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3.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 스토리

남과 다른 것을 팔 수 없으면
같은 것을 다르게 팔아야

290호 (2020년 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경기도 광교에 위치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은 상점 주인의 오랜 경험과 라이프스타일, 영감을 담은 신개념 콘셉트 스토어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국내 PR 회사 프레인글로벌의 창업자인 여준영 대표가 본인의 열정과 비전을 담아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스트롤’이 구현하는 콘셉트 스토어의 존재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매장은 상점이 아니라 ‘미디어’가 돼야 한다. 손님이 물건을 사지 않아도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2. 희귀하거나 로망에 가까운, 하나를 갖고 있어도 오래 만족할 수 있는 가치를 제안해야 한다.
3. 상품에 스토리를 담거나 디자인이나 용도를 변형시키는 등 다른 매장에서는 찾을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상품을 제안해야 한다.



“미친 거 아냐?”

2018년 초, 부동산 디벨로퍼인 네오밸류(NeoValue)의 손지호 대표1 로부터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그것도 광교에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다. 여성 소비자들의 주도로 도심과 온라인 중심의 소비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 그 정반대 편에 있는 세 가지 요소, ‘오프라인, 비(非)서울 지역, 남자’를 묶어서 오프라인 매장을 열어 보라는 주문이었다.

어려운 숙제를 받은 후 몇 달간 여러 도시의 리테일 매장을 돌아다녔는데 잘되는 곳이 거의 없었다. 가로수길에서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매장은 애플 숍과 메종키츠네(Maison Kitsune) 카페, 딱 두 곳뿐이었다. 후자가 F&B를 같이하는 곳임을 감안하면 애플 같은 대형 브랜드 숍 말고 사람을 끌어모은 순수 리테일 숍은 한 곳도 없었다. 서울시내도 이런 마당에 광교에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 매장이 잘될 리가 없었다. 손 대표에게 거절하고 또 거절했으나 긴 설득에 넘어갔다. 결과적으로는 1년여간의 고민 끝에 ‘스트롤(STROL)’을 열었다. 나중에 꺼내 들 이 말 한마디 가슴에 품고.

“거봐,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필자는 ‘내가 운영하는 오프라인 매장의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남자인 나는 중독에 가깝게 이것저것을 사 모으는 자칭 소비의 왕이다. 나의 소비 경험을 감안했을 때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이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가치는 ‘경험’과 ‘공간’이다. 그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맥락 있는 취향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험, 취향, 맥락, 제안, 공간 이 5가지 요소를 매장의 여러 활동, 즉 상품 소싱, 디스플레이, 스태프의 태도 등 고객에게 다가가는 방식뿐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기준으로 정했다. 예컨대, 브랜드에 입점을 제안할 때도 흔히 쓰는 파워포인트 제안서 대신 우리의 가치를 녹인 레트로 뷰어를 해외에서 주문 제작해 브랜드들에 보냈다. 브랜드 담당자들은 레트로 뷰어와 필름 슬라이드로 스트롤의 정체성을 느끼는 새로운 ‘경험’을 신선하게 여겼고 대부분 우리의 제안에 흔쾌히 호응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좋은 브랜드를 유치하는 일이었는데 덕분에 수월하게 해결했다.

온라인에서 상품이 저렴한 이유는 매장 유지비용이 없고 인건비 등 제품 단위당 제비용이 싸기 때문이다. 최근 배송비 부담이 커지긴 했지만 공급자 입장에서 절약되는 부분이 분명하다. 그래서 오프라인은 온라인보다 비싼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공급자 입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매장까지 걸어가면 시간이, 차를 타고 가면 기름과 시간이, 어떻게 가든 이런저런 수고가 드는데, 어렵게 가서 사면서 더 비싸게 사는 건 어이없는 일이다. 사는 쪽 입장에선 오프라인이 더 싸야 맞는 것이다. 아니라면 다른 반대급부가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오프라인에만 한정적(exclusive)인 상품을 팔거나, 매장을 둘러보는 즐거움이 있거나, 서비스가 인상적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온라인으로 클릭 결제하면 더 저렴한 데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매장을 가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오프라인 매장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 이유를 잘 준비하는 것이 매장 론칭의 목표가 됐다. 매장 이름을 고를 때 여러 후보 중에 스트롤(STROL), 즉, ‘산책(stroll)’이란 이름을 정한 것도 ‘우리는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할 것’이라고 선언하기 위해서였다. 산책은 오프라인의 특권이다. 온라인 스토어는 아예 열지 않기로 하고 홈페이지 첫 화면에서부터 배수진을 쳤다.



