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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시간 관리 패러다임 변화

24시간 근로 가능해진 디지털 시대
시간 규율 대신 신뢰 시스템 구축하라

이희진,배미정 | 253호 (2018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필자는 근로 시간 단축 시대에 발맞춰 기업의 시간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4시간 근로가 가능해진 디지털 시대에는 기업이 목표 달성을 위해 일방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며 오히려 업무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리더가 구성원에게 시간을 자율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을 돌려주는 데서부터 시간의 신뢰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최소정(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세기 러시아 과학사에 족적을 남긴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로 더 유명하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능성의 최대치를 사용하고자 했던’ 그는 생전에 70권의 학술 서적을 발표했으며, 총 1만2500여 장에 달하는 논문과 연구 자료를 남겼다. 전공인 곤충분류학과 해부학은 물론 유기체의 형태 및 체계, 진화론, 수리생물학, 유전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가 이 같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사후 공개된 수백 권에 달하는 일기장에서 드러났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이 쓴 그의 전기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1 에 따르면 류비셰프는 마치 회계 장부를 기록하듯 자기만의 ‘시간 통계’를 만들었다. 26세였던 1916년부터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56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휴식, 독서, 산책 등에 소비되는 모든 시간을 분 단위로 계산해 기록했다고 한다. 심지어 매월 말에는 합계를 내 그래프와 표를 그리고 연말에는 연간 총계까지 계산했다. 엑셀이 없던 시절, 수작업으로 그 계산을 다 해낸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시계 분초에 갇힌 그의 삶이 꽉 막히고 불행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굉장히 행복했다고 한다. “유기체의 자연적 분류체계를 확립하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초지일관 지향하며 흔들림 없이 열정적이고 성실한 삶을 이어가는 데 만족했다. 그렇다고 온종일 학문에만 매진한 것도 아니었다. 다양한 문화 활동도 즐겼다. 이런 활동들도 당연히 시간 통계의 중요 항목이었다. 시간 통계를 작성하는 것 외에도 그는 “열 시간 정도 충분히 잠을 잔다”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는다”와 같은 자기만의 생활 원칙을 지켰다. 그는 시간 부족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라닌은 류비셰프를 온몸으로 시간에 맞서며 ‘현재’를 관리한, “시간을 정복한” 유일무이한 남자라고 칭송했다.

류비셰프의 이야기는 늘 시간이 부족해서 불평인 현대인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업도 늘 시간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류비셰프식의 시간 관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연구자였기에 가능했고, 모든 사람이 류비셰프처럼 사는 것이 정답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류비셰프가 자기만의 독자적인 시간 규율을 만들어 실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류비셰프에게 시간은 그의 삶의 목표와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시간은 그에게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핵심적인 귀중한 자원이었고, 시간 통계는 그런 자원을 소중히 아껴 쓰는 방법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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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사회성
시간은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조직의 질서를 구성하는 데도 중요한 토대가 된다. 어떤 기업이나 조직도 시간에 대한 공통된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일을 진행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눈에 보이는 시계 시간을 계산하는 데 급급해 그 이면에 숨겨진 시간의 사회적 의미를 간과하는 우를 범한다.

책 『노동의 종말』과 『소유의 종말』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리프킨(J. Rifkin)은 속도와 효율성은 시간성(temporality)의 일부일 뿐이며 “현대적 시간 가치의 특징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2 시간의 의미는 사회 속에서 구성되며 또 끊임없이 변화한다. 조직 이론의 관점에서 시간은 구성원 간 상호 작용을 매개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예컨대 ‘시간을 잘 지킨다’ ‘이르다’ ‘늦다’와 같은 표현들은 그 말이 사용되는 장소, 상황, 조직에 따라 다른 의미와 척도를 지닌다. 지인과의 모임에 10분 늦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되겠지만 회사 면접에는 5분이라도 늦으면 불합격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제루버블(E. Zerubavel)은 시간 개념을 물리 시간, 생물 시간, 사회 시간의 세 가지 상이한 질서로 구분했다. 물리 세계에는 밤과 낮의 교체, 지구의 자전 따위의 규칙성이 있다. 생물 세계에도 수태기간, 생리주기, 체온을 지배하는 서캐디안 리듬(circadian rhythm) 같은 규칙성이 있다. 사회 시간도 상당히 규칙적으로 발생한다. 예컨대 우리는 대개 평일 아침에 직장이나 학교에 가고 일요일에 휴식을 취하거나 여가 활동을 한다. 또 1년 가운데 특정한 하루를 새해가 시작하는 날로 기념한다.

