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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니··· 즉시 행하여 새 전례를 만들라

노혜경 | 214호 (2016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우리는 새로운 생각이나 창의적 제안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공공기관이나 정부조직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기에 ‘전례가 없다’는 말은 ‘복지부동’과 ‘무사안일’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왕이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신하들은 ‘전례가 없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말 이 ‘전례가 없다’는 말이 복지부동의 상징이었을까? 실제 조선시대 ‘전례’가 활용된 일을 보면 상당 부분은 왕의 독단적 권력행사를 막고 명나라나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는 데 실용적으로 활용된 부분이 컸다. 정조는 한발 더 나아가 ‘전례는 다양하니, 백성에게 유리한 전례를 활용하고, 전례가 없더라도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시도하라’고 지시했다. 전례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고 창조돼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아이템을 구상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분통터지고 끔찍한 상황은 “경험이 있느냐?” “전례가 없어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올 때다.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아이템은 그야말로 처음이고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에 더욱 어렵고 의미가 있는 건데, 그 의미는 어디다 팽개쳐 버리고 근거가 없다며 제안서 첫 장조차 들춰보지 않는 것이다. 오죽하면 ‘창의적 아이디어 공모전’에 응모를 했더니 “전례가 없다”라는 이유로 기각되더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아다니는 상황이다.

현재는 서울의 문화 아이콘이 된 서울역 앞 옛 대우빌딩 외벽의 ‘미디어 캔버스’도 처음엔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옛 대우빌딩이 매각될 때 새로운 주인이 된 모건스탠리가 대대적으로 건물 리모델링을 하면서 부지 기부체납을 하거나 공원 등을 조성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인근에 여유 부지를 찾을 길이 전혀 없자 빌딩의 외벽을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초대형 건물 전면부를 활용한 아트 워크를 시행하는 전례가 없어서 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한 진통 끝에 이 프로젝트는 겨우겨우 진행됐다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새로운 시도 덕분에 현재는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손쉽게 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상영되는 세계의 유명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제안에 반대했던 사람들조차도 이제는 ‘서울의 문화 아이콘’이라고 이를 칭송한다.

‘전례가 없다’며 안 된다는 것을 새로운 전례로 만들어 해결했기 때문에 지금은 자부심을 가질 정도의 성공사례로 자리매김한 경우다. 하지만 이런 성공사례는 흔치 않다. 대개는 황당한 경험으로 여기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 일쑤다. 오히려 포기하는 사례가 너무 많아서 문제다.

그러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조선은 예법과 전통을 대단히 중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간수하던 나라였다. 조선에는 ‘조종성헌(祖宗成憲)주의’라고 해서 선대에 만들어진 법조문에 대해서는 개정 불가의 법칙을 지키는 전통이 있었다. 한번 법전에 수록한 법은 절대 고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래서 400년이 지나 사문화된 법도 법전에서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둬야 했다.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본문 밑에 주석으로 다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래서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조선후기에 편찬된 법전을 보면 “지금은 없다” “지금은 시행하지 않는다” “지금은 폐지했다” 등 이런 각주들이 수도 없이 달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였으니 “전례가 없다”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었다. 당연히 무수하게 사용됐다. 심지어 법조문에 수록돼 있는 제도조차도 “법대로 합시다!”가 아니라 “전례가 있으니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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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이런 관행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례가 없다”라는 말이 복지부동이라든가, 현상유지라든가, 책임회피를 위한 용도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례를 따지고 전례를 찾는 것의 제일 중요한 용도는 권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왕이 능을 크게 지으려고 한다거나, 과도한 포상을 내리려고 할 때, 혹은 총애하는 신하에게 권력을 몰아주려고 하거나, 법에 없는 인사를 하려고 할 때, 또 인기 부합책이나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하려고 할 때, 신하들이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먼저 거론하는 것이 “전례가 없다”였다. 뿐만 아니라 권력가가 부당한 청탁을 하거나 중국 사신이 부당한 뇌물을 요구할 때도 거절하는 방법이 “나는 정말 들어주고 싶은데 전례가 없다”였다. 조선이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 평소에 “전례”를 그렇게 남발하고 법보다도 중시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해서 전례의 권위를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백성들이 큰 고통을 받거나 법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경우에는 전례에 구애받지 않고 전례에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전례 위의 원칙’이 있었다. 즉 지금도 사용할 만하면 전례이고, 문제가 되면 전례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조선시대 전례의 진짜 원칙이었다.

