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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과 영화는 거듭나기의 산물”

신성미 | 38호 (2009년 8월 Issue 1)
초창기의 마구잡이 영화 촬영
젊은 시절에 영화를 시작해 제가 지금까지 도태되지 않고 영화를 업으로 삼고 있다는 게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꿈을 심어주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우연한 계기로 영화감독이 됐습니다. 제가 한국전쟁 때 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가출을 했어요. 저는 좌익 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집안이 좌익 운동을 해서 연좌제에 걸리고 배운 것도 없어 취직이 어려웠죠. 그래서 가출을 해서 부산 노동판에서 일했는데, 이북에서 피난 온 분들을 알게 됐어요. 이분들이 서울로 올라가 <장화홍련전>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면서 잔심부름을 해달라고 저를 부르더라고요. 그렇게 우연히 영화계에 입문했지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전남 장성에는 극장이 없었기 때문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당연히 영화를 통해 꿈을 실현한다는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지요. 하지만 우연히 영화 일을 하다 보니 제가 아주 좋아하는 일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게 행복이라고 한다면 저는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까지 영화를 100편 제작했습니다. 영화 1편을 제작하는 데 보통 1, 2년, 길게는 3년이 걸립니다. 저는 100편을 했으니까 제가 한 살부터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도 이미 100살이 됐어야 할 만큼 많은 작품을 했죠. 1961년에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이후 10여 년 동안 영화 50여 편을 찍었습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에는 1년에 영화를 5편 정도 찍은 셈이에요. 흥행을 목적으로 한 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었지요. 영화들이 흥행이 좀 되다 보니 제작자들로부터 주문이 밀려드는 거예요. 그래서 영화 찍는 기계처럼 50여 편을 ‘남작(濫作)’한 것입니다. 어느 날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1960년대에 나온 저질 액션물이 상영되고 있더라고요. 언제 본 것도 같고 해서 ‘저게 혹시 내가 찍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고 보니 실제로 제가 찍은 영화더라고요.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그 영화 제목이 뭔지, 어떤 촬영기사와 함께 일했는지, 음악은 누가 했는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한국 영화’를 꿈꾸다
 
 

 
당시 영화를 찍고 나면 조금씩 받은 돈으로 소주를 마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20세 때 이미 수전증이 생길 정도였어요. 영화 찍고 술 마시고 그렇게 살다 보니 좋은 영화를 남기자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죠. 말하자면 인생을 휴지 쓰듯이 쓰고 있었죠.
 
그래도 꿈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리우드 수준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었죠. 그런데 제가 미국 영화 아류라도 찍고자 했던 게 터무니없는 꿈이더라고요. 우선 우리나라 영화 제작비는 당시 미국의 100분의 1, 1000분의 1 수준밖에 안 됐습니다. 미국에는 훌륭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많고 최신 기술로 영화를 찍고 있는데,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장비로 찍고 있었죠. 할리우드 수준의 영화를 만든다는 게 웃기는 얘기란 걸 안 겁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한 끝에 1960년대 후반 ‘한국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한국 영화를 만들면 개성 있는 영화라는 평가라도 들을 게 아니냐는 생각이었어요. 어떤 영화가 한국 영화냐 하는 문제에 부딪혔죠. 우선 제가 10여 년 동안 50여 편을 찍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하고, 내가 살아온 직·간접적 체험의 세계를 영화에 담아야 되고, 무엇보다도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5·16 쿠데타를 겪은 수난의 세월을 거짓 없이 담아내자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미 삼류 감독으로 틀이 박힌 제가 제법 진지한 영화를 하려고 하자 어떤 제작자도 나서질 않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러 영화를 겹치기 촬영할 정도로 바쁜 세월을 보냈는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삼류 감독의 인기라도 팔아먹자는 생각으로 1970년대 초 <잡초>라는 영화를 찍었어요. 일정을 못 맞추더라도 제가 영화 속에 나타내고 싶은 것들을 더 충실히 하려다 보니 제작비가 치솟았습니다. 결국 망했어요. 관객을 끌어모은다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이 일이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그동안 액션영화만 찍는 삼류 감독이었는데, 이제 제법 진지한 영화도 찍는 감독이라는 것을 영화계에 인식시킨 거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사정권의 유신 통치 때문에 한국 영화는 최악의 암흑기를 맞았습니다. 그때 정권의 통제와 검열 탓에 한국 영화는 인기가 없었지요. 저는 그때 10여 년간 ‘체질 개선’을 했어요. 어설픈 외국 영화 모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미국 영화는 기본적으로 서양적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 스토리의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빠릅니다. 영화를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유장하고 감정이 잘 살도록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을 하다 보니 제가 영화에 담고자 하는 주제는 잘 살아 있는데 영화가 재미가 없더라고요. 뼈다귀만 엉성하니 굴러가고 살은 없는 식이었죠. 물론 1970년대에 흥행을 기대하고서 영화를 찍은 건 아니지만, 관객이 보통 몇 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흥행 성적은 참담했습니다. 임권택이라는 흥행 감독으로서의 위상을 전혀 찾을 길이 없을 만큼 입장이 우습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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