시간의 사회성을 이해하면 시간의 가변성을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주 7일제를 폐지하려던 시도들이 있었다. 프랑스혁명 때는 10일제, 볼셰비키혁명 때는 5일제가 적용되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9 to 5’라는 근로시간 개념도 20세기 현대사회의 조직에서 받아들인 하나의 제도일 뿐이다. 또 최근 북한이 평양 표준시간을 30분 늦췄다 당겼다 하는 것도 시간이 얼마나 사회적, 심지어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오늘날 디지털 사회의 도래로 ‘24시간 근무’가 가능해지고, 일하는 시간과 일 안 하는 시간, 일터와 비일터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은 시간의 가변성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시간은 사회 변동을 가져오는 중요한 변수이자 촉매제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시간 노동(timed labour)의 한계
IT는 시공간과 조직의 경계를 넘어 가상 환경에서의 협업이 가능하도록 만들면서 시간을 둘러싼 상호작용과 조직 관리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시간 규율은 노동의 시간과 여가의 시간을 엄격히 분리했다. 이는 두 활동의 공간적 분리(공장과 집)로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로 가능해진 원격 근무제는 일과 여가를 구분하기 힘들게 만든다. 경영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를 감독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물론 나날이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은 온라인 상태의 근로 시간을 측정하고 접속 사이트의 업무 관련 로그 기록을 검사하는 등 원격 근무자를 통제하는 데 유용한 도구 또한 제공한다. 하지만 이 같은 통제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에 적합한 규율로 디지털 시대의 노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디지털 환경이 가능하게 만든 근로 환경의 강점인 자율성, 유연성에서 오는 창의성의 발휘를 해칠 수 있어 위험하다. 초기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형성된 시간 규율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E.P. 톰슨은 고전이 된 그의 논문 ‘시간, 작업-규율과 산업자본주의3 에서 자연의 리듬에 따라 작업이 진행되던 ‘과제 중심’의 시간 조직 방식이 공장제하에서 ‘시계에 의해 정해진 노동(timed labour)’ 조직 방식에 자리를 내줬다고 분석했다. 이전에는 일하는 시간이 과제에 따라 길어지거나 짧아졌지만 새로운 공장제 자본주의하에서는 엄격한 시간 규율이 일과 생활을 분명히 구분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과학적 관리 운동이 이 같은 시간 규율의 전통을 계승하고 강화했다. 테일러의 시간 동작 연구와 더불어 헨리 포드가 개발한 대량 생산체제는 노동자를 컨베이어 벨트의 흐름에 종속시켰다. 요즘도 근로자가 시간을 체크하는 기계에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을 기록하는 카드를 집어넣는 모습은 테일러 시대부터 이어져 온 시간 규율의 유산이다.

메이요(Elton Mayo)의 인간 관계학파도 엄격한 시간 규율의 비인간성을 비판했지만 이 같은 규율이 노동을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신념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테일러가 노동 과정을 어떻게 조직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다뤘다면 인간관계론자들은 주로 어떻게 근로자들을 그 노동 과정에 적응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과학적 관리법에 의해 확립된 경직된 시간 규율을 인정하면서 그에 맞도록 노동자들을 선별하고 훈련해 적응시킬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공장의 경직된 시간 규율은 사무실로 확장됐다.

