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디자인과 경영

낡은 길 거부하고 새 길 찾은 한글처럼, 인문디자인은 ‘나’를 ‘세계’로 이끈다

241호 (2018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디즈니와 마블의 캐릭터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새로운 의미를 담은 완결된 세계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품 디자인도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기능상의 편리함에서 더 나아가서 인문학적인 의미와 스토리를 제공하는 인문디자인으로 발전해야 한다. 세종은 중국 황제의 부도덕한 태도에 반발해 조선의 독자적인 의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기에 한글이라는 위대한 창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인문학과 디자인도 성인의 가르침을 좇는 공자식 ‘학습’에 머물지 말고, 내가 주체가 되는 장자식 사고방식으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나가야 한다.


디즈니와 마블, ‘세계’를 디자인하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엑스맨, 헐크, 캡틴 아메리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경이로운 영화 속 우주)라는 회사가 만든 만화 속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이 다양한 캐릭터들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만들어낸 거대한 우주 속 영웅들로, 하나같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가령 아이언맨은 무기상인인 부끄러운 모습을 반성하며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하고, 캡틴 아메리카는 자기가 믿는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관객들은 ‘같은 우주’에 살고 있으면서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의 이야기에 열광하고 몰입한다.

마블 열풍은 우리에게 신화적 세계가 발휘하는 거대한 힘을 실감하게 해준다. 우리는 일견 현실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신화라는 가상 세계에도 살고 있고, 심지어는 신화의 눈으로 현실 세계를 보기까지 한다. 그 환상의 세계가 때로는 현실 세계보다 더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몰입하게 만든다.

디즈니도 마블과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디즈니 만화 역시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나아가 디즈니월드는 상상의 세계를 현실 세계로 옮겨놓기까지 했다. 이것은 어린이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려는 월트 디즈니의 바람을 현실화한 것이기도 하다. 디즈니의 창시자 월트 디즈니는 어느 날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들과 함께 놀고 싶고, 사진도 찍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서 월트 디즈니가 디자인한 것이 바로 디즈니월드였다. 그 결과 어린이들이 꿈꾸던 환상의 세계가 ‘지금 여기’ 실현됐다.

마블과 디즈니는 단순히 개성 있는 캐릭터들을 제작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들이 유기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관객들은 캐릭터 그 자체는 물론 그들이 엮어내는 새로운 ‘세계’에도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뒤집어 말하면 각자의 캐릭터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을 배후에서 묶어주는 단일한 ‘세계’ 덕분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세계’에 열광하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어떤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러한 존재 방식을 독일의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는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라고 규정했다. 인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세계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엮어내는 ‘의미의 세계’에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이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세계를 해석하고 구축하는 창작작업을 말한다. 각 상품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하나의 의미를 이루게 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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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디자인

이러한 사실은 디자인의 어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Design은 de와 sign으로 분해되는데, sign은 ‘기호’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를 나타내고, de는 그러한 기호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상품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그 상품에 어떤 ‘기호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기호나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바로 인문학적 활동이다.

그런데 대개는 sign을 기호와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단지 형태와 기능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design이 본래 지니고 있는 인문학적인 의미를 놓친 것이다. 그 결과 design은 의미의 세계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단지 시각적인 아름다움이나 기능상 편리함을 충족시켜주는 영역으로 제한되고 만다. 각 상품이 형태나 기능면에서는 뛰어나지만 하나의 통일된 의미 세계를 이루지 못할 때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마블과 디즈니는 하나의 통일된 의미 세계를 디자인했고, 그 의미 세계가 어린이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고 삶의 힘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새로운 세계를 접한 어린이들은 그 세계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거기서 삶의 힘을 얻으며, 그 꿈과 힘의 경험에 이끌려서 다시 그 세계를 찾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마블과 디즈니가 국경을 넘어서 전 세계적인 ‘문화’로 정착하게 된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품은 어떠한가? 매력적인 세계와 이야기가 담겨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그러한 세계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문학적 능력과 관심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반대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그러한 세계와 이야기에 대한 열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다만 우리의 디자인 개념이 여전히 기술과 미술 중심이라서 산업현장에서 인문학의 가치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리는 인문세계

자연과학이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science about natural things)이고 공학이 인위적인 것을 제작하는 학문(science about artificial things)이라고 한다면1 인문학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의미 세계를 구축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문학은 공학과 처음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양자에 모두 ‘디자인’의 개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방향성과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인문학이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의미 세계를 구축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면 공학은 반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 세계를 제작물로 구현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인문학이든, 공학이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구축하고자 한다면 ‘자기’가 살아 있어야 한다. 이 ‘자기’라는 요인은 design으로 말하면 de에 해당한다. Sign(의미)을 부여하는 ‘행위’가 de이기 때문이다. 즉 의미를 부여하고 구축하는 주체로서의 ‘자기’가 de인 것이다. 반대로 design에서 de가 사라지게 되면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과 주체가 사라지고, 그 결과 영원한 모방과 복제 제품만이 난무하게 된다.