“우리는 오프라인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라서 이곳에선 물건을 팔지 않습니다.”

2019년 5월 광교 앨리웨이에 오픈한 스트롤은 남자들을 위한 아지트 공간이자, 다른 어디에도 없는, 하나를 사도 후회가 남지 않을 제품을 선별해 제안하겠다는 필자의 취향과 의지가 담긴 편집숍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콘셉트의 오프라인 매장을 만들기까지 필자의 고민과 여정을 본격적으로 공유한다.


1. 취향: 매장이 곧 미디어

벤치마킹할 만한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을 찾아다니면서 두 가지 질문에 맞닥뜨렸다. 첫 번째 질문은 “왜 라이프스타일은 없고 패션만 있는가?”였다. 패션이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는 맞지만 라이프스타일이 곧 패션은 아니다. 라이프스타일은 말 그대로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질문은 “(큐레이션을 통해 좋은 물건을 모아놓은) 셀렉트 매장을 방문해도 왜 여전히 선택하는 것은 어려울까?”였다. 아이템별로 상품 종류가 많다 보니 그 안에서 소비자는 뭘 살지를 또 고민해야 한다. 필자가 생각한 대안은 패션의 비중을 줄이고, 카테고리별로 엄선한 단 하나의 제품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편집숍에 테넌트(입주할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방식을 모델링했다. 면세점처럼 브랜드 단위로 초대해 섹션을 구성하는 방식과 좋은 제품을 하나하나 선별하는 방식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도 중요한 결정이었다. 전자는 편한 반면 개성이 없고, 후자는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두 방식을 양극으로 놓고 그 사이에 놓인 여러 방식을 시뮬레이션해 나갔다.

최종적으로 스트롤의 정체성을 숍이 아닌 ‘미디어’로 정의했다. 지면이나 화면이 아니라 실제 공간을 활용하는 미디어란 뜻이다. 그냥 상점이라면 손님이 오래 둘러보고 나가면 김이 새겠지만 미디어로서의 숍은 손님이 오래 둘러보는 행위 자체가 고마운 일이 된다. 상점에서 컵을 팔면 손님이 그 컵을 사는 것으로 관계가 일단락된다. 하지만 미디어로 존재하면 손님이 컵을 사고 나면 컵이 있던 그 자리에 또 다른 어떤 것이 놓이게 될지 기대하게 된다. 제품을 소개하는 방식을 매거진과 전시회의 중간쯤으로 설정함으로써 남다름을 추구하고 싶었다. 매거진처럼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가 하면, 전시회처럼 하나의 작품과 깊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랐다. 스트롤이 특별한 미디어로 취향이 맞는 소비자들에게 인정받게 된다면 매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또 브랜드들이 ‘우리도 스트롤에서 저런 방식으로 다뤄줬으면 좋겠다’고 찾아오게 될 것을 기대했다.

DBR mini box I: 매장 스태프는 ‘과묵한 도슨트’

스트롤의 매장 직원은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수동적인 도슨트’가 돼야 한다. 필자는 쇼핑할 때 내가 먼저 묻기 전에 와서 도와주거나 추천해줘서 부담스러울 때가 많았다. 입어보면 맘에 안 들어도 고생시킨 게 미안해서 사는 편이다. 자유롭게 보고 싶은데 직원이 말을 걸면 ‘둘러보기’가 편치 않다. 그냥 빨리 뭔가를 사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 언제라도 내가 부르면 올 준비 태세로 나를 보는 그 시선조차 부담이 된다. 직원들이 으레 묻는 “특별히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라는 말도 그 의도와 달리 천천히 구경하려는 손님에겐 매우 불편한 말이다. 모든 사람이 필자 같지는 않겠지만 나 같은 사람이 편하게 쇼핑하게 하고 싶어서 ‘과묵한 도슨트’ ‘수동적인 도슨트’를 스트롤 매장 직원들의 아이덴티티로 못 박고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묻기 전엔 네가 없는 것처럼 있어라. 하지만 물어보면 도슨트 수준의 엄청난 설명을 하라. 그러기 위해 공부하라”고 주문했다.

