號牌法)이 시행됐다.2  16세 이상 남자에게 호패를 패용하게 한 것으로, 오늘날의 주민등록증과 유사하다. 호패는 길이 3촌7푼(약 11㎝), 너비 1촌3푼(약 4㎝), 두께 2푼(약 0.6㎝)으로 품계와 신분에 따라 재질이 달랐다. 관직(직업), 성명, 태어난 해, 거주지 등이 기재돼 있고 노비의 경우에는 ‘출생연도, 주인집, 거처, 얼굴 색, 수염이 있는지 여부, 신장’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호패는 빌리거나 빌려줄 수 없으며 분실하거나 위조하면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관문 등에서 호패가 없는 사람을 통과시켜도 문책됐다. 매우 엄격한 법이었던 셈이다.

이 호패법은 백성들을 통제, 관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가호(家戶)가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부과되는 신역(身役)3 의 경우 호패는 대상자를 파악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호패법은 조선시대 내내 시행과 중지를 거듭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지된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호패법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위한 제도다. 징세, 군대 충원 등 국가의 필요를 위해 만들어졌다. 백성의 거주, 이동을 규찰해서 국가의 장악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반대로 백성에게 호패법은 자신을 구속하는 불편한 법이다. 더욱이 기근, 재난 등으로 인해 사는 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큰 걸림돌이 된다. 태종 때 처음 시행된 호패법이 몇 년 만에 ‘백성이 원하지 않는다 하여 폐지’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입장에서 볼 때 호패법은 여전히 버리기 아까운 법이다. 세종 때 변계량의 발언을 보자. “한 고을의 책임자는 마땅히 그 고을의 호구를 알아야 하고, 한 나라의 주인은 마땅히 그 나라의 호구를 알아야 합니다. … 백성들이 호패를 꺼리는 것은 공적(公籍)4 에 이름을 올리지 않아 부역을 면하려고 하는 것이오니 호패의 법은 마땅히 거행하여야 합니다.”5  원활한 국정 운영과 부역 부과를 위해 호패법을 통한 호구 파악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선조 때 비변사(備邊司)6 의 ‘호패법을 다시 시행할 것을 청하는 상소’도 마찬가지다. 비변사는 “왕정(王政)은 먼저 백성의 수를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흩어져 나라가 공허한 상황입니다. 쌀을 바치는 사람에게 호패를 지급하고, 호패가 없는 사람은 기찰하고 단속하소서”7 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이른 그때, 7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은 뿔뿔이 흩어졌다. 국가의 조세 수입도 급감했다. 복구 사업을 하고 싶어도 부역으로 동원할 백성이 없었다. 따라서 호패법을 실시해 인력과 세원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백성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국가 편의주의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대에도 “백성을 온전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줬다면 그들이 어찌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는가! 상란(喪亂·전쟁)이 일어난 이래 국가는 백성을 하찮게 여겼고 백성에게 포악하기를 표범이나 승냥이처럼 하였다. 게다가 교활한 아전들은 더욱 탐오(貪汚)하고 잔혹하게 굴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생명을 보전하고 편안히 살 수 있겠는가.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진 것은 이 때문인데 이 법을 설치한다고 어떻게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모을 수 있겠는가!”라는 비판을 받는다.8

호패법의 장점과 한계

물론 호패법이 백성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광해군 때 논의를 보면 호패법은 유민(流民)9 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10  부역의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과 (장부에서 누락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부역을 면제받고 있는 사람 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신역에 새로 인원을 추가해서 기존 대상자들이 지고 있던 부담도 감경할 수 있다.11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악에 이른 상황을 일부 개선해주는 정도지, 그 자체로 백성에게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호패법이 여전히 백성에게 불편한 법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호패법 시행은 또 유보된다.