시간 규율의 내면화는 21세기 조직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회계사들에 관한 한 연구는 수습 회계사가 시간 규율의 내면화를 통해 어떻게 숙련된 회계사로 거듭나는가를 보여준다. 수습 회계사는 초기 훈련 기간을 통해 주말에 일하는 것을 흔히 있는 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 연간 업무 주기의 중요성과 정해진 기일 엄수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바쁜 철에는 아플 틈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 같은 사회화 과정에서 초과 근무는 ‘고객 서비스’를 위한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된다. 자연스럽게 고객 요구와 팀에 대한 충성을 자신의 공부와 개인 시간보다 우선순위에 두도록 배운다. 이처럼 특정한 조직 형태의 시간 규율을 받아들이고, 특정한 시간 의식을 갖도록 하는 사회화는 개인이 전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발달시키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근대 공장제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시계 시간 개념과 시간 노동을 내재화하게 되는 과정과 동일한 원리다. 아직도 많은 회사에서 야근의 수용은 일에 대한 책임감, 성실성의 지표라기보다는 회사에 대한 충성심, 끈끈한 동료의식, 그래서 이기주의자가 아니라는 징표로 받아들여 지곤 한다.

반면 경영진과 근로자의 상이한 시간 규율에 대한 기대는 갈등을 낳기도 한다. 예컨대 근로자는 근무시간의 유연성과 자율성을 원하는 반면 경영진은 꺼릴 수 있다. 특히 일과 자녀의 양육 사이에서 분투하는 워킹맘들의 경우에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회사 경영진은 여전히 ‘9 to 5’로 상징되는 엄격한 시간 규율이 근로자를 감독하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Out of sight, out of control’이라고 여긴다. 그들에게는 이 같은 시간 규율이 오랫동안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엄격한 시간 규율은 더 이상 디지털 가상 환경에 놓인 근로자들을 통제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시간제 노동(timed labour) 규율은 시계 시간에 기초해 시간이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며 한 방향으로 균일하게 흐른다고 가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양을 수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면 업무가 더욱 생산적이거나 효율적이라고 평가된다. 시간은 조직의 효율성이나 효과성이라는 측면에서 측정되고 조작돼야 하는 하나의 자원으로 간주된다. 오랫동안 이런 시간관이 경영 관리의 근간이 됐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서로 다른 직업을 가지고, 다른 조직에 속하며, 다른 문화를 지닌 사람들이 어우러져 일할 기회가 많아진다. 또 개개인의 시간 개념이나 데드라인 같은 시간에 대한 대응 양식, 규범도 제각각 다르며 통일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런 조직에서 시간은 굉장히 다면적이고 이질적인 구조물이다. 개개인의 개인적, 심리적 요인뿐 아니라 이들이 속한 직업과 조직의 관행 같은 제도, 문화적 요인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신뢰’ 시간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의 시간 규율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전통적인 시간 규율은 표준화(standardization), 규칙성(regularity), 조정(coordination)의 세 가지 차원으로 이뤄져 있다. 톰슨은 표준화와 규칙성, 조정의 정도에 따라 포드사의 대량 생산 시스템에서 유연 생산 시스템까지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시간 규율은 좀 더 복잡해진다. 분산된(distributed) 작업 환경에서 다변화(diversification)가 더 중요해지고 불규칙성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럴 때 조정의 역할은 훨씬 더 세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전통적인 시간 규율에서 중요하지 않았던 ‘신뢰’가 중요한 개입을 하게 된다. 테일러주의나 포드주의 같은 전통적인 경영 관리 체계에서는 근로자가 공동의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시간에서 일한다고 가정한다. 미셸 푸코의 원형감옥(panoticon)의 메타포가 보여주는 시간 규율의 근본은 바로 ‘통제’다. 원형 감옥의 감시탑에서 간수는 죄수들을 낱낱이 내려다볼 수 있지만 죄수들은 감시탑 위의 간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24시간 관찰당하고 있다는 불안감 속에 지낸다. 지금은 많이 없어진 전형적인 사무실을 떠올려 보자. 창가 밝은 쪽에 부장의 의자가 창을 등지고 앉게 놓여 있고, 그 아래 직원들은 모두 뒤통수를 드러내고 통로 쪽을 향해 앉아 있다. 전형적인 원형감옥이다. 시간의 통제는 사무실 공간의 구조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시간은 근무시간 전반에 걸쳐 철저히 통제되는데 여기에는 노동자들이 감시와 감독 없이는 열심히 효율적으로 일할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통제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통제 방식은 근로자들이 감독이 아니라 불필요한 감시, 비합리적인 권력 행사라고 여기기 쉬우며 그런 비합리적인 통제는 디지털 기술로 인한 혜택을 오히려 잠식시킬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당사자 간 연결과 의존성이 강해지는 디지털 시대에는 이전에 불필요했던 신뢰의 역할이 커진다. 경영진이 보이지 않는 부하직원들을 관리하려면 기본적으로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

