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를 통해 본 세상 49
Article at a Glance – 재무회계
현대건설이 매물로 나온 후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가 각각 입찰에 뛰어들어 경쟁을 벌였다. 여러 쟁점들 중에서도 ‘자금조달의 적정성’이라는 매각 조건이 논란을 불렀다. 현대그룹이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서 빌렸다는 1조2000억 원이 어떤 성격의 자금인지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현대그룹은 더 많은 인수금액을 써낸 덕분에 최초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됐으나 이 조건에 발목을 붙잡혀 결국 현대건설 인수에 실패했다. |
편집자주
최종학 서울대 교수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회계학을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회계를 통해 본 세상’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이 회계를 좀 더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비즈니스에 잘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왜 현대자동차가 현대건설 인수에 성공했을까?
현대건설의 인수합병이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월 마무리됐다. 2010년 초부터 범(凡)현대가의 일원인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현대증권(이하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이 원래 고(故) 정몽헌 회장이 경영하던 회사인 만큼 되찾아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현대자동차나 현대자동차를 지원하던 현대중공업에서는 현대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서로 광고전을 벌였다.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누가 계승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까지 벌인 것이다.
현대건설 매각과정은 아주 복잡했다. 현대건설을 소유하던 주주협의회는 현대건설 주식 약 3900만 주, 발행주식 대비 약 35%에 대한 매각공고를 냈다. 처음에는 5조5000억 원의 인수금액을 제시한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듯했다. 현대그룹은 2010년 11월 있었던 입찰에서 1순위를 차지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현대차는 5조1000억 원의 인수금액을 제시하면서 2위로 밀렸다. 처음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을 때 현대상선 각 계열사의 주가가 일제히 폭락했다. 계열사 노조까지 반대성명을 낼 정도였다. 현대건설 노조도 적극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주가가 떨어진 것은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과다한 자금을 동원한 M&A 이후 인수자가 어려움을 겪고 부실해지는 이른바 ‘승자의 저주’를 염려한 탓이 컸다. 이런 시장의 의심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지만 소속사 노조까지도 강한 반대성명을 낸 것을 보면 현대그룹 내에서도 반대의견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중에 주주협의회가 현대그룹에서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원래 현대건설의 인수조건에는 ‘자금조달의 적정성’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재무제표상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보유한 현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그룹은 최소 4조 원 이상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할 것으로 예측됐다. 인수가 결정된 후 예측과는 달리 현대그룹이 생각보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서 자금조달에 별다른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런데 입찰서류에 표시된 보유자금 중 이상한 내역이 발견됐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 현지 법인이 예치해뒀다는 자금 1조2000억 원이 문제로 불거졌다. 전년도 말 자산규모가 33억 원, 매출액 1억 원 미만인 작은 현지법원이 1조2000억 원이나 되는 막대한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재무적 투자자로 참여한 동양증권에서 투자하기로 한 8000억 원에 대한 논란도 동시에 벌어졌다.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가 최초로 흘러나온 곳은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증권 노조였다. 현대증권 노조가 자금원을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티시스은행 예치자금을 둘러싼 논란
곧이어 현대건설의 주주협의회도 나티시스은행 예치자금이 어떻게 마련된 것인지 밝히라고 현대그룹 측에 요구했다. 현대자동차도 이 자금 출처를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왔다. 그러자 현대그룹은 대출한 자금이라며 대출확인서를 제출했다. 채권단은 ‘자금조달의 적정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어떤 조건의 대출인지 파악해야 하니 대출계약서를 제출하라고 다시 요구했다. 현대그룹은 채권단의 요청을 거부하고 입찰에서 1순위를 얻었으니 계약대로 현대건설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현대그룹에 대해 유언비어를 유포한다며 현대자동차 몇몇 임원들에 대한 소송도 제기했다.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다.
주주협의회는 만약 이 돈이 현대그룹 계열사의 자산이나 주식을 담보로 일시적으로 빌린 것이거나 현대건설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대출조건을 확인해야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계열사 자산이나 주식을 담보로 빌린 돈이라면 얼마나 담보로 제공했는지가 현대그룹 계열사들의 존망에 영향을 줄 수 있고 인수할 현대건설의 주식이나 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이라면 국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LBO(Leveraged Buyout)로서 불법 거래가 된다.1 주주협의회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현대그룹은 대출확인서만 제출했을 뿐 계약서 제공은 계속 거부했다.
그러던 가운데 주주협의회 사이에서 묘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최대주주인 외환은행은 계약대로 현대그룹에 현대건설을 팔고 싶어 했다. 반면 2대 주주인 정책금융공사는 자금의 원천을 조사해 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현대건설의 소유주는 외환은행 24.99%, 정책금융공사 22.48%, 우리은행 21.37%, 국민은행 10.21%, 신한은행 8.22% 등으로 분산돼 있었다. 서로 입장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현대건설의 최대주주이자 매각 주관은행인 외환은행이 현대그룹과의 주식매각 양해각서(MOU)를 다른 은행들의 동의 없이 단독으로 체결했다. 2010년 11월29일의 일이다. 현대건설을 현대그룹에 넘기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그러자 정책금융공사를 비롯한 3, 4, 5대 주주가 외환은행의 행동에 일제히 반발했다. 현대자동차는 MOU 체결을 주도한 외환은행 실무자를 입찰 방해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법인 명의의 외환은행 계좌를 폐쇄하고 자금을 인출하는 방식으로 외환은행을 압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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