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역사적 인물은 광개토대왕이다. 우리 전쟁사에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장군 등 거대한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거둔 인물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침략자를 격퇴하는 수비자의 입장에서의 승리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반면 만주 벌판을 횡단해 만리장성을 돌파하고, 북쪽으로는 광활한 몽골 초원의 어귀까지 진출한 광개토대왕과 고구려군의 모습은 통쾌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고구려군의 중추 중장기병
이 고구려군의 중추를 이뤘던 군대가 중장기병이다. 중장기병은 말 그대로 말과 사람이 중장갑을 한 기병이다. 말 위에 탄 기사는 투구를 쓰고 전신을 갑옷으로 감싼다. 고분벽화나 발굴 유물을 보면, 고구려의 기사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작은 철판 조각과 가죽을 덧대어 만든 미늘을 이어붙인 ‘미늘갑옷’을 애용했다. 이 갑옷은 철판 1개로 이뤄진 판금갑옷보다 약했지만, 찌르는 힘에는 잘 버텨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화살에 대한 대응력이 뛰어났다. 실제로 미늘갑옷에 활을 쏘고 고속 촬영으로 관측해보면, 화살이 갑옷에 부딪힐 때 갑옷이 출렁거리면서 화살을 튕겨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튕겨내는 힘과 철판 및 가죽의 방호력으로 방탄 작용이 일어난다. 전쟁에서 화살이 정확히 수직으로 갑옷과 부딪힐 확률은 극히 드물고, 대부분 사선이나 움직이는 상태에서 부딪히기 때문에 미늘갑옷의 방탄력은 더욱 커진다.
중장기병은 이 갑옷으로 전신을 가렸다. 소매는 손목까지 오고, 바지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보병은 이런 전신 갑옷을 입을 수 없었다. 갑옷이 비싸기도 했지만, 보병이 이런 갑옷을 입으면 무거워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건강한 다리로 뛰어다녀야 하는 보병은 갑옷을 입더라도 윗옷만 착용해야 했다.
중장기병은 갑옷 외에도 투구, 방패, 목 가리개도 착용했다. 박물관의 전시 용품으로 인기인 통철판으로 만든 판금갑옷을 보자. 몸통만 가리는 상체용이 드물게 발굴되고 있다. 벽화에서도 보기 힘든 걸로 봐서 지휘관급 장수들이나 입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 갑옷을 착용할 때도 안에 미늘갑옷이나 특별한 가죽옷 등을 덧대고 입어야 했다. 판금갑옷은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고대의 제철기술로는 얇고 강력한 특수강을 제작하기 어려웠다. 판금갑옷만으로는 화살이나 창을 제대로 막을 수가 없었다. 또 열과 추위에 약하고, 창이나 화살에 맞아 안으로 찌그러들면 오히려 흉기로 돌변했다. 이 갑옷을 입은 채로 넘어지거나 말에서 떨어지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날 자동차의 에어백처럼 완충 작용을 해줄 속옷이 반드시 필요했다.
발에는 스파이크가 달린 쇠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부장품 중에서 이런 신발을 이따금 볼 수 있다. 많은 분들이 저런 신발을 정말로 신었을까 의문을 던지곤 하는데, 실생활에서는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는 기사들의 필수품이었다. 보병과 접근전을 벌일 때 말에 올라탄 기사의 최대 약점이 하체와 발이기 때문이다.
말도 미늘갑옷으로 된 전신 갑옷을 입었다. 이 갑옷은 머리에서 몸 전체를 자루처럼 덮어 거의 말의 무릎까지 내려왔다. 말의 머리에 투구를 씌우거나 미늘갑옷을 입힐 수는 없으므로 판금으로 된 안면갑을 만들어 씌웠다. 방호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 벌이 아닌 여러 벌을 입히기도 했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군대는 기병의 속도를 포기하는 대신 중장갑에 의존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말에 갑옷을 세 벌까지 겹쳐서 입혔다고 한다.
이렇게 탄생한 중장기병대는 강력하고 중후할 뿐 아니라 멋있었다. 적에게는 강력한 두려움을, 지휘관에게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중장기병에 대한 오해와 진실
그러나 때때로 이 영감이 너무 강력해 이성을 마비시킨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에 대해 몇 가지 심각한 오해가 돌아다닌다. 대표적인 오류가 중장기병이 무적, 최강의 부대라는 생각이다. 한술 더 떠 중장기병이 우리 민족에게만 있었다는, 그것도 신라와 백제에는 없었고 고구려에만 있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만주 평원과 달리 한반도에는 산이 많아 기병을 활용하기 어려우므로 신라나 백제는 이런 병력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대로라면 고구려는 고대 사회에서 무적의 탱크 부대를 보유한 유일한 군대였다.
하지만 이는 아주 잘못된 오해다. 중장기병은 세계 어느 나라 군대에나 있었다. 고구려군과 싸웠던 선비족이나 중국의 군대에도, 막강한 보병에 가려 기병의 존재감조차 미미해진 로마군에도 중장기병은 있었다. 영화에는 늘 털모자를 쓰고 모피나 가죽조끼만 걸치고 다니는 몽골 기마부대도 중장기병을 운용했다. 당연히 신라와 백제에도 있었다. 평원은 고사하고 100m도 안 되는 공간이나 비탈에서도 기병의 용도는 무궁무진했다.
고구려의 중장기병이 무적이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중장기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그것이 최강이냐 아니냐를 논해서는 안 된다. 중장기병의 기능과 역할이 무엇이냐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중장기병의 장점은 방호력과 돌파력이다. 이 장점을 활용해 적의 대형과 방어벽에 구멍을 내는 게 중장기병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탱크와 비슷하다. 제1차 세계대전 말에 처음 탱크가 등장한 이유도 철조망과 참호로 뒤엉킨 지루한 진지전을 타개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