물론 근로자들에게도 일정한 수준의 자기 통제가 요구된다. 하지만 그전에 기업은 먼저 근로자들이 자기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각종 기술과 도구를 활용해 언제 어디서든 효율적인 업무가 가능해진 디지털 환경에서 근로자들은 스스로 어떤 결과를 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얼마나 걸려서 만들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장시간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국내 기업 대부분에서 여전히 시간은 권위의 상징으로 행위자들의 신분에 따른 차별과 통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인터뷰했던 한 원격 근무자는 친구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일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일정 시간마다 무의미한 클릭을 하면서 회사 시스템에 로그인한 상태를 유지해야 했던 ‘웃픈’ 에피소드를 냉소적으로 들려줬다. 그날 주어진 업무를 다 마친 뒤였는데도 말이다. 이처럼 구성원 간 신뢰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유연시간제, 탄력근무제 같은 어떤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의도한 대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일을 수행할 수는 없을 것이며 소위 말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R.O.W.E 실험의 교훈
물론 직원들에게 시간의 통제권을 부여할 때는 그에 적절한 조정의 리더십이 뒷받침돼야 한다. 미국 베스트바이의 R.O.W.E. 사례는 경영진의 시간 관리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미국 베스트바이의 CEO 휴버트 졸리(Hubert Joly)는 2013년 취임하면서 베스트바이의 조직 관리 혁신으로 꼽혔던 R.O.W.E.(Results-Only Work Environment, 성과 집중형 업무 환경) 제도를 전면 폐지했다.

