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다. 셋, 둘, 하나…. 신호가 바뀜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인파가 길을 건넌다. 그 규모가 압권이다. 많을 때는 3000명이 동시에 길을 건너기도 한다. 일본 관련 TV 뉴스가 나올 때마다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이 거리는 시부야 스크램블(scramble) 교차로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이 장면을 동영상으로 자신의 휴대폰에 담고 있는 외국 관광객의 모습도 낯설지 않다.
현지인이건, 관광객이건 시부야는 늘 인산인해다. 흥미로운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다. 유명 쇼핑몰인 시부야109는 ‘도쿄 패션의 발상지’라 불리는 패션 빌딩이다. 태닝을 한 까만 피부에 짙은 화장, 노랗게 염색한 머리에 짧은 미니스커트 교복으로 상징되는 ‘고갸루(고등학생을 의미하는 한자 ‘고(高)’와 girl의 일본식 발음인 ‘갸루’가 합쳐진 말)’의 출발지도 시부야였다. 한때 전설적이었던 타워레코드의 플래그십 스토어가 있는 곳도, 밤이 되면 수많은 클럽이 하나둘씩 민낯을 드러내는 곳도 모두 이곳이다.
가뜩이나 볼거리가 많은 시부야에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했다. 바로 2012년 봄에 문을 연 복합 쇼핑몰 ‘시부야 히카리에’다. 유통업과 함께 전철과 부동산을 동시에 개발하는 복합기업인 도큐그룹의 주도하에 시부야역 주변 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됐다. 시부야 히카리에가 오픈할 당시 쇼핑몰에 몰려든 인파는 4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지난 4월 도쿄 긴자 한복판에 들어선 초호화 쇼핑몰 ‘긴자 식스’ 개장 당시 몰렸던 인원이 2500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5년 전 시부야 히카리에의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원래 개장시간보다 10분을 당겨 오전 10시20분에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 기사의 헤드라인으로 뽑힐 정도였다.
시부야 히카리에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도큐그룹의 도큐문화회관 터였다. 1956년에 오픈했던 도큐문화회관은 당시 시대를 앞서는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해 왔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한 DNA를 이어받아 시부야 히카리에도 ‘문화발신기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플랫폼’을 지향했다. 다른 복합 쇼핑몰보다 시부야 히카리에에 다양한 문화시설이 입점해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가장 흥미로운 층은 8층이다. 이곳에선 문화 및 크리에이티브와 관련해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중 ‘d47 뮤지엄(museum)’ ‘d47 식당’ ‘d47 디자인 트래블 스토어(design travel store)’ 등 ‘d47’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일련의 공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알파벳 d는 디자인을, 47은 일본 전체 지역의 숫자를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16개 시·도로 이뤄진 것처럼 일본은 47개 행정구역(도도부현·都道府縣)으로 구성돼 있다. 가장 북쪽이 1번 홋카이도, 가장 남쪽이 47번 오키나와다. 도쿄는 13번, 교토는 26번, 오사카는 27번 등 대충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숫자가 올라간다.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d47은 ‘디자인을 중심으로 일본 47개 현을 소개하는 곳’이다. 47개 행정구역을 지닌 일본은 서로 편차가 심하다. 도쿄는 파리, 런던, 뉴욕과 경쟁하지만 시골에 가보면 여기가 일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낙후된 지역도 있다. d47은 이러한 지역 간 편차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각 지역의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개한다. 우선 d47 뮤지엄에서 상품 전시회를 갖는다. 좋은 상품을 소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특정 ‘주제’를 정해놓고 전체 행정 구역의 제품을 소개(예: 일본의 편의점 상품을 주제로 행정구역별로 대표 제품을 하나씩 골라 소개)하는 방식과 특정 ‘지역’의 명물(예: 오키나와현의 카페, 식당, 숙소, 볼거리 중 디자인 측면에서 꼭 경험해야 할 곳을 소개)을 선보이는 방식이다. d47 뮤지엄에선 연간 5∼6회의 테마전과 3∼4회의 지역전시회를 연다. 총 47개 행정구역을 소개할 수 있는 지역전시회는 2017년 11월 현재 22회까지 열렸다. 아직 25회가 남아 있는 셈이다. 한 번 행사에 대개 5∼6주를 할애해 치르고 전시회가 끝날 때마다 자료집을 만들어 한 권의 책으로 보존한다.이미 발간된 책과 앞선 전시에서 관심을 끌었던 제품은 d47 디자인 트래블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다. 아울러 행정구역별 대표 음식(우리로 치면 전주에선 비빔밥, 광주에선 소머리국밥)을 d47 식당에서 즐길 수 있다. 결국 뮤지엄에서 눈으로 보고(시각 충족), 스토어에서 구매하고(추억 충족),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미각 충족) 함으로써 오감을 뛰어넘는 육감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디자인을 축으로 일본 각 지역을 소개하는 d47을 기획해 창의적인 공간 마케팅을 가능케 한 이는 디앤디파트먼트(d&department) 프로젝트를 주창한 나가오카 겐메이(ナガオカケンメイ·야구선수 이치로처럼 자기 이름을 가타카나로 표기)다. 현재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로 유명한 하라 켄야(原硏哉)와 함께 지난 1990년 일본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했던 겐메이는 1991년 켄야와 함께 하라디자인연구소를 설립했고, 1997년 D&MA(Drawing & Manual의 약자)를 세우며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좋은 디자인(good design)’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정립하며 2000년부터 디앤디파트먼트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다.
디앤디파트먼트는 가구, 잡화 등의 제품을 선보이는 라이프 스타일 편집 매장으로, 일본 전역은 물론 서울에도 매장이 있다. 겐메이가 디앤디파트먼트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비전은 디자인 백화점이다. 아무 부담 없이 왔다가 무심코 손에 든 물건이 모두 ‘멋진 디자인 상품’인 곳,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디자인도 좋은’ 물건을 파는 곳. 그래서 디자인과 백화점을 합쳐 디앤디파트먼트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겐메이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뭘까. “형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상에서 오랜 시간 사용해 온 물건이 좋은 디자인”이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 즉,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롱 라이프 디자인(long life design)’, 이른바 ‘생명력’이 긴 물건이야말로 진정으로 좋은 제품이라는 의미다. 일본이 막 산업화되던 1960년대 당시의 제품 중에는 지금 시각으로 봐도 촌스럽지 않은 제품들이 많다. 겐메이는 이 당시 디자인된 제품을 다시 대중에게 선보이며 오래전 디자인된 제품의 사용을 권한다. 싫증 나기 쉬운 디자인으로 제품을 교체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오히려 정감이 가는 디자인을 구사하라는 의미다. 알파벳 d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겐메이의 디자인 철학은 환경보호와 지속가능 경영에 대한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오늘날 경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현암 팩토리8 대표 nexio@factory8.org 필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성균관대에서 박사(경영학) 학위를 받았다. 제일제당에서 SKG 드림웍스 프로젝트를 담당했고, CJ엔터테인먼트에서 근무했으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및 사회공헌연구실장을 지냈다. 저서로 『브랜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공저)』 『잉잉? 윈윈!』 『빅프라핏(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