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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ilosophy

현실에서 가상을 제거하면 참모습만 남을까?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화가 펠리체 바리니(Felice Varini, 1952∼)는 캔버스가 아닌 현실 공간을 이용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는 기존의 건물 내부나 복도 혹은 건물의 외벽이나 시설물, 심지어 바닥에까지 페인트를 칠해 완벽한 3차원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가 만든 작품을 하나 감상해보자.(사진 1) 고풍스러운 건물에 일정한 패턴의 빨간색 문양이 덧입혀졌다. 지금 이 사진을 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 작품이 완벽한 3차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짐작하듯이 이 이미지는 하나의 가상, 즉 환영에 불과하다. 사진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 작업에는 하나의 비밀이 있다. 관람객들이 미리 정해진 특정한 지점에서 그 이미지를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지점을 조금만 벗어나도 3차원의 이미지는 허물어지고 만다.

같은 이미지를 다른 지점에서 찍은 또 하나의 사진에서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사진 2) 이 사진에서는 3차원 이미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무의미하게 흩어진 파편적인 띠만 존재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이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흥미진진한 가상을 감상하기 위해서 기꺼이 특정한 지점으로 자신의 몸을 옮기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환영이 환영임을 감추려던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 회화와 달리 그의 작품은 그것이 스스로 가상임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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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프랑스 사회학자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의 ‘디즈니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디즈니랜드를 가상의 세계로 이해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티켓을 끊고 디즈니랜드에 들어선 순간 만화 캐릭터와 디즈니 시리즈물로 재현된 가상의 공간을 마음껏 즐긴다. 물론 어느 누구도 이 공간을 현실로 착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디즈니랜드의 출구를 나서는 순간 그러한 가상은 신기루처럼 없어지고 막막한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보드리야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의 가상공간에서 빠져오는 순간, 이제 그러한 가상이 제거된 현실세계로 돌아온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실 또한 가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는 가상의 연극을 해야 하며 다음날 회사에서는 과장 혹은 대리라는 가상의 연극을 해야 한다. 디즈니랜드라는 가상의 공간은 마치 디즈니랜드 바깥의 공간, 즉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부르는 이 공간이 가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진짜 현실 공간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가상’이라는 단어가 최근 자주 사용되고 있다. 가장 이슈가 된 단어는 바로 ‘가상화폐’다. 물론 이 단어 자체가 아직은 정립이 되지 않아서 국내에서 논란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가상화폐(virtual currency), 가상통화(virtual money) 등의 용어뿐만 아니라 암호화폐(crypto currency) 등이 사용된다. 그 용어야 어찌 됐든 간에 이 새로운 가상화폐는 말 그대로 기존의 화폐와 달리 ‘가상’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 실체를 규명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가상의 화폐가 투기의 대상이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주요 외신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다룰 만큼 우리나라의 가상화폐에 대한 투자(아니 투기) 열기는 가히 광풍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다. 급기야 정부는 이러한 현상을 진압하기 위해서 거래소 폐지를 암시한 언급까지 했다. 이 가상의 세계는 실체가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거품일 수밖에 없으며 마치 ‘바다이야기’와 같은 도박의 세계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부의 인식이다.

거품이 걷힐 경우 아무런 실체도 남지 않을 것이기에 그 순간에 카드를 쥐고 있는, 즉 가상화폐를 소유하고 있는 누군가는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위험을 사전에 공지하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방어해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정부의 정책에는 가상화폐란 그야말로 실체가 없는 ‘가상’의 화폐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내재돼 있다. 화폐란 내재적 가치, 즉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가상화폐는 어떠한 내재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상화폐는 우리가 쓰고 있는 실제 화폐, 즉 법정화폐와 달리 화폐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없으며 화폐가 아닌 가상 증서 정도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매우 상식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간과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가상화폐가 가상의 증표에 불과하므로 실제 화폐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이른바 법정화폐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법정화폐의 내재적 가치라는 것도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다. 달러의 내재적 가치는 미국 정부의 보증이며, 원화는 한국 정부의 보증에 불과하다. 달러, 원화, 유로 등 법정화폐의 가치 또한 내재적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에 불과하다. 이는 이미 1970년대에 달러에 대한 몇몇 국가의 금 태환 요구를 무시함으로써 브래튼우드체제를 스스로 붕괴시킨 미국 정부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 현실은 화폐가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현물가치를 지닌 화폐상품(금)이 있어야 한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경고조차도 넘어선 지 오래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수잔 브리노프(Suzanne de Brunhoff)의 지적처럼 오늘날 화폐란 통화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제도적 산물, 즉 가상에 불과하다. 사실상 부동산이나 귀금속에 대한 투기도 (법정) 화폐가치에 대한 불신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법정화폐야말로 더 큰 위험성을 지닐지도 모른다. 미국만 하더라도 모기지 정책과 통화 남발을 통해서 미국인들에게 헛된 환상을 만들었으며 그 환상은 곧 파국을 낳았을 뿐이다. 미국 정부가 바다이야기 사업자였던 셈이다. 가상화폐를 실체가 없는 가상의 화폐라고, 가상의 증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디즈니랜드가 또 다른 가상에 불과한 현실세계를 진짜 현실세계인 것처럼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지니듯이 가상화폐를 단지 가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자칫 현실의 가상적 성격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지닐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보자면 가상화폐의 가장 큰 위험성은 그것이 자본주의 현실을 반영하는 가상의 거울이라는 사실에 있다. 이는 개인이든, 익명이든, 단체든 사토시 나카모토와 같은 가상화폐의 창시자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편집자주

사상가와 예술가들의 공유점을 포착해 철학사상을 감각적인 예술적 형상으로 풀어내온 박영욱 교수가 DBR에 ‘Art & Philosophy’ 코너를 연재합니다. 철학은 추상적이고 난해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선사할 것입
니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imago1031@hanmail.net

필자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현대음악과 미술, 미디어아트, 건축디자인 등 구체화된 예술 형식에 주목해 철학 사상을 풀어내는 데 주력해왔다. 저서로는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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