2005년 도입된 R.O.W.E.는 직원들에게 근무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내준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말 그대로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기만 한다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했다. 회사는 “업무 수행이 제대로 이뤄진다”는 전제하에 직원들에게 각자의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내줬다. 휴식 시간에 대해 상사의 승인조차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탄력근무제의 개념을 뛰어넘은 파격적인 제도였다. 사회학자인 필리스 모엔과 에린 켈리는 R.O.W.E를 도입한 후 직원들의 생산성이 향상됐으며 무엇보다 자발적 이직률이 급감해 우수 인재의 이탈을 막는 성과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013년 휴버트 졸리의 취임과 함께 R.O.W.E.가 폐지되면서 자율적으로 근무시간을 통제해오던 직원들은 다시 회사로 출근해 주당 40시간을 채워서 일하게 됐다. 아마존 같은 온라인 소매업체의 공세로 베스트바이뿐 아니라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큰 타격을 받은 때였다. 졸리는 구성원들에게 업무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delegation)하는 R.O.W.E의 리더십이 현시점에서 부적절하며 구성원의 책임감을 고양시키면서 협력과 팀워크를 촉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O.W.E 실험이 드러낸 한계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직원들의 목표 달성에 대한 의무감이 커지면서 업무 스트레스가 과도해졌다. 자발적으로 장시간 근무하는 직원들도 늘어났다. 직원들이 업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 일에 과도하게 헌신하게 되는 모순에 빠진 것이다. 일과 가족 간의 갈등도 완화되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나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회사 차원에서는 R.O.W.E.가 적합하지 않은 영역이 있음이 드러났다. 매일 고객 응대를 해야 하는 서비스 부서나 신입 사원처럼 동료의 지원이 필요한 경우는 위임이 오히려 업무 혼선과 지연을 낳았다. 또 팀 구성원의 수준이 불균등한 경우 목표 달성률이 떨어졌다. 휴버트 졸리는 무엇보다 직원들의 사무실 출근 시간이 불규칙해지면서 시장 변화에 따른 유연한 팀 구성과 창의적인 팀별 아이데이션이 어려워졌음을 지적했다. 진정한 성과 집중형 업무 환경이 조성되려면 직원들 개개인의 역량에 따라 업무를 조정하는 매니저의 리더십이 필요하며, 그러려면 직원들이 회사에 일단 규칙적으로 출근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 휴버트 졸리의 선택은 옳았다. R.O.W.E의 폐지와 더불어 온라인 매출 혁신 전략을 추진한 베스트바이는 아마존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현재의 성공이 R.O.W.E를 폐지한 덕분인지는 불분명하다. R.O.W.E가 베스트바이의 유연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R.O.W.E. 실험은 조직 전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자율과 책임 수준을 적절히 조정하는 리더십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교훈도 준다. 시간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직원도 있으며, 팀 차원에서 전체 목표를 위해 직원들의 자율성을 제한해야 할 일도 생긴다. 그런 부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분별한 자유는 개인뿐 아니라 조직 전체에도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새로운 시간 규율을 향해
7월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많은 기업과 직장인이 그동안 미처 접하지 못한 새로운 현실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는 시행하고 규제하는 정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저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이던 시대에서 ‘스마트’하게 일하길 요구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문제는 누구도 ‘스마트’하게 일하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스마트’함과 임금이 상쇄(trade-off) 관계로 엮일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기업들은 유연근무제 등 다양한 방안들을 도입하고 있지만 경영진과 구성원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묘책은 없겠지만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을 한두 가지 지적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비록 좌초됐지만 베스트바이의 R.O.W.E. 실험에서 시간 유연성(time flexibility) 또는 일정에 대한 통제권(control over schedule)이 참여자들에게 가장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졌고 연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공 요인으로 뽑혔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직원들은 일정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진다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몇 년 전 국내 한 대기업에서도 주 5일 중 하루는 회사 바깥(집 포함)에서 일하는 제도를 시행한 적이 있다. 필자가 면접한 직원들은 주어진 업무를 마치기 위해 그 하루의 근무시간이 길어지더라도 그날을 즐겼다는 반응을 남겨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국내 기업들의 52시간제 대처 방안은 오히려 시간을 더욱 옥죄는 방향으로 거꾸로 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일방적이고 엄격한 통제, 감시는 디지털 네이티브로서 언제 어디서나 일하고 공부할 수 있게 된 젊은 세대의 생활 패턴과 맞지 않다. 어두컴컴한 독서실 시대의 공부와 일 개념으로 카페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데 익숙한 세대를 감시, 감독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전통적인 시간 관리와 시간 규율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미숙한 경영 관리 수준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엄격한 시간 규율만을 고수하는 관리자는 조만간 그것이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무능, 관리 무능의 징표’로 받아들는 시기가 올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아직도 이런 변화의 요구를 사시(斜視)로 보는 분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엄격한 시간 규율 속에서 다니다 대학을 가면서 성인으로서 자율적인 시간 운영의 책임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왜 대학을 졸업하고 진정한 성인이 됐는데 직장에서는 다시 초·중등학교 시절의 시간 규율을 요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갖는 유능한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업은 이들 인재를 잡기 위해서라도 진정으로 자율적인 유연시간제, 탄력근무제를 운용할 필요가 있다. 52시간제에 대한 대처 방안과 논의 방향은 조직 구성원이 만족하면서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이 돼야지 법을 지키기 위한 리스크 관리 차원에 그친다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다.

