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위험 관리
수출 환경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환율은 늘 상위권에 랭크된다. 환율이 주요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쯤이면 수출입 기업들의 채산성에 비상이 걸리기 마련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기업들은 환율 수준 자체보다 환율 변동성 확대를 위협 요인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환율이 점진적으로 움직이면 기업이 나름대로 대처할 수 있지만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거나 급등락이 반복되면 대처 시기를 놓치거나 환 헤지 타이밍을 잡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원화 환율의 변동성이 높은 원인
우리나라 환율 변동성은 신흥국 중에 매우 높은 편이다. 아시아권 국가보다는 평균 두 배 이상 변동성을 나타내는데 이는 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물론 자본시장 자유화 정도가 높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외환시장 규모가 교역규모 대비 작다는 점을 높은 변동성의 원인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로-달러, 달러-엔, 파운드-달러 등 국제화된 통화들이 전 세계 외환거래량의 70% 이상 차지하고 있는데도 이들 통화의 변동성이 원화보다 훨씬 높다는 점에서 이 같은 시각은 논리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원화 환율의 높은 변동성은 외환시장에서 실수급(수출입 대금 환전, 국내 투자자금 환전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나치게 큰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외환시장이 커진다면 외환위기 또는 금융위기 때처럼 통화가치가 단기간에 폭락하는 시스템 위험은 크게 줄겠지만 변동성 자체가 줄지는 않을 것이다. 원화 환율은 다음과 같은 구조적 특징으로 향후에도 상대적으로 높은 변동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높은 대외의존도가 첫째 이유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 대외의존도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 70%에 머물던 무역의존도는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상승해 2011년에는 113.2%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외의존도가 높으면 세계 경기 부침에 지나치게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여과 없이 환율에 반영될 수 있다.
둘째, 외환수급의 쏠림 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세계 경기 호조로 경상흑자 규모가 커지면 외화 공급이 늘어나고 이는 국내 수출기업에 호재로 작용해 외국인의 주식자금 유입을 부추긴다. 반대로 수출이 부진하면 외화 공급이 줄어들고 외국인도 주식을 처분하면서 달러 수요를 발생시켜 환율에 상승 탄력을 더한다.
셋째, 헤지 구조의 비대칭도 한몫한다. 수출이 잘 되면 환율 하락 압력이 커지고 수출업체들은 향후 유입될 외화자금에 선물환 매도를 통해 적극적인 환 헤지에 나서는 반면 수입업체들은 결제자금을 미래 시점으로 미뤄 낮은 환율에 결제를 꾀한다. 공급 우위 상황을 더욱 가중시키는 변수다. 어느 시점에 가서 수출이 부진해지면 외화 공급이 줄어들뿐더러 수입업체들이 결제를 위해 외화를 서둘러 매입하면서 수급이 순식간에 뒤집히는 현상이 종종 목격된다.
환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이유
기업을 경영할 때 맞닥뜨리는 위험은 수없이 많다. 환 위험은 수많은 위험요인 중 하나일 뿐이지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경영 위험이다. 환율 변동이 순식간에 기업을 파산으로 내몰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환 위험 관리는 예측할 수 없는 환율 변동에 대비해 해당 기업의 수익이 환율 변동에도 안정적인 흐름을 가져가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환 위험 관리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기업 수익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이 10%가 넘는 기업은 많지 않다. 그런데 환율은 연간 10% 이상의 변동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수출을 통해 이익을 남기기는커녕 오히려 환율에서 손실을 입을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더구나 환율 변동이 기업 전체의 영업이익을 갉아먹어 손익분기점을 넘어설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기업은 환 위험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상장기업이라면 환율 변동에 따른 영업이익의 등락이 주가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영업이익의 높은 변동성은 기업의 신용평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 자금 조달 비용을 키울 수 있다. 따라서 환 위험 관리는 환율 등락으로 인한 영업이익의 불확실성과 높은 변동성을 감소시키는 행위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환 위험 관리 전략
환 위험 관리는 기업 경영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다른 위험에 비해 비교적 관리가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수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환 위험 관리의 첫 단추는 기업의 환율 노출 규모, 즉 환 익스포저(FX Exposure)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다. 표면적 재무제표로는 환율의 영향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우리 회사는 연간 1000만 달러를 수출하니 환율이 100원 하락하면 10억 원의 손실을 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외화부채를 갖고 있거나 원재료를 수입한다면 실제 환율 하락으로 인한 손실은 훨씬 적을 수 있다. 환 익스포저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환율 변동이 우리 기업 이익에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알고 대처할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는 파악된 환 익스포저를 바탕으로 환 관리 목표 및 전략을 세우는 과정이다. 경영학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내부적, 외부적 환 관리 기법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전략을 취하더라도 환율 변화에 영업이익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목표를 충족시키는 일이 필수다. 구체적인 전략은 기업마다 제품 사이클 주기, 환율 변동을 감내할 수 있는 정도, 경쟁사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 전략 시행 후에는 우리 기업의 특성에 이 전략이 적절한지 엄격히 평가해 보다 효율적인 방안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 중에서 가장 냉정하게 실행하기 어려운 과정이 바로 환 헤지의 평가다. 영업이익 방어를 환 헤지 목표로 삼았더라도 막상 헤지하지 않았을 때 유리한 결과가 나오면 환 헤지 필요성에 회의를 느끼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평가 과정에서 냉정함을 잃어버리면 환 헤지는 용두사미가 될 수 있다.
