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가 화두다. 치열할 글로벌 경쟁 속에 저성장·고실업 등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의 돌파구로 박근혜정부가 꺼내 든 슬로건이다. 그 용어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이건 사람들마다 창조경제를 이루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하나같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게 있다. 바로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다. 실패는 보통 나쁜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지식경제시대를 맞아 창의성을 발현시키고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해 실패에 대해 너그러워져야 한다는 견해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실패를 허용하라는 말이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오늘의 실패를 통해 내일의 성공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때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실패는 바람직하지 않다. 격려와 독려의 대상이 돼야 하는 건 바로 ‘똑똑한 실패(intelligent failure)’다.
똑똑한 실패는 듀크대 푸쿠아 경영대학원 교수 심 싯킨(Sim Sitkin)이 소개한 개념이다. 그는 기존 사업과 너무 친숙하지도, 전혀 상관없지도 않은 영역에서 적정 규모의 투자와 치밀한 사전 계획하에 다양한 시도를 하고 불확실한 상황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기대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를 똑똑한 실패라고 규정했다. 조직 학습 관점에서 유용한 건 바로 이런 특성을 가진 실패라는 게 싯킨 교수의 주장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베른트 크릭스만(Bernd Kriegsmann) 독일 응용과학대 교수도 ‘창조적 실수(creative error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창조적 실수란 혁신을 목적으로 리스크를 계산해가며 기존 관행과 루틴을 벗어난 과감한 시도를 했지만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경우를 뜻한다. 크릭스만 교수는 실수를 허용해야 한다는 병적 집착(error euphoria)에 사로잡혀 무턱대고 실수를 용인해선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수를 용납하는 문화가 진정으로 혁신 역량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실패의 ‘옥석’을 가려내는 혜안이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실수를 은폐하려는 행위(secret failure)나 단순 부주의 혹은 업무 태만으로 인한 실책(flop, blunder), 학습 의지가 부족해 발생하는 반복적 실수(repeat errors) 등은 엄중히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갑작스런 환경변화로 인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시스템적 실수(system errors)’와 혁신으로 가는 중간 여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창조적 실수’는 적극적으로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게 크릭스만 교수의 설명이다.
에이미 에드먼슨(Amy Edmondson) 하버드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실패를 칭찬받아 마땅한 실패(praiseworthy failure)와 비난받아야 할 실패(blameworthy failure)의 스펙트럼 속에서 분석했다. 특히 그는 지식기반을 넓히고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한 실험을 실시했지만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 ‘탐구적 검증(exploratory testing)’ 활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비록 당장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가치 있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향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P&G, IDEO, BMW, 3M, 혼다 등 글로벌 혁신 기업들은 일찌감치 ‘실패상(賞)’을 시상하거나 ‘실패파티’를 여는 방식을 통해 실패를 공론화하는 분위기, 실패를 축하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한국에서도 삼성에버랜드, 제일기획, 롯데건설, KT 등 일부 대기업들이 이와 유사한 제도를 시도했거나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맹목적인 글로벌 프랙티스의 벤치마킹에 그치지 않고 진정 효과를 발휘하려면 먼저 실패에 대한 명확한 평가 잣대를 가지고 있는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식스 시그마를 추구해야 할 생산 공장에서 무분별한 실패 용인은 자칫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실패상을 제정해 놓기만 하면 직원들이 앞 다투어 도전정신을 발휘하고 자신들의 실패 사례를 적극 공유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앞에선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하며 뒤로는 인사고과에 반영해 불이익을 주는 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을 게 뻔하다. 장기적 성공보다 단기적 성과만 장려하는 인센티브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 실패가 성공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당장 눈앞의 이익만 치하하는 풍토하에서 위험을 감수할 리 만무하다.
삼성이 매년 거행하는 ‘자랑스런 삼성인상’은 그룹의 성과주의 방침을 대표하는 제도다. 지난해 이건희 회장의 취임 25주년 기념식과 더불어 진행된 시상식에선 수상자 18명 모두에게 1직급 특별 승격과 1억 원의 상금이 주어졌다고 한다. 최고의 실적을 올린 직원에게 회장이 직접 포상을 내리는 행사도 의미가 있지만 창의적 실수, 똑똑한 실패를 저지른 직원들을 회장이 직접 격려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필자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했고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올리버 와이만에서 글로벌화 및 경쟁전략 수립 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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