또 정책 측면에서 주목할 점은 유연근무제, 탄력근무제같이 그나마 일과 삶의 조화를 추구하는 제도들이 사회 전반적으로 불균등하게 분포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산업, 기업군과 직종은 이미 경제적 상위권에 있는 집단이다. 기존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시간의 영역에까지 확대되지 않도록 세심한 관심이 요구된다.

DBR Mini Case Study: 2년 전 '자율출퇴근제' 시행한 신한은행


2016년 7월 신한은행이 금융권 최초로 자율출퇴근 제도를 도입했다. 임직원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 골자다. 당시만 해도 근로시간 단축은 기업에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보수적으로 유명한 대형 금융기관에서 직원들에게 출퇴근 시간의 자유를 허용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2년이 지난 현재 이 제도는 신한금융그룹의 조직 문화로 정착했으며 주 52시간 근무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조직의 일하는 방식을 바꾼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은행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신한금융은 2017년 9월부터 은행뿐 아니라 모든 계열사의 임직원 2만6000여 명을 대상으로 자율출퇴근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 2년간 신한은행이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시킨 자율출퇴근제 사례를 통해 근로시간 단축을 위한 제도 도입을 검토 중인 기업에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조용병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신한은행장으로 재임 중이던 2016년 7월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VUCA(Velocity, Uncertainty, Complexity, Ambiguity) 시대를 맞이해 그 핵심 키워드인 ‘유연성’(Flexibility)을 조직 문화에 심어야 한다는 게 취지였다. 사고방식은 말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고방식이 유연해지려면 일하는 방식부터 유연하게 바뀌어야 했다. 출퇴근 시간의 자유는 직원들로 하여금 시대적 변화를 몸소 느끼고 스스로 변화하게끔 만들기 위한 첫 단추였다.

은행 영업점은 오전 9시에 열어서 오후 4시에 문을 닫는다. 이에 맞춰 직원들은 오전 8시 출근하고 밤 8시 이후에 퇴근하는 게 보통인데 이는 은행권에서 30여 년 이상 지속된 관행이다. 회식이나 거래처와 약속이 있으면 더 늦게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업무 대부분이 전산화되고 영업시간 자체도 짧아졌지만 관행이 지속된 이유는 그게 당연한 문화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직원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일하는 근무 환경의 특성상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직원은 충성도가 낮거나 불성실한 직원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육아를 병행하는 여직원들의 고충뿐 아니라 비합리적인 문화에 반발하는 젊은 직원들까지 늘어나면서 변화는 불가피했다.

직원들 손으로 설계부터 추진까지
2016년 여름, 은행 주무부서인 인사부와 총무부를 중심으로 10개 부서가 모여 스마트근무제 도입을 위한 TF를 구성했다. TF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부가 추천하는 탄력근로제, 선택근로제, 재량근로제 등 가운데 은행의 상황에 적합한 방안을 선별하는 것이었다. 신한은 은행 업무 특성과 공간 자원, 조직 문화 등을 고려했을 때 자율출퇴근제와 원격근무제, 재택근무제가 도입 가능한 안이라고 판단했다. 예컨대 삼성에서 실시하고 있는 선택적 근로시간제와 재량근로제는 일 단위 영업시간이 일정한 은행 업무에 도입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자율출퇴근제는 현실적으로 은행이 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많았다. 업무 간 조정이 쉬운 본부 직원은 문제가 없었지만 과연 전국 700여 개 지점 1만여 명의 직원 모두에게 도입이 가능할지 의문스러웠다. 영업시간은 그대로 두고 업무를 조정해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 간 혼선이 불가피했으며 특히 업무량이 많은 지점의 경우 불만이 나올 게 뻔했다. 하지만 CEO의 의지는 확고했고 TF 직원들도 그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직원들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강력한 오너십을 토대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을 외부 도움 없이 직접 설계했다.