환 관리 관련 실질적 고민들
환 위험 지침서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환 관리 실무자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실질적 고민들을 몇 가지 꺼내보겠다.
100% 환 헤지는 가능할까?
미래 외화현금흐름의 발생 빈도가 적고 현금흐름이 확실하다면 환 헤지는 100% 가능하다.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라면 현금 흐름이 복잡하고 수시로 발생하며 미래 현금흐름이 예상과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미래의 예상 환 익스포저에 대해 100% 헤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올해 현금흐름과 관련해 영업이익 달성에 차질이 없도록 헤지를 마쳤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환율 변동까지 미리 방어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정기간까지의 현금흐름을 방어하고 그 이후에는 변동된 환율에 새롭게 현금흐름을 고정시켜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환 헤지는 원가이익률을 높이는 등 환율 변동에 대처할 시간을 벌어주기 때문에 충분히 가치가 있는 작업이다. 환율 하락이 본격화됐던 2005년 중공업회사의 예를 들어보자. 2005년에는 연초 경영 계획 환율인 1000원에 맞춰 연간 예상 수주물량에 헤지를 했다. 다음 해는 950원에, 그 다음 해는 900원 이상에서 헤지를 완료했다. 2007년 환율이 일시적으로 900원을 하향 돌파하면서 수많은 수출기업들이 가격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 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환 헤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환율이 더 낮아지면서 수익성을 떨어뜨리기는 했다. 하지만 연 평균 환율보다 높은 수준에서 선제적으로 환 헤지를 했기 때문에 환율로 인한 가격경쟁력 저하를 원가 절감, 기술 혁신, 마케팅 등으로 대응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효과를 과소평가할 수 있을까?
헤지 후에 환율이 기업에 유리하게 움직이면?
위의 예처럼 달러 매도 헤지를 했는데 2008년과 같이 환율이 헤지 방향과 거꾸로 움직인다면 기업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동안 해온 헤지는 무용지물일까?
대다수 환 헤지 관련 서적들은 환 헤지는 기회이익을 포기하는 대신 기회손실을 막는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2008년처럼 환율이 급변해 원화가치가 30∼40%나 절하(환율 상승)되는 상황에서 수출업체들이 환 헤지 원칙을 고수하며 기존의 환 헤지 포지션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옳을까? 아무리 헤지를 마쳤더라도 중장기적인 환율 추세 변화에 대응해 환 헤지 비율을 일정 부분 조정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환 헤지 비율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투기로 흐르거나 헤지 환율이 애초보다 불리해질 수 있어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금융시장 정보의 꾸준한 취득과 환율 전문가 육성 또는 외부 전문가의 힘을 빌려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파생상품은 왜 위험한 것으로 인식됐는가?
금융위기 당시 ‘키코(KIKO)’로 통칭되는 옵션형 상품이 기업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어 아직도 많은 기업들이 키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환 헤지의 문제점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 환 헤지 능력이 한 단계 발전해야 했지만 실상은 무엇이 문제였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환 헤지가 죄악시되고 환 헤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어 안타깝다.
키코 사태는 환 헤지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환 헤지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환 헤지는 미래의 환율을 알 수 없으니 계약시점에 미래의 환율을 선물환과 같은 파생상품으로 미리 정해두는 행위다. 하지만 키코 상품은 환율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헤지 효과가 사라지거나 기업이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말하자면 변동성이 낮은 상태로 머물 것에 ‘베팅’하는 상품이다.
금융위기 이후 이런 종류의 투기성 높은 파생상품들이 전혀 통용되지 않고 있어 매우 다행스럽다. 하지만 원화 절상이 진행되는 중에도 수출업체가 기본적인 환 헤지조차 두려워하며 외화를 높게 팔 타이밍만 고심하고 환율이 다시 반등하기만을 기다리는 천수답 같은 행태로 돌아가는 것은 발전이 아닌 퇴보일 뿐이다.
교훈과 현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워야 할 것은 환 헤지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해야 하며 원화 환율의 높은 변동성을 감안할 때 환율 추이에 따라 환 헤지 비율을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작년 말부터 원화 환율이 가파르게 하락한데다 엔-원 환율도 단기간에 급락해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기업들의 어려움이 예상된다. 환 헤지가 환율 변동으로부터 기업들을 100% 지켜줄 수는 없지만 영업이익률을 달성하고 환율 변동에 대처할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각 기업 실정에 맞는 환 헤지 프로세스를 정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정미영 삼성선물 리서치센터장 mymy.jeong@samsung.com
필자는 서울대 불어교육학과와 서강대 경제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내 최초 외환컨설팅회사인 ㈜핀텍을 거쳐 현재 삼성선물에서 외환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리서치센터를 이끌고 있다. 한국거래소, 금융투자협회, 한국무역협회 등에서 환 리스크 관리 및 통화파생상품 전문 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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