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선 단돈 10만 루피, 우리 돈 250만 원이면 4인 가족이 탈 수 있는 승용차를 살 수 있다. 인도의 서민차 ‘나노(Nano)’다. 인도 타타자동차의 회장인 라탄 타타는 2003년 인도 서민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인도의 4인 가족이 스쿠터 한 대에 올라타 이동하는 모습에서 혁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고객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어느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도 주목하지 않은 소득 하위 80%, 즉 피라미드 하부(BOP·Bottom of the Pyramid)라는 틈새를 찾아낸 것이다.
세계의 많은 자동차 전문가들은 타타 회장의 아이디어를 비웃었다. 나노가 기껏해야 ‘지붕과 문이 달린 스쿠터’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5년 후인 2008년 무모한 것처럼 보였던 도전은 현실이 됐다. 타타는 2기통 623㏄에 30마력의 초저가 승용차인 나노를 마침내 선보였다. 그런데 가격만 놓고 보면 ‘BOP의 꿈’이 돼야 할 나노가 최근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8월 한 달 출하된 나노는 1202대에 불과했다. 4월의 1만12대보다 88% 줄어든 것이다. 대기자만 1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잘나가던 나노의 신세가 순식간에 초라해졌다.
전문가들은 인도 소비자에 대한 이해 부족과 안전 문제가 나노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차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사고가 발생하는 등 나노의 안전 문제가 제기돼왔다. 오토바이보다 약간 비싼 돈으로 승용차를 살 수 있다는 마케팅 포인트도 인도 중산층의 반감을 불렀다. 나름 ‘큰돈’을 써가며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자동차’를 탄다는 말을 듣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인도 소비자들은 나노의 비교대상(Reference Point)으로 회사 측이 의도했던 스쿠터보다 글로벌 브랜드의 우수한 소형차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나노의 혁신이 강력한 소비자의 저항에 부닥친 것이다.
BOP 시장에서 품질을 희생하지 않고 가격을 낮추는 일은 어렵다. 타타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 회사는 생산방식과 프로세스 혁신을 통해 가격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엔진을 자동차 뒷좌석에 설치해 공간을 줄이고 엔진을 뒷바퀴와 바로 연결하는 방식과 부품업체들과의 협업으로 값을 10만 루피에 맞출 수 있었다. 하지만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안전 문제와 정교한 마케팅으로 고객들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나노의 날개가 꺾였다고 예단하진 말자. 혁신의 관점에서 타타 회장의 무모한 도전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타타가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다면 실험과 검증 과정을 거치며 BOP 시장에 대한 그들만의 혁신 노하우를 학습하고 축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일도 아니다. 우리에겐 통일이 되면 당장 챙겨야 할 2000만 명 이상의 북녘 BOP 시장이 존재한다. 나노를 외면했던 인도 소비자처럼 그들도 합리적인 가격에 꼭 필요한 품질의 제품을 원할 게 분명하다. 상위 20%의 큰손에만 집중하다가는 ‘아프라시아(아프리카+아시아)’의 BOP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글로벌 기업이 북녘시장을 잠식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할지도 모른다.
저가 이미지를 떼고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시작한 한국 기업에 BOP 시장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낯선 소비자와 시장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숱한 실험과 검증을 통한 긴 학습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실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타타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오히려 부럽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될지도 모른다.
박 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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