체험 프로그램은 2016년 9월부터 12월 말까지 3개월간 전 직원이 매월 2회 이상 자율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직원들은 최소 한 달에 2번,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30분 단위로 자유롭게 출퇴근 시간(하루 8시간 근무 기준)을 정할 수 있게 됐다. 월간 2회라는 횟수는 영업점 운영에 큰 지장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결정했지만 역세권 등 일부 바쁜 영업점은 그마저도 어렵다는 불만을 호소하기도 했다.

우선 직원 개개인이 자율출퇴근제도의 효과를 스스로 느끼는 게 중요했다. 인사부는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출퇴근 시간을 조정해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조언했다. 예컨대 자동차 수리나 건강검진을 받고 출근하거나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라는 식이었다. 제사나 생일잔치가 있을 때 일찍 퇴근해서 준비하거나, 운동을 시작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박장훈 신한은행 인사부 과장은 “가능한 많은 예시를 제공해 직원들이 자율적으로 출퇴근 시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고 말했다.

부서장부터 강제 실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 마련되더라도 정작 직원이 제대로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예컨대 언제 자율출퇴근을 하겠다고 전산상 신고해놓고, 실제로는 일찍 혹은 늦게 퇴근하면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질 수 있다. 신한은 도입 초기부터 직원들이 사전 등록한 시간 대비 30분 이상 조기 출근하거나 늦게 퇴근하는 것을 제한했다. 예컨대 오전 11시에 출근하겠다고 등록한 경우 10시30분 이전에는 출근하지 못하게 하는 식이다.

또 창구 직원들보다 책임자인 부서장이 먼저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자율출퇴근제에 가장 거부감이 클 사람이 바로 지점장 등 부서장이다. 이들이 동참하지 않고서는 제도가 조기 정착되기 어려웠기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게 불가피했다. 신한은 가장 먼저 부서장 업무 성과 등급을 평가하는 데 스마트근무제 활성화 지표를 포함했다. 본래 업무성과 등급 지표에 있던 부하직원 육성/리더십 지표(5%)를 스마트근무제 활성화 지표(5%)로 대체했다. 또 다면역량평가 설문에서도 스마트근무제 활성화 노력 항목을 추가했다. 비록 인사고과 자체를 흔들 정도로 큰 비중은 아니지만 조직적으로 추진하는 정책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시그널을 확실히 줬다.

실제로 도입 초기에는 일부 영업점에서 직원들이 자율출퇴근 일정을 일괄 등록하는 사례가 다수 나타나기도 했다. 예컨대 동일한 수요일과 금요일에 전 직원의 자율출퇴근 혹은 시간외근무를 신청하는 경우였다. 이런 사례는 발견될 때마다 인사부에서 분석해 부서장에게 통지했고 부서 직원들의 실질적인 사용을 유도했다. 체험 프로그램 기간 동안 인사부는 임원회의, 부서장 회의뿐 아니라 월례조회, 사내 방송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제도의 필요성을 설파했으며 영업본부장에게 주 1회 스마트 근무 등록 현황을 e메일 발송해 관리하도록 독려했다.