이러한 모방행위를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2 은 ‘축물(逐物)’이라고 했다. ‘축물’이란 글자 그대로는 ‘외물을 좇는다’는 뜻으로, 인문디자인적으로 해석하면 새로운 의미 세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의미 세계를 좇아 다닌다는 말이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의미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체가 된 상태다.

디자인 주체로서의 ‘나’

반대로 ‘내’가 살아 있는 상태,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공공성의 의미를 우리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가 세종이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비롯한 달력 창제, 악보 창제와 같은 일련의 창조경영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의 전형적인 사례다. 공공철학자 김태창3 은 ‘자기’가 살아 있어 의미의 주체가 된 상태를 ‘활사(活私)’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의 효과를 ‘개공(開公)’이라고 명명했다. 여기에서 ‘활사’는 ‘사(私=나)를 살린다(活)’는 뜻이고, ‘개공’은 ‘공(公=조직)을 연다(開)’는 뜻이다. 그래서 ‘활사개공’은 인문디자인적으로 해석하면 ‘나의 주체성을 살려서 조직의 공공성을 열어간다’는 뜻이 된다. 나의 주체성이 살아날 때 비로소 새로운 의미 세계에 눈이 떠지고, 그 열린 ‘눈’이 조직을 새롭게 혁신해나간다는 의미다.

세종은 창조활동을 통해서 중국과는 다른 조선의 독자적인 의미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다. 기존의 유학자들이 중국이라는 이질적인 의미 세계를 좇거나(逐) 서술하고(述) 있었던 반면에 세종은 조선의 독자적인 의미 세계를 디자인하고 창조하고자(作) 했다. 이처럼 세종이 조선의 독자적인 의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이 아닌 ‘나’의 눈으로 세상으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창희 교수4 에 의하면 세종은 즉위 14년 무렵에 과도하게 공녀(貢女=조선의 젊은 여성) 등을 요구해오는 중국 황제의 부도덕한 태도에 실망하고 분노해 문화적으로 독립국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5 이것은 인문디자인적으로 말하면 중국 황제의 반(反)유학적인 모습에 더 이상 ‘의미’를 느끼지 못한 세종이 자신의 힘으로 ‘인문세계’를 디자인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세종의 대표적인 인문디자인인 한글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편리함과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제공하고 있다. 마스다 무네아키6 츠타야 회장은 이것을 ‘고객가치’라고 말했다.7 고객가치란 디자인의 가치를 고객의 입장에서 평가한다는 뜻이다.8 실제로 츠타야는 판매 중심의 매장 배열에서 고객 중심의 매장 배열로 서적 배열의 ‘의미’를 바꿔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서점 브랜드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마스다 회장에 의하면 회사가 고객가치를 극대화하려면 사원들이 자유로운 디자이너(=기획자)가 돼야 한다.9 조직의 구성원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각자가 지니고 있는 ‘지적 자본’10 이 활성화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김태창의 용어로 표현하면 디자이너의 자유로움은 ‘활사(活私)’에 해당하고 그로 인해 얻어지는 고객가치는 ‘개공(開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인문디자인적으로 말하면 ‘내’가 ‘나’로서 존재할 때 나의 타고난 ‘덕’11 이 마음껏 발현되고 그 결과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덕’도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살아 있는 세계를 최근 들어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작품은 아마도 ‘겨울왕국’일 것이다. 겨울왕국은 ‘왕국’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12 하나의 독자적인 ‘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특히 ‘Let It Go’라는 주제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그리기 위해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항상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살았던 주인공 엘사, 부모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살아왔던 여성이 자신에게 잠재된 비범한 능력(德)을 더 이상 감추지 않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면서 당당하게 살겠노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Let It Go’다.