이후 호패법은 인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거론된다. 인조는 “이 일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편하겠지만 백성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백성이 아직 실질적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얽어맨다면 원망하는 소리가 있지 않겠는가?”12 라고 걱정했지만 조정은 호패법 도입을 추진했다. 1) 임진왜란 이후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해 백성의 노동력이 요구됐고 2) 반정과 연이은 반란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백성을 장악해야 했으며 3) 친명배금(親明排金)13 을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정권으로서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백성의 과도한 신역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라는 당위성도 제기됐다.

당시 호패법 찬성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장유(張維, 1587∼1638)14 인데 그는 민생안정과 국가 재정 확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함께 달성하기 위해서는 고을별로 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장유는 “현재 당면한 일 가운데 호패법의 시행보다 더 중대한 사안은 없다”며 호패법은 세수(稅收) 파악, 군적(軍籍) 결원 충원, 신역(身役) 관리뿐 아니라 “도망치거나 죽은 자로 인한 결손을 보충하여 그 족속이나 이웃에게 끼치는 폐단을 제거하는”15  효과가 있다고 본다. 16

이에 대해 조익(趙翼, 1579∼1655)은 호패법 시행을 반대했다. 그 역시 호패법의 장점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호패법은 법적 성질 자체가 백성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다양한 이유에서 거주지를 이전하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거기에서는 더 이상 삶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익은 “살던 곳에서 벗어나 떠돌아다니는 것이 저들의 살길인 실정인데 그것을 막아서야 되겠느냐”고 묻는다.17  더욱이 호패를 검사하고 단속하는 것은 백성을 불편하게 만들며 위반자에게 큰 죄를 묻는 것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했다. 조익은 무릇 제도란 백성의 삶을 위주로 해야 하는 것으로 백성의 삶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현재의 호패법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단순히 군역의 결손을 채우기 위한 법일 뿐이라고 단언한다.18

결국 호패법은 논란 끝에 중지됐는데19  조익의 지적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인조는 호패법의 폐지를 선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호패법은 백성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묶어놓았다. 구속하기를 지나치게 엄정하게 하고 독촉하기를 너무 치밀하게 하여 뭇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됐다.” 20

정책의 출발점은 대상

호패법의 사례는 정책이 대상자인 백성의 니즈에 부합해야 하고, 백성의 고충(hassle)으로부터 고안돼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공급자(혹은 집행자)의 관점에서 아무리 편리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하더라도 대상자가 반발한다면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 국가의 안정과 영속성을 확보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호패법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호패법은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해준다. 이를 통해 백성의 부담도 함께 줄여주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할 수 있었다. 다만 백성이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만큼은 개정했어야 했다. 호패법을 추진했다가 중단한 이유는 하나같이 ‘백성의 불만’이었고 그 불만은 무엇보다 거주 이전을 막은 데 있었다. 백성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호패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이 부분을 해결해줬다면 어땠을까? 어쩔 수 없이 기존의 거주지를 떠날 수밖에 없는 백성에게 융통성을 발휘했다면, 신고 의무를 엄격히 하는 대신 전출입이 가능하도록 했다면 호패법에 대한 백성의 불만 역시 줄어들지 않았을까? 물론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백성의 거주 이전을 금지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풀어준다는 것은 보다 면밀한 고려가 뒤따라야 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백성의 불만을 이유로 호패법을 중지하기만 했을 뿐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그 때문에 호패법은 시행과 중단을 계속 반복하기만 했다.

범주가 다르지만 이는 오늘날 기업의 입장에서도 유념해야 할 문제다. 경영진은 회사에 편리하다고 해서 구성원들이 싫어하는 조직관리 시스템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정책도 시스템의 장점과 구성원들의 요구 속에서 접점을 찾아야 비로소 성과를 낼 수가 있다. 고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기업은 공급자 마인드에서 벗어나 상품이나 서비스를 직접 사용할 당사자인 고객이 좋아할 상품을 내놓고 그들의 요구 사항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김준태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e@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다시는 신을 부르지 마옵소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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