그러면 개혁군주라고 불리는 영조와 정조 때는 어땠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영조와 정조는 이런 전례 사용의 원칙에 더더욱 철저했다. 차이가 있다면 전례를 악용하는 사례는 색출해서 금지하고 새로운 전례를 만들어내는 데 더 적극적이었다.


“필요한 법이라면 법 개정을 빨리하는 것이 전례에 맞는 일이다.
빨리 새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새로운 전례로 만들어라!”



18세기가 되면서 ‘전례’를 악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어났다. 관리들은 자기 편한 대로 행정관행, 조세관행, 행사관행을 만들었고, 그것을 기록해 놓은 뒤에 전례와 관행을 내세우며 수탈을 하고 개혁을 거부했다. 그러자 영조는 모든 관청에 있는 <전례등록(前例謄錄)>, 즉 각 관청별로 시행되고 있던 관행기록을 정리한 책 모두를 태워버리게 했다.

정조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과거 전례를 꼼꼼히 따져봤더니 여러 가지가 있더라. 그중에서 백성에게 제일 좋은 것을 사용하라! 백성을 위한 일인데 전례가 없으면 어떠냐!”

정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필요한 법이라면 법 개정을 빨리하는 것이 전례에 맞는 일이다. 빨리 새 법을 만들어서 그것을 새로운 전례로 만들어라!

1789년(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해야 했다. 조선에서는 이런 왕실행사에 백성들을 무상으로 사역하는 것이 관례였다. 물론 무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고, 왕이 하시는 일이니 백성들이 자원해서 응모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정조는 이런 관행이 전례를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처사라고 금지했다. 대신 임금을 지불하고 고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도 서울의 사대부들이 정신 못 차리고 일을 벌였다. 이 기회에 왕에게 잘 보이려고 자신들이 나서서 차출해 놓고는 백성들에게 자원했다고 말하라고 시키고, 이것은 국가의 전례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아무리 전례가 있다고 해도 백성을 위하는 일에 전례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정조는 실패한 개혁도 많았고, 고민만 하고 시행하지 못한 개혁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개혁군주로 추앙받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례와 경력을 따지는 데는 다 그럴 만한 사정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는 얘기다. 그러나 전례를 사용하는 이유, 전례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따져 봐야 한다. ‘전례가 없다’는 말이 편하고 안전하고,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이 돼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에도 전례를 중시한 이유는 불법과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가와 백성을 위한 일은 새로운 전례를 만들어서 전례로 삼게 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강철왕으로 알려진 카네기는 24살 때에는 월급 65달러의 철도회사 직원이었다. 당시 철도는 단선철도였기 때문에 작은 사고라도 생기면 바로 철도 운행이 마비됐다. 카네기의 상관은 사고가 발생하면 현장으로 달려가 사고를 수습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넓은 나라에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니 현장까지 오고가는 동안 엄청난 시간이 소모됐다. 그런데 어느 날 상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연락이 왔다. 카네기는 아직 별 볼일 없는 말단 직원이라 사고를 수습할 권한이 없었지만 그는 전례가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상관의 이름을 몰래 빌려 전신으로 사고 수습 명령을 내린 것이다. 카네기는 해고당할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상관은 카네기를 문책하기는커녕 월급 1800달러의 지사장으로 임명했다. 상관의 이런 태도 역시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카네기를 강철왕으로 만드는 작은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제는 다시 한번 전례의 사용원칙을 재점검해볼 때가 됐다. 전례를 올바로 사용하고 카네기와 그의 상관처럼 전례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례를 창조하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각자 전례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면 이런 구성원들의 조직은 변화의 시대를 기회의 시대로 만들고, 성공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노혜경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덕성여대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호서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이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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