오픈 첫날, 직원들은 매장 한가운데에 서서 손님을 정성껏 맞이하겠다는 밝은 표정으로 대기했다. 하지만 제발 그러지 말고, 누가 오든 상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고 요청했다. 직원들이 충분히 ‘수동적’일 수 있도록 두 가지 장치를 했다. 먼저, 손님들이 구태여 직원들을 부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설명을 상품 곁에 적어 두고 고객들이 직원이 아닌 ‘제품’과 대화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일단 누군가 직원을 부른다면 최대한 잘 설명하라고 했다. 단골에게는 쿠폰도 주고 필요시 할인도 해주는 권한을 필자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발휘하라고 주문했다. 스트롤 제품에 설명이 많은 이유는 필자가 이같이 직원의 역할을 정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신기하게도 매장 직원들이 친절하다는 칭찬을 종종 받는다. 과묵하고, 수줍고, 수동적인 사람이 친절하긴 어려운데, 친절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놀랍다.


2. 가치 제안: 하나를 사도 오래 지속되는

필자는 수많은 소비 실패를 경험했다. 무얼 살까 고민한 다음 물건을 사더라도 금세 질리거나, 고장 나거나, 더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후회를 하고 새로운 물건을 또 사야 할지 고민한다. 그렇다면 이미 산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또 고민한다. 결국 새 물건을 산다. 하지만 취향과 철학이 있는 사람들의 소비 프로세스는 다르다. 이들은 물건을 사고, 오랫동안 행복하게 사용한다. 거기서 끝이다. 필자는 수많은 소비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남자들에게 아주 오랜 시간 쓸 수 있는 상품을 제안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가치를 아래와 같은 카테고리로 구체화하고 MD들에게 그 카테고리에 하나라도 해당하지 않는 상품이라면 아무리 인기가 높아도 들이지 말라고 주문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물건’을 가져다 놓는 대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물건’을 가져다 놓는 것은 굉장한 모험이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치는 좋은 것이 아니라 희귀한 것(rarity)으로부터

일본의 어느 유명한 중고 숍에서 상품 태그에 출시 가격과 중고 판매 가격을 같이 적어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몇십 년 된 에르메스와 루이비통 상품이 출시 가격의 반 정도의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저렇게 낡았는데도 불구하고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절반의 가치가 살아 남아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옆에 걸려 있던 슈프림(Supreme) 후드 셔츠에는 ‘출시 가격: 40만 원, 중고 판매 가격: 150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희귀한 상품은 희귀함 그 자체에서 존재 이유를 갖고 가치를 높인다. 스트롤도 희소성이라는 가치를 제안하기 위해 수시로 작가들과 협업하고 그들의 작업을 상품화해서 선보이고 있다. 오픈 작가로 선전된 옥승철 작가는 부조와 조각 등 그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작품을 스트롤에 선보였다. 1965년부터 2대에 걸쳐 빈티지 시계를 제작하는 ‘용정’의 컬렉션 또한 용정 본점 외에 스트롤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템이다. 뉴욕에서 소싱한 핸드메이드 슈즈 브랜드 ‘파이트(FEIT)’는 친환경 공법과 소재로 장인들이 직접 손으로 만드는 상품으로 유명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가치는 모델당 단 60개만 한정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싼 쪽에서 조금 더 꿈 쪽으로: 리처블 로망

생각해보면 살면서 같은 카테고리에서 두 개 이상 필요한 물건은 별로 없다. 하나만 있어도 괜찮다면 내 기준에서 제일 좋은 것보다 실제 조금 더 좋은 물건을 사야 한다. 이런 물건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과 도저히 갖기 힘든 로망 사이에 놓여 있다. 많은 사람이 로망을 포기하고 쉽게 살 수 있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우리가 그저 그런 물건을 사고 후회하는 이유 중 하나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로망에 가까운 지점에서 상품을 선택해 오래 곁에 두길 바라고, 그 지점을 ‘리처블 로망(reachable roman)’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카메라는 라이카(Leica), 자전거는 브롬톤(Brompton), 오디오는 오드(ODE) 컬렉션을 각각의 카테고리에서 유일한 선택지로 입점시켰다. 이보다 저렴하고 합리적인 브랜드 제품들은 당연히 많다. 하지만 경험상 당장 살 수 있는 카메라, 자전거, 오디오를 사서 끝내 만족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후회하거나 업그레이드를 하게 되는데 그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제안을 하기로 했다. 물론 우리가 선택한 것들보다 더 하이엔드 제품들도 있지만 그 로망에 가기 전까지 그에 가깝게(reachable) 다가가라고 제안한 것이다.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들

