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탱크는 1차 대전 중에 발명됐다. 하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장군들은 탱크 부대의 독자적 전술 능력을 부정했다. 탱크는 그저 보병중대 앞에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며 철조망을 깔아 뭉개거나 물자를 수송하는 장비 정도로만 생각했다. 히틀러에 의해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인츠 구데리안은 1939년 폴란드 침공 전투에서 탱크의 위력을 증명했다. 하지만 구데리안 휘하 사단장과 연대장들은 탱크보다 기병이 전격전에 더 낫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탱크부대로 도시를 점령하고도 폴란드군 기병 사단의 반격이 무서워 자진 후퇴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구데리안 부대를 가로막았던 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장벽이었다. 구데리안은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해 ‘기갑전술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었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무기의 발달사에도 이상한 차별이 있다. 항공기는 처음 등장했을 때 형편없이 약하고 불안정한 기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전쟁을 바꿀 무기로 각광을 받았다. 린드버그가 논스톱으로 대서양을 건넌 것이 1927년이었다. 항공기를 개조해서 날개 속까지 연료를 꽉 채우고 33시간은 잠도 자지 않고 비틀비틀 날아 간신히 횡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륙을 건너 적국을 폭격하는 전략폭격기에 대한 구상과 개발이 시행됐다.
항공기에 비하면 자동차는 대단히 안정된 공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그 자동차에 장갑을 씌우고 기관총과 대포를 장착한 것이 탱크였다. 탱크는 1차 대전 중에 발명됐다. 탱크의 활용법에 대해 영감이 차고 넘쳤을 법한데 탱크의 가치에 대해서는 인정을 받았지만 전략적 영감이라는 부분에서 탱크는 의외로 무시를 당했다. 대부분의 장군들이 탱크부대의 독자적 전술능력을 부정했다. 보병중대 앞에서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며 철조망을 깔아 뭉개거나 물자를 수송하는 장비 정도로만 생각했다.
탱크보다 기병을 신뢰했던 이유
전쟁에서 필요한 기동력을 활용하는 전술은 탱크보다는 기병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1930년대까지도 거의 모든 장군들의 뇌리를 지배했다. 20세기의 전쟁에 말(馬)이라니. 청동대포와 1분에 15발을 쏘는 후장식 소총 앞에서도 기병은 전멸을 당했는데 1930년대 기관총은 1분에 800∼1200발을 발사했다. 대포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장군들은 기동이라고 하면 기병을 신뢰하는 의리를 버리지 않았다.
독일 기갑전술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은 이 편견을 깨고 기갑부대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24년 구데리안 대위는 장갑차를 이용해서 숙원이던 기동훈련을 펼쳐 보였다. (독일은 베르사유조약으로 탱크를 보유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크게 고무됐다. 구데리안이 장갑차량을 이용한 전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선언하자 훈련을 참관하던 수송감은 이렇게 내뱉었다. “전투라니? 이 차들은 밀가루를 운반할 것이란 말일세!”
구데리안이 특별히 그 수송감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것은 아니었다. 그 장교는 나중에 구데리안을 붙잡고 진지하게 충고했다. “자네는 너무 성급해. 나를 믿게나. 우리가 죽을 때까지 탱크가 전선에서 활약하는 광경은 보지 못할 걸세.” 그러나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구데리안의 탱크들은 세계를 놀라게 한다.
다행히 구데리안을 지지하는 몇 명의 장군들이 있었다. 최고의 후원자는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덕분에 구데리안의 탱크부대는 군단 규모로 성장했다. 하지만 구데리안이 넘어야 할 벽이 또 하나 있었다. 기갑부대의 전술, 즉 전격전에 대해서는 더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때까지 모든 전투는 전선을 유지하며 횡대로 진격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야 측면을 보호할 수 있다. 전격전은 이 측면 보호의 원칙을 무시하고 종심대형으로 적의 중심부로 전격적으로 파고들어 승부를 결정짓자는 전술이었다. 다들 콧방귀를 뀌었다. 그건 훈련에서나 가능한 전술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조금 진지한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좋아, 화살처럼 파고든다고 하자. 어디까지 파고들 것인가?” 구데리안은 대답했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다들 고개를 젓는다. 이건 작전이 아니다. 작전이란 목표, 방법, 대책이 정확해야 한다. 무조건 가는 데까지 가는 전술이라니. 이런 전술로는 동네 뒷산을 오르다가도 실패할 것이다.
물론 전격전이 마구잡이식 돌격은 아니다. 돌격을 위한 엄정한 훈련과 방법, 정교한 보급 추진체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승부의 결정적인 지점을 찾아서 끝까지 돌격한다’는 전술모토는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창조를 위한 선결 조건-편견의 벽을 넘어라
결국 구데리안은 실전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회가 1939년에 왔다. 히틀러 덕에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기갑부대가 주축을 담당하게 됐다. 도덕적으로 칭찬할 일은 아니지만 전술적으로 폴란드 침공은 구데리안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폴란드는 평원이고 주력이 기병일 정도로 군대는 낙후했다. 탱크가 돌격하기에는 최고의 적격지였다. 기갑군단은 아직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다. 전격전은 더욱 낯설고 너무나 대담한 전술이었다. 잘 정비된 요새나 산악지대를 만나면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을 것이고 전격전술은 폐기됐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구데리안은 예하부대에 최대한 진격하라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최초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걱정되는 곳은 역시 강이었다. 역사적으로 강은 언제나 공격하는 입장에서 뚫고 들어가기에 최악의 방어지형이었고 기병이나 기갑부대에겐 특별한 난제였다. 그것은 앞으로도 모든 전쟁에서 그럴 것이다. 구데리안도 무척이나 걱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브라헤 강에서 전진이 멈췄다.
사단본부로 찾아간 구데리안은 깜짝 놀랐다. 사단장과 연대장들이 모두 강 너머 적군의 전력에는 관심도 없었다. “우리는 이미 쾌속전진을 했다. 강은 당연히 건너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하자.” 이런 마음으로 스스로 멈춰 버렸던 것이다. 사단장은 사령부로 갔고, 연대장들은 본부로 정한 아름다운 고성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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