추진 부서의 모니터링과 보완
초기에 사용을 꺼리던 직원들도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에 큰 지장이 없으며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점차 부담 없이 사용하는 직원이 늘기 시작했다. 이에 은행은 2017년 전 영업점 성과평가지표에 근무시간 정상화라는 평가 지표를 반영하기로 노사가 전격 합의한다. 수십 년에 걸친 장시간 근로 관행의 난제를 해결하기로 노사가 합심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영업점 KPI 평가에 1만 점 중 300점을 반영하기로 했는데 이 지표로 지점 순위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또 2017년 2월부터 스마트 근무제 2.0을 전격 시행하면서 자율출퇴근 의무 횟수도 전격 확대했다. 처음에는 최소 주 3회, 월 12회 이상 이용하도록 대폭 확대했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운영하던 가정의 날 조기 퇴근 제도를 통합했을 때 주 3회 정도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KPI의 강제성이 부여되면서 영업점의 부담이 커졌다. 특히 지점 통폐합이나 환경공사, 감사수검, 집단 대출 공동 영업 등으로 제도 활용이 어려운 영업점의 어려움도 제기됐다. 이 같은 현장 목소리를 반영해 인사부는 KPI 규정을 일부 수정하는 한편 주 2회/월 8회로 한 차례 완화했으며 현재는 월 6회 의무를 적용하고 있다. 김인수 신한은행 인사부 과장은 “최소한 월 6회 이상 쓰라는 취지로 실제로 더 많이 쓰는 직원들도 많다”며 “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횟수보다는 꼭 필요한 사람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여전히 많은 지점 직원이 자율출퇴근을 하면서 8시30분~9시, 즉 평소보다 30분에서 1시간가량 늦게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존 출근 시간과 큰 차이가 없어 출퇴근 재량권을 크게 활용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직원들이 좀 더 다양한 시간대에 출퇴근하면서 자기 시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게 과제다. 또 임산부처럼 제도가 꼭 필요한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새로운 근로시간의 탐색
신한은행에서는 현재 지점당 하루에 최소 2~3명 이상은 자율출퇴근하며 재량 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의 실험은 무엇을 바꿔놓았을까. 가장 큰 변화는 직원들이 일과 시간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됐다는 점이다. 일단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정시 퇴근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별일 없어도 저녁 먹고 1~2시간 정도 더 일하고 가는 관행이 사라졌고 직원들은 근무시간 안에 집중해서 일하는 데 스스로 적응하고 있다.

또 유연하게 시간을 활용하면서 이전에 몰랐던 행복을 깨닫게 된 직원들도 많다. 특히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처음으로 데려다주고 출근하면서 뿌듯해하는 남자 직원들이 많았다는 후문이다. 황득준 신한금융지주 인사부 차장은 “특히 중장년층일수록 일에 치여서 삶의 다른 가치를 잊고 살기 마련인데 개인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출퇴근시간이 달라지면서 같은 부서 직원들끼리 서로 일정을 사전 공유하는 일이 늘었다. 불필요한 회식이 현저히 줄었는데, 꼭 필요한 전체 회식 등도 사전에 일정을 정해서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조정하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이해도 커지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근무시간이 줄면서 시간외수당이 감소하는 비용 절감 효과도 일부 발생하고 있다. 생산성은 과거와 변함없지만 직원 만족도가 올라가고 비용 절감 효과까지 부수적으로 나타나면서 노사가 윈윈하고 있다는 게 내부 평가다. 선제적인 자율출퇴근제 도입으로 주 52시간 근무제도 소프트랜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신한은행 사례는 새로운 근로시간 제도를 도입할 때 1) 직원 주도의 제도 설계 2) 위로부터의 관심과 의지 3) 추진 부서의 세심한 관리와 모니터링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다. 자율출퇴근제는 아주 작은 변화지만 근로 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금융산업의 변화와 더불어 신한의 자율출퇴근제가 얼마나 더 확대될 수 있을지, 달라진 규범에 적응한 직원들의 일하는 방식은 어떻게 바뀌어나갈지 기대된다.

필자 소개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heejinmelb@yonsei.ac.kr
이희진 교수는 런던정경대(LSE)에서 ‘정보기술과 시간’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 브루넬대와 호주 멜번대 교수를 지냈다. 현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이자 연세대 호주연구센터 소장이다. 연구 주제로 시간-표준-철도를 좇고 있으며 정보통신기술과 개발도상국 발전(ICT4D)에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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