예전에 방문한 스칸디나비아 친환경 숍에는 플라스틱 물품이 놓여 있었다. 왜 플라스틱이 친환경이냐고 묻자 점원이 말했다. “우리는 이 제품을 정말 ‘잘’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이걸 사면 버리고 다시 살 일이 없어요. 평생 이 제품으로 인한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친환경은 무엇으로 만드는지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래 쓸 수 있으면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쓰레기로 가지 않으니 환경에 비교적 도움이 된다는 얘기였다. 스트롤도 오래 쓸 수 없는 상품은 최대한 배제하기로 했다. 포틀랜드의 친환경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나우(Nau)와 함께 페트병에서 추출한 재생 소재로 만든 스웨트셔츠는 옷에 달린 태그에 이와 같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두 브랜드의 생각을 텍스트로 넣었다. 그리고 보통 구매 후 떼어서 버리고 마는 태그를 재활용할 수 있게 디자인했다. 소비자는 이 태그를 뗀 뒤 북마크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새것이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새것과 사용한 이후의 가치에 큰 차이가 있다면 새것을 사는 게 맞다. 예컨대, 휴대폰은 새것이 가장 좋은데, 낡으면 느려지고 배터리 문제도 있다. 하지만 가죽점퍼, 과일 접시, 금팔찌, 시계, 가구 등처럼 그렇지 않은 것도 많다. 물론 ‘잘 만든’ 상품이어야 하겠지만 가치 퇴행이 느린 상품들은 새것보다 빈티지가 나을 때도 많다. 스트롤은 임스(Eames), 놀(Knoll), 핀율(Finn Juhl), 프리츠한센(Fritz Hansen), 한스베그너(Hans Wegner)같이 오래됐지만 지금 만든 것보다 더 완벽하게 가치를 유지하는 빈티지 가구들을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다.


오늘 살 때가 가장 싼 것

가전제품은 나오자마자 제일 비싸고 점점 가격이 내려간다. 하지만 소유가 곧 ‘재테크’라고 불릴 정도로 사용하는 동안에 가치가 올라가는 것들, 즉 내일 사려면 더 비싸지는 것들도 있다. 예컨대, 세르주무이(Serge Mouille)는 연간 2000개 이내만 생산되는 프랑스 조명인데 현재도 경매에서 50년대에 만들어진 모델이 10배 이상의 가격으로 되팔릴 정도로 그 가치를 자랑하고 있다.


사이즈가 중요하다

집안 가득한 옷들을 정리 처분할 때 결국 끝에 남는 옷들은 브랜드도, 가격도 컬러도 아닌 몸에 잘 맞는 옷들이다.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사면 안 된다. 스트롤은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슈트와 비즈니스 셔츠 등은 비스포크 라인으로 준비했다. 여기에 ‘로컬’ 개념을 더해 이 동네 주민, 즉 단골손님이 한 번 사이즈를 잰 다음부터는 슈트는 물론 다른 옷을 살 때도 몸에 꼭 맞는 옷을 고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3. 경험: 독점적이거나 비틀거나(Exclusive or Twist)

‘오프라인에서 무엇을 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는 ‘왜 소비자가 직접 사러 가야 하는가?’란 질문을 같이 던져야 한다. 구태여 왜 거기를 직접 가야 하는지 말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남과 다른 것을 팔면 된다. 나이키 컬래버레이션 발매일 당일 매장 앞, 백화점 세일 상품 매대 앞에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는 이유다. 그런데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 매장에만 공급될 일은 만무하다. 따라서 스트롤은 남다른 것(Exclusive)을 파는 것뿐 아니라 같은 것을 다르게 판매한다(Twist)는 원칙을 세웠다. 다르게 판매한다는 것은 제품에다가 앞서 얘기한 상위 가치 5개, 경험, 취향, 맥락, 제안, 공간을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세계적인 디자인 스튜디오인 클라우드앤코(Cloudandco)의 유영규 디렉터가 디자인한 제품은 뉴욕의 현대미술관 모마(MOMA)에서 판매되는데, 한국에서는 스트롤에서만 독점적으로 만날 수 있다. 앞으로도 그가 디자인한 제품들은 스트롤에서 단독 소개하고 판매할 예정이다.

