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온 깨달음, 그 뒤에 남는 것은...

51호 (2010년 2월 Issue 2)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그러니까 1981년 1월 20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조계종의 새로운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지금은 한국 현대 불교계의 전설이 되어버린 성철의 추대식은 과거 다른 추대식과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종정으로 추대되던 날 성철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사자후를 토했다. 과거 동아시아의 많은 선승(禪僧)들과 마찬가지로 성철은 세계와 삶에 대한 절대 긍정을 표현했다. 이것은 물론 성철 본인의 마음이 거울처럼 맑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확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잘 알다시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성철은 장좌불와(長坐不臥), 즉 결코 눕지 않는 꼿꼿한 자세로 치열한 수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얼음을 녹일 정도의 치열함 속에서 그는 마침내 마음과 세계에 대한 진실, 즉 산을 산으로 물을 물로 긍정하는 마음을 체득했다.

그렇지만 당시 누구도 이러한 사자후 속에서 성철이 앞으로 전개할 행보를 짐작하지 못했다. 성철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성철은 한국 조계종을 반석에 올려놓은 인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철이 표적으로 삼은 인물은 그가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권위를 가진 고려 시대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었다. 성철은 자신의 뿌리에 해당하는 지눌을 왜 공격했을까? 성철은 지눌이 견성성불(見性成佛), 혹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슬로건으로 하는 선불교의 정신을 어긴 것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치열한 참선을 통해 자성청정심, 즉 ‘선천적으로 맑고 깨끗한 자신의 마음’을 직관하면 부처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여기에는 문자로 표현되는 일체의 이론적 가르침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반면 성철의 지적처럼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수행론을 제안했던 스님이다. 문제는 지눌이 돈오(頓悟)를 성철처럼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지눌에게 있어 돈오는 불립문자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게 인간 마음과 수행의 구조에 대한 이론적 통찰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지눌도 성철과 마찬가지로 선불교에 속하는 스님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불립문자로 상징되는 이론적 통찰이 선종(禪宗)이 아니라 교종(敎宗)의 핵심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여 년 뒤 자신의 후배로부터 공격을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가 돈오를 강조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변명을 한번 직접 들어보자.
 
내가 살펴보니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문자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곧장 마음을 서로 전하는 것만을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정신이 아득하여 앉으면 졸기만 하고 간혹 이해나 실천에서 마음을 잃고 혼란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 닦는 사람들이 반드시 확실한 이론적 가르침에 의지하여 깨달음[悟]과 수양[修]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명히 가려서 자기의 마음을 반성해보면 헛되게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그렇다. 지눌의 눈에는 당시 고려의 선승들은 자신들이 왜 치열하게 정진해야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맹목적인 수행만을 일삼고 있는 일종의 원숭이들로 보였다. 수행을 하기 전에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바로 이것이 지눌의 문제의식이었다. 왜 우리는 고통에 빠져 사는가? 왜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어떻게 하면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가? 그리고 고통이 해소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게 될까? 우리는 먼저 자신의 실존적 상태나 수행의 방향을 지적으로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 지눌이 말한 돈오의 참된 의미였다. 오직 이런 깨달음을 기초로 확고히 뿌리를 내릴 때에만 수행은 길을 잃지 않고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가 돈오 뒤에 점수(漸修)를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비록 뒤에 수양을 남겨두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먼저 단박에 깨달았기 때문에, 악을 끊는 경우 끊기는 하지만 끊음이 없고 선을 닦는 경우도 닦기는 하지만 닦음이 없으니, 이것이 곧 참된 닦음이요 참된 끊음이다. - <보조법어(普照法語)>
 
지눌에게서 점수는 ‘악을 끊는 경우 끊기는 하지만 끊음이 없고 선을 닦는 경우도 닦기는 하지만 닦음이 없는’ 점진적인 수행이다. 여기서 악은 마음을 고통으로 몰고 가는 망념이라면, 선은 본래 깨끗한 우리의 마음을 말한다. 망념에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끊으려는 수행을 해도 이론적으로는 끊을 것이 없고,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원래 깨끗하기 때문에 그것을 닦는 수행도 이론적으로는 닦을 것이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자. 망념은 실체가 없지만 실제로 작동하고 있고, 우리의 깨끗한 마음은 원래부터 존재하지만 실제로 가리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점진적으로 망념을 끊어서 깨끗한 우리 마음을 드러내는 수행을 치열하게 진행해야만 한다. 지눌에 따르면 마음과 수행에 대한 이론적 전망을 획득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해탈이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눌이 이론(theoria)과 실천(praxis) 사이의 간극을 성찰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일상적인 경험만 돌아보아도 우리는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너무나 넓은 간극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등산이 좋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렇지만 직접 산에 오르면 우리의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다. 아니 이런 상황이라면 어쨌든 소망스러운 일이다. 등산의 필요성을 생각만 하고 직접 장비를 챙겨 떠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지눌이 이야기한 점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규칙적으로 치열하게 산에 오르면, 말랐던 다리에는 산에 맞는 근육이 생기고 우리의 심장은 점점 더 부드러움을 찾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최소한 등산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건너뛰어 버렸다.
 
바로 여기에 성철이 쉽게 흔들 수 없는 지눌의 굳건함이 있다. 지적인 통찰만으로 우리의 몸과 관련한 해묵은 습관과 정서가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을까? 햇빛이 비춘다고 해서, 바로 그 순간 쌓였던 모든 눈들이 일순간에 사라질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불립문자를 외치며 편하게 살 수 있는 평범한 선승의 길을 과감히 버리고, 지눌은 무수한 오해와 시비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범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성철의 아우라에 눈이 멀지 말고, 깨달음과 자유의 길을 가려는 우리를 위해 돈오점수의 가르침을 속삭였던 지눌의 속내를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앎과 삶, 그리고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의 멘토로서는 원론적인 가르침을 피력했던 성철보다는 삶의 굴곡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성찰했던 지눌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편집자주 21세기 초경쟁 시대에 인문학적 상상력이 경영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CEO를 위한 인문고전 강독’ 코너를 통해 동서고금의 고전에 담긴 핵심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사상과 지혜의 뿌리가 된 인문학 분야의 고전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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