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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의 경험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정부는 외환이 바닥나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외화자금을 요청했고, IMF는 자금 지원의 전제조건으로 구조개혁안을 요구했다. 이후 한국경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다. 그 결과 한국 경제 시스템은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해 훨씬 더 투명하고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했다.
외환위기는 한국 기업 경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기업들이 1997년 외환위기를 극복한 뒤 수익성이 대폭 개선되고 국제 경쟁력도 강화됐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이사회 중심의 지배구조 개선이 장점도 많지만 과거 오너 중심의 기업경영 시스템이 가진 과감한 확장 정책을 어렵게 해 성장 동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나치게 투명한 기업지배구조가 성장 동력을 떨어뜨려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력을 3%대로 추락시켰다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환위기를 통해 경험했듯이 과거와 같은 레버리지 극대화 전략에는 기업이 부담하기에 지나치게 과도한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과거 우리나라 기업이 추구했던 레버리지 극대화 경영의 세부전략 메커니즘 및 이러한 경영시스템의 장단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기업이 투명성을 유지하면서도 고용을 제공하고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위험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강의 기적’, 그 빛과 그림자
한국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재벌이라 불리는 기업집단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압축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다. 정부가 계획한 경제성장 정책이 우리경제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한국의 기업집단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 파트너였으며, 빠른 경제성장의 과실을 분배받은 최대 수혜자였다. 한국의 기업집단은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신속하게 몸집을 불리기 위해 자신들이 내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대규모 투자를 외부자금 조달로 충당했다. 당시 한국 자본시장이 성숙하지 않았고 정부는 경제성장을 유인하는 투자에 필요한 자금 배분 의사결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기업들은 투자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분을 정부가 실제로 통제했던 은행을 통한 차입금으로 조달했다.
한국 기업들은 1990년대 세계화에 따른 국경없는 경쟁에 노출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의 정치적인 힘도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급속한 인건비의 상승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 기업들은 경쟁 외국기업들과 비교해 품질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의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 가격을 지속적으로 내리는 가격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 기업들은 평균적으로 두 자리의 금리가 유지됐던 이 시기에 주주들에게 충분한 수익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기업들은 왜 이렇게 낮은 수익성의 문제를 안고 있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기업의 지배구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대부분 대주주가 그룹 경영의 전권을 행사하는 지배구조 체제였다. 대주주는 순환출자 등을 통해 적은 돈으로 거대한 기업을 통제하는 소유구조를 만들어서 기업집단을 경영했다. 적은 지분을 보유한 대주주가 경영권을 행사했던 우리나라 기업은 경영목표를 기업가치의 극대화에 맞추기보다 외형성장을 추구했다. 왜냐하면 과거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적 환경이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보다 외형을 키우는 게 소유경영자의 이익에 더 부합되는 인센티브 구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 패러다임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관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기업성장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설비투자와 이를 기업가치로 연결짓는 기업의 체질이라 할 수 있는 기업지배구조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주의 권리, 이사회의 구성 및 역할 등과 같은 기업내부의 지배구조가 선진화했으며,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시장메커니즘이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를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편으로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우리 기업의 설비투자가 급격히 위축됐고, 기업의 고용 창출능력이 감소해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저하되는 부정적인 영향도 나타났다.
고도 성장기 ‘레버리지 전략의’ 메커니즘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현대자동차, SK이노베이션과 같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한강의 기적을 통해 짧은 시간 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한마디로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레버리지(leverage)란 영어로 지렛대를 뜻한다. 지렛대는 무거운 물건을 들기 위해 막대기의 한쪽을 조금만 움직여도 반대쪽이 많이 움직이는 구조를 갖고 있다. 경제가 고도성장하는 단계에서 기업의 이익이 경제성장률이나 매출증가율보다 몇 배 확대돼 나타나는 현상이 지렛대와 유사하다는 뜻에서 이러한 현상을 레버리지 효과라고 부른다.(그림1) 우리나라 기업은 경영전략, 마케팅, 오퍼레이션, 재무, 인적자원(HR) 분야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전략을 통해 기업의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는 경영전략을 수행했다.
①레버리지 효과 큰 경기민감 산업에 주력 먼저 기업이 속한 산업의 속성이 레버리지 효과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한국경제의 고도 성장기에 우리나라 기업집단이 주력한 산업들을 살펴보면 기업들이 경영전략 차원에서 어떻게 레버리지 극대화를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기업집단은 경기변동에 민감하게 매출이 변동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을 주 사업영역으로 삼았다. 우리 경제의 간판 기업들이 모두 자동차, 전자, 철강, 조선, 화학 등의 산업에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경기가 변동할 때 경기변동보다 더 큰 폭으로 매출이 변동하는 산업들이다. 따라서 주식시장에서는 이들 산업에 속한 기업들을 경기관련주라고 부른다.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다른 조건이 동일할 때 매출변동이 커야 하는데, 경기관련주로 불리는 기업들이 호경기에 매출 성장률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은 전략적으로 사업포트폴리오를 이러한 산업 중심으로 구성했던 것이다.
②외형성장 중심의 왜곡된 경영목표와 관리시스템 두 번째로 매출 극대화와 같은 외형성장을 추구하는 기업의 왜곡된 경영목표와 관리시스템이 기업의 레버리지 극대화 전략을 증폭시키는 데 일정 역할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레버리지 효과라고 불리는, 경기의 변동이 기업 이익의 변동에 미치는 영향은 매출이라는 매개변수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즉, 경기가 나아지면 기업 매출이 증가하고, 이 매출 증가가 이익 증가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의 경영목표가 매출과 같은 외형 극대화에 있을 때 이익의 극대화에 있을 때보다 경기변동에 따른 매출 변동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투하자본에 대한 기업 전체의 수익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매출에 대한 이익률만으로 전년대비 이익 증가율을 산출해 경영성과를 평가하는 우리나라 기업에서는 기업의 레버리지 효과가 더 확대돼 나타나는 문제가 내재돼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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