스트롤이 암스테르담의 반고흐박물관에서 수입한 립스틱 케이스는 뒤틀기(Twist)의 좋은 사례이다. 2018년 1월 유럽 여행 중 반고흐박물관에서 판매하는 립스틱 케이스를 발견하자마자 동전 케이스로 쓰기 너무 좋겠단 생각을 하고 반고흐박물관으로부터 그 케이스를 수입했다. 필자의 경험을 설명하며 매장에 전시했고, 수많은 여행객이 그 제품을 사기 위해 매장을 찾았다.



이미 히트 상품인 로우로우(RAWROW) 트렁크를 입점시키면서도 “이걸 구태여 왜 여기까지 와서 사야 하지?”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다른 어느 판매점에서도 하지 않는 형태로 래핑을 했다. 래핑 디자인은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픽션(SUPERFICTION)과 ‘광교’의 로컬 정체성을 모티브로 협업, 제작했다. 트렁크 래핑은 단순한 데코레이션이 아니라 ‘트렁크는 집에 산다’는 해석을 담은 결정이다. 사람들은 트렁크를 여행 갈 때 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내 생각엔 트렁크가 가장 오래 있는 곳은 ‘집’이고 사람들은 그 큰 트렁크를 어디다 둘지 곤란해 하곤 한다. 그러니 원하는 디자인으로 꾸며 평소에도 잘 보이게 놓으라는 새로운 제안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스트롤은 구매하는 거의 모든 제품에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있다. 현재는 레이저 각인기를 주로 사용하는데 제품 소재에 따라 실크스크린, 자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니셜을 새겨주려고 한다.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이름을 새기는 행위’가 제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디어는 2019년 어느 겨울 강남역 횡단보도에서 내 앞을 걷고 있던 4명의 군인을 보면서 떠올랐다. 넷 중 단 한 명만 태극기 자수 밑에 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고 있었는데, 내게 그날의 장면은 ‘HJ CHO와 세 명의 검은 가방을 멘 군인’으로 기억됐다. 이름을 새기는 것이야말로 나를 남과 구분해주는, 즉 커스터마이징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다.



4. 공간: 상품을 사지 않아도 머물고 싶은

스트롤의 공간은 ‘프로덕트 퍼스트(Product First)’라는 모토하에 인테리어를 최소화하는 한편, 다음의 3가지 포인트에 집중했다. 입구에는 구매 고객이 아니어도 누구든 쉴 수 있는 계단, 수시로 변형할 수 있는 모듈 가구, 천장에는 언제나 파티션으로 나눌 수 있는 레일 시스템을 적용했다. 입구 계단은 앨리웨이 광장에서 벌어지는 버스킹을 관람하는 사람이 매장과 광장의 중간지대에서 즐길 수 있도록 마련했다. 레일 시스템은 매장에 언제든지 작은 전시 공간을 조성할 수 있는 도구다. 하나의 브랜드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을 때 레일에 파티션을 달아 매장 어느 곳에나 특정 제품에 집중할 수 있는 밀폐된 방을 만들 수 있다.

온라인과 달리 오프라인 매장에는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 물건을 사는 것 외에 방문해야 할 다른 이유 한 가지를 더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 고민의 결과로 매장의 절반을 털어 ‘스펜서룸’이 라는 이름으로 VIP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을 꾸몄다. 심지어 VIP의 경우 스트롤 매장이 문을 닫은 심야에도 카드 키로 별도의 출입문을 이용해 드나들 수 있고, 또 이 공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극단적인 계획도 세웠다. 멤버들은 이 공간에서 편하게 음악을 들으며 쉴 수도 있고, 원하는 술을 따라 마실 수 있고, 원하면 앉아 일을 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쇼핑에 관심이 없는 남자들이 가족들이 쇼핑할 동안 쉬는 곳으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는데 그 휴식을 좀 알차게 하라는 제안이자 남자들이 늘 꿈꾸는 ‘아지트’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컨시어지와 리퀴르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 컨시어지는 주민들이 수리할 물건을 맡겼다 찾아가고, 미리 등록한 신체 사이즈로 별도의 수고 없이 맞춤 양복을 구입하고, 쓰지 않는 중고물품을 위탁하고, 가끔 쓰는 제품을 빌리고, 매장에 들여놓았으면 하는 제품을 구입 요청할 수 있는 창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리퀴르 코너 역시 필자의 경험에서 아이디어가 나왔다. 혼자 와인을 따면 반병도 채 먹지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곤 코르크로 막아 놓으면 결국 상해서 버리게 되곤 했다. 필자 같은 처지의 주민(손님)들을 위해 와인과 좋은 싱글몰트 같은 주류를 각자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병에 담아 집에 가져갈 수 있는 코너를 만들었다.이런 서비스를 준비하기 위해 비싼 기계도 사고, 면허도 두 개나 받아야 했다. 병도 아무거나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공병 제조사에 의뢰해 주문 제작했다.