이러한 여성상은 더 나아가서 이런 여성이 그리는 의미 세계는 전통과 도덕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아마도 디자인되기 어려울 것이다. 개개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은 많을지 몰라도 그 여성이 하나의 단일한 ‘세계’로 그려지기에는 유교의 장벽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나’로서 살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내’가 부재한 한국의 인문학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인문학은 대체로 ‘국가·시험·이념’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국어’나 ‘국사’ 또는 ‘국민윤리’ 같은 국가 중심의 인문학이 강조됐다. 한편 고등학교까지 청소년 인문학은 대학입시라는 시험을 위한 수험 인문학이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이념 인문학이 주류를 이뤘다.13

이 모든 현상들의 공통점은 ‘내’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자리에 국가나 시험 또는 이데올로기가 들어서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창작활동을 구속하고 억압해 왔다. 이것이 과연 인문학의 본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문학의 본래 목적이 ‘나’를 회복하고 ‘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면 지금까지의 한국의 인문학은 오히려 ‘주어가 빠진’ 반(反)인문학적인 것이 아닐까?

인문학을 하는 데 있어 ‘내’가 빠져 있다는 것은 내가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세계를 학습하고, 습득하고, 이해하는 데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빌려온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고 상품을 만든다는 뜻이다. 이러한 수입과 모방 위주의 문화에서는 나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디자인하기 어렵다. 기껏해야 남이 디자인해 놓은 것을 변형하거나 활용하는 정도에 그칠 뿐이다.

이렇게 남이 디자인해 놓은 것을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발자국’(跡)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발자국’이란 발이 걸어가면서 남겨 놓은 흔적(traces)을 말한다. 따라서 발이 원인이라면 발자국은 그것의 결과에 해당한다. 그래서 장자는 ‘발’을 ‘소이적’(所以跡)이라고 했다. ‘소이(所以)’란 ‘∼한 까닭’이라는 뜻으로 ‘원인’을 의미한다.

장자가 보기에 성인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유교 경전은 ‘발’ 그 자체가 아니라 ‘발자국’에 불과하다. 즉 성인이 의미 세계를 디자인한 ‘창작활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결과로서 의미 세계를 기록해 놓은 창작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방과 학습 위주의 문화에서는 창작활동으로서의 ‘발’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결과물로서의 ‘발자국’만 따라가게 된다. 다시 말하면 동사로서의 디자인 활동(de=所以)이 아니라 명사로서의 디자인된 세계(Sign=跡)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영원히 창조적인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장자가 유교적인 ‘술(述)’의 문화를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는 자신을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성인이 만든 문물제도를 ‘서술’했지 새로운 것을 ‘창작’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장자가 보기에 이러한 ‘술’의 인문학은 ‘나’의 자리에 성인이 대신 들어와 있기 때문에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성인의 결과물을 학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나의 창작활동을 진작시키는 인문학이 될 수 없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교적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아온 우리의 인문학 역시 마찬가지다. 성인은 언제나 중국이나 서양이라는 외부에 있었고 우리는 그 성인의 ‘말씀’(고전)을 학습하는 것을 인문학이라고 생각해왔다. ‘나’를 찾기보다는 ‘남’을 아는 데 급급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남’이 ‘나’의 자리에 들어와 있음을 뜻한다. ‘남’이 성인이라는 하나의 권위가 돼 나를 억압하고 짓눌러온 것이다. 그 결과 나의 세계보다는 남의 세계를, 내 이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를 탐구하는 데 열중해 왔다. 그래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지 못하거나 내가 만든 세계조차도 ‘비하’하고 ‘무시’하게 된 것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은 딱 이런 경우를 말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외부에서 들어온 나를 제거하고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장자에서 힌트를 얻자면 이미 만들어진 ‘낡은 길’을 가기보다는 미지의 ‘새길’을 가는 것이다. ‘길은 걸어가다 보면 만들어지는 것이다’(道行之而成)는 장자의 말은 남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의 발로 직접 걸어가보라는 권유다.

이렇게 남이 가지 않은 길에 도전할 때 우리는 비로소 벌거벗은 ‘나’와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를 직시했을 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때가 바로 ‘주체’로 거듭나는 시점이다. ‘주체’로 거듭날 때 우리는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긴다. 그 욕구가 체계화될 때 나만의 ‘세계(world)’가 디자인된다.


김경묵은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부회장 겸 원장, 인문학공장 대표다. 삼성전자 수석디자이너로 일했으며 동 회사 디자인철학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조성환은 사단법인 한국조직경영개발학회 인문디자인경영연구원 상임이사, 인문학공장 편집팀장이다. 와세다대와 서강대에서 수학했으며 철학 박사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