5. 맥락: 스트롤만의 스토리를 입히다

상품을 맥락 있게 제안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오디오 매장에 음반을 놓는 것은 맥락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남성 고객에게 ‘클래식을 들으라’고 제안하고 싶다면, 그에 필요한 기기와 콘텐츠를 놓는 것이 맥락이다. 남성 고객에게 요리를 권하고 싶으면 앞치마를 소싱한다. 제안의 대상도 맥락에 포함돼 있다. 예컨대, 야구글러브를 스포츠용품 코너가 아니라 아이용품 코너에 놓았다는 것은 ‘게임보다는 밖에 나가 놀게 하라’는 제안을 담은 행위다. 맥락은 스트롤이 고객을 구분하는 방식에도 반영돼 있다. 스트롤은 고객을 아동, 청년, 중년 이런 숫자로 대표되는 연령이 아니라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에 나오는 재키, 토니, 빌리 엘리어트의 캐릭터에 착안해 분류했다. 아버지를 위한 제안을 할 때는 재키, 청년을 위한 제안을 할 때는 일과 사랑을 중시하는 토니, 아동을 위한 제안을 할 때는 꿈 많은 빌리를 떠올리자고 제안했다.

스트롤이 선택한 제품들에는 ‘Every brand comes with a story’라는 모토에 따라 스트롤만의 스토리를 담았다. 스트롤의 모든 제품 옆에는 스토리가 함께 소개돼 있다. 예컨대, 에어론 체어(Aeron Chair)에는 필자가 과거에 창업을 하던 당시, 이 의자를 구입했던 경험을 적었다. 당시 임원들 의자만 에어론 체어로 사고 나머지는 보통의 사무실 의자를 구입했는데 10년이 지나고 난 후 새것처럼 남아 있던 것은 오로지 하나, 에어론 체어였다. 매일 최고 20시간까지 앉아 일하는 필자가 현재 쓰고 있는 의자도 에어론 체어다.

세르주무이에는 필자가 세르주무이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지인인 구재상 케이클라비스(KCLAVIS) 대표의 사진과 그의 스토리를 적었다. 세르즈무이 조명을 켜고 끄는 ‘딸깍’ 소리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분 좋은 느낌을 준다.



6. 산책은 계속된다

지난 8개월간 스트롤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뻤던 점은 필자가 매장에 담고자 했던, 제안이라기보다 교육에 가까웠던 소비 철학, 즉 하나를 사도 무리해서 좋은 걸 사는 게 아끼는 것이라는 원칙이 소비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는 점이다. 매장을 방문한 많은 사람은 인스타그램에 자발적으로 후기를 남기면서 우리 공간과 그에 담긴 필자의 취향에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다. 일례로 옥승철 작가의 그림을 새긴 쇼핑백은 고객들의 요청으로 액자 서비스까지 시작했다.

물론 필자의 생각은 현실에서 다르게 흘러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스트롤이 제안한 상품 사진들을 자발적으로 찍어 SNS에 올리면서 ‘다 사고 싶다’ ‘돈 벌면 사고 싶다’ ‘주머니 열릴 뻔했는데 참았다’라고 올렸다. 상품은 마음에 들지만 구입의 문턱은 높다는 얘기다. 또 광교라는 입지 핸디캡도 분명했다. 매장을 오픈한 뒤 SNS 등 공개적으로 가장 많이 받은 피드백이 “서울에도 내주세요” “부산에도 내주세요” “광교로 이사 가고 싶어요”였다. 이 얘기는 바꿔 말하면 “광교에서 안 살아서 가기 어려워요”였다.

그래서 최근 오픈 당시의 철학을 조금 양보해 VIP들을 위한 온라인 사이트(strol.co.kr)를 열었다. 또 내 경험에 비춰 남성들에게 쉴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장 내 스펜서룸을 만들었는데 현실적으로 한국 남자들은 퇴근 후 동네 매장에서 어슬렁거릴 여유가 없었다. 오히려 남성보다 여성 고객들이 이런 공간에 열광했고 고객도 여성이 월등히 많다. 매일 자주 방문하는 로컬 고객에 집중하다 보니 매장을 자주 바꿔야 해서 비용 대비 효율이 떨어지는 문제도 여전히 고민거리이다. 그렇다고 매일 바뀌는 뜨내기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로컬 고객이 심드렁해질 것이다. 역시 오프라인 매장의 가장 큰 도전은 비용이라는 점을 매번 확인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은 스트롤이 오프라인 로컬 매장으로서 해결해 나가야 할 숙명이다. 온라인은 버그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수고가 들긴 하지만 하나의 솔루션으로 수백만 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 매장은 한 가지 문제를 수정해도 고객 만족에 기여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방문 고객을 위해 매일 미세한 조정을 해나가야 한다. 특히 주변의 한 사람이 여러 번 방문하길 기대하는 로컬 숍의 경우 더욱 그렇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이 달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점은 ‘잘 팔리는 것을 둘 것인가’ ‘우리가 팔고 싶은 것을 둘 것인가’에 대한 필자의 답은 아직까지 후자라는 것이다. 오프라인 숍이 남들과 같아지는 순간 그저 개성이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스트롤의 철썩 같은 믿음이다. 스트롤 매장의 미션은 좋은 물건을 가져다 파는 것이 아니라 ‘Back to Offline’, 구태여 그곳에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 가는 산책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필자는 이런 재무적인 미션을 매장 책임자에게 전했다. “고정비에 관해서는 10원이 늘더라도 벌벌 떨어라. 하지만 매장을 매력적으로 바꾸기 위해 투자해야 할 비용이 있거든 1억 원도 아끼지 말아라.”


DBR mini box II: 2020년에도 스트롤의 실험은 계속된다

2020년에는 스트롤이 경험한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새 방침을 정했다. 먼저, ‘연역적 소싱’을 지향한다. 연역적 소싱이란 필자가 편의상 이름을 붙인 개념으로 어떤 구체적인 아이템을 소싱할지 먼저 정하고 그 아이템 중 최고의 제품을 찾아 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MD가 주민들에게 앵클부츠 하나씩은 꼭 장만하라고 제안하고 싶다면 앵클부츠를 진열할 자리를 미리 비워 두고 어느 브랜드의 앵클부츠가 가장 좋은지 찾아내 입점을 시키는 식이다. 여의치 않으면 직접 제작이라도 한다. 일반적으로 구두 브랜드를 입점시키면 그 안에 평균적인 품질의 다양한 종류의 부츠가 패키지로 들어온다. 그런 기존 방식보다는 고단하더라도 하나하나 우리가 꼭 제안하고 싶은 수준의 제품들로 채울 생각이다. 그렇게 선택한 제품은 위탁이 아닌 사입 방식을 고수해 판매를 온전히 책임질 계획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어디서도 팔지 않는 브랜드를 발굴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이미 알려진 브랜드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우리의 취향을 담아 선택하는 일을 더 늘려나갈 생각이다. 말 그대로 우리의 취향을 판매하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인재들과 MD 파트너십을 맺고 그 리소스를 이용해 그 도시의 특색 있는 로컬 브랜드와 콘텐츠를 스트롤에 소개하는 해외 MD 시스템을 활용할 예정이다.

또 오프라인은 온라인보다 단골손님의 기여가 큰 영역인 만큼 단골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VIP에게 마진을 최대한 낮춘 가격을 제안하는 온라인 카탈로그도 만들었다. 다른 지역으로 매장도 확대해나갈 계획이다.

기업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할 때 솔루션을 제시하는 서비스도 준비 중이다. 고객의 목적에 맞게 선물을 커스터마이즈하고 필요하면 선물에 동봉될 편지까지 작성해주는 B2B가 아닌 일명 ‘Shop to B’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필자소개 
여준영 스트롤 대표 hunt@prain.com
여준영 대표는 2000년 PR 회사 프레인글로벌을 창업해 연예기획사인 프레인TPC를 포함해 9개 계열사를 갖춘 컨설팅 종합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2018년 남성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스트롤(STROL)을 열면서 처음으로 리테일 비즈니스에 뛰어들었다. 공연제작자가 매일 그날의 공연이 끝날 때마다 리뷰 노트를 작성하듯이 매장 현장을 리뷰하면서 하루하루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정리=배미정 기자 soya1116@donga.com
동아비즈니스리뷰 292호 Hyper-personalization 2020년 3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