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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지멘스㈜의 현지화 전략

본사 지식 이식받아 독자 역량 개발, 해외 물량 수주해 ‘한국 지사’ 한계 넘다

이방실 | 237호 (2017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지멘스㈜ 솔루션 사업부의 현지화 성공 요인

1) 흡수역량 형성해 지식 이전을 위한 토대 마련 : 아태지역본부 출범 초기부터 사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국내 인력들로 조직을 구성, 새로운 외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흡수역량을 사전에 형성함으로써 지멘스그룹 독일 본사로부터 효과적인 지식 이전을 가능케 하는 토대 구축.

2) 실제 프로젝트 수행하며 지식 이전 촉진 : 독일 본사에서 파견된 전문 기술인력과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협력해 아태지역본부 출범 직후 약 3년간 장문·당진·위례 3개 발전소 프로젝트 동시 수행. 1대1 멘토링 등 지속적인 상호 작용 활동을 통해 암묵지(暗默知)를 내재화하는 데 성공.

3) 한국법인만의 독자 역량 개발 : 독일 본사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현지 상황에 맞게 수정·응용함으로써 현지 실정에 보다 적합한 솔루션 개발. 그 결과 더 많은 자율성과 권한을 위임받아 그룹 내 지멘스㈜의 위상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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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서쪽 신계지역 툰먼(屯門) 지구의 바다와 맞닿아 있는 블랙포인트발전소(Black Point Power Station)는 홍콩 내 최대 복합화력발전소1 다. 총 발전용량은 2500㎿로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규모가 큰 발전소에 속한다. 홍콩 에너지기업인 CLP파워홍콩(CLP Power Hong Kong)이 운영하는 이곳은 1996년 단지 조성 이후 현재의 발전용량을 갖추기까지 오직 GE의 터빈만 써 왔다.

그러던 CLP파워홍콩이 지난해 처음으로 외도를 했다. 550㎿ 발전용량 증설을 결정하며 미국 GE의 100년 넘은 숙적인 독일 지멘스(Siemens)의 손을 잡은 것. 지멘스 입장에선 사상 처음 홍콩에서 수주한 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였다. GE의 오랜 텃밭을 지멘스가 뚫고 들어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따로 있다. 블랙포인트 프로젝트의 수행 주체가 독일 지멘스 본사가 아니라 지멘스그룹의 일개 지사, 그것도 한국법인인 지멘스㈜라는 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멘스㈜가 지난 2013년 10월 전력 및 가스(Power & Gas·PG) 사업본부 산하 솔루션(Solutions·SO) 사업부2 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3 를 한국에 유치했기 때문이다. 독일 본사가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설치를 목적으로 한국 정부에 신고한 외국인 직접투자(FDI) 금액은 6600만 달러다. 지난 20여 년간 지멘스그룹이 한국에 투자한 돈이 총 2억58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라 할 수 있다.

현재 지멘스㈜는 아태지역에서 발전설비 건설 등 에너지 관련 솔루션을 제공하는 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설계, 조달, 시공) 사업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과거 단순 영업 및 유지보수 서비스만 제공하던 수준에서 사업 영역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지멘스㈜는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유치를 계기로 고작 23명에 불과했던 조직을 4년 만에 208명(2017년 10월 말 기준)으로 늘리며 EPC 역량을 확충해 왔다. 단순히 몸집만 키운 게 아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시장에도 적극 진출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진 4호기 복합화력발전소와 장문 복합화력발전소, 위례 열병합발전소4 등 3개의 국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고, 현재 오는 2019년 완공을 목표로 홍콩 블랙포인트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현지법인의 경우 주도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기보다는 글로벌 본사의 지침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단순 영업에만 주력하지 본사의 기술이나 지식을 전수받아 한국 지사만의 독자적 역량을 확보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지멘스㈜는 한국법인만의 고유 역량을 확충하는 데 성공, 현재 국내 시장은 물론 국경을 넘어 해외로까지 진출해 EPC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다국적 기업의 성공적 현지화 모델을 보여준 지멘스㈜의 솔루션 사업에 대해 DBR이 집중 분석했다.

 

지멘스㈜, 40여 년 만에 첫 한국인 대표 영입

지멘스㈜가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를 유치하게 된 데에는 올해로 6년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종갑 회장의 공이 크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지낸 그는 지멘스가 1967년 한국에 연락사무소를 설치5 한 이래 역사상 처음 맞는 한국인 최고경영자(CEO)다. 김종갑 회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7년 3월, 안정적인 공기업 사장직 제의를 마다하고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사장직 공모에 뛰어들었다. 이후 4년여 동안 경영을 맡아 수렁에 빠져 있던 하이닉스의 회생을 주도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제2의 도전을 위해 지멘스㈜로 자리를 옮겼다.

소위 정부 관료라는 ‘갑’의 위치에서 국내 기업 사장이라는 ‘을’을 거쳐 다국적 기업 지사장인 ‘병’으로 변신을 거듭한 김종갑 회장은 “솔직히 처음 지멘스㈜에 왔을 때 지멘스그룹 내 한국법인의 위상이 너무 낮아 놀랐다”고 털어놨다. 그가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 8년간 지멘스그룹 CEO(당시 피터 뤠셔)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단적인 예다. 김종갑 회장은 “GE 같은 다른 회사들과 경쟁하기에 앞서 지멘스 중국법인이나 인도법인 등 그룹 내 다른 지사와 실력을 겨뤄 한국법인의 위상을 기필코 높여 놓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김종갑 회장이 지멘스㈜에 부임한 지 몇 달 뒤, 한국에 사상 초유의 ‘블랙아웃(2011년 9월15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가 터졌다. 정부는 부랴부랴 전력공급 확대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전력 발전 자회사들은 물론 민자 발전소들까지 가세해 앞다퉈 발전설비 용량 확충에 나섰다. 김종갑 회장은 즉시 수완을 발휘, 2012년에만 한국남부발전, 포스코에너지, 에스파워, 대구그린파워 등 국내 발전사들에 H클래스 가스터빈6 총 7기를 납품하는 수주 계약을 맺었다. 지멘스가 2010년 H클래스 가스터빈을 출시한 이후 2012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총 18개 수주 계약을 맺었는데 이 중 약 40%를 한국에서 수주한 것이다.7 고효율 대용량 H클래스 가스터빈의 대량 수주에 성공하면서 지멘스그룹 차원에서 한국 시장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때마침 글로벌 본사에서 신흥시장에 에너지 솔루션 사업과 관련해 지역본부를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아태지역을 필두로 신흥시장에서의 발전 수요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대두되며 고객들의 니즈에 좀 더 기민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라도 지역본부를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멘스그룹 내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법인과 함께 한국법인인 지멘스㈜도 지역본부를 유치할 후보 대상에 오르게 됐다.

김종갑 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역본부를 유치한다는 건 지사의 역할이 단순히 독일 본사에서 생산한 터빈을 가져와 현지 고객에게 판매하는 수준을 넘어 EPC 턴키(turnkey) 형태로 사업 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이는 역량만 갖춘다면 지사가 발굴할 수 있는 대상 고객이 현지 시장을 넘어 해외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김종갑 회장이 지멘스라는 글로벌 기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꿈꾸던 일이 현실화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지사라고 굳이 사업을 한국에만 국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탁월한 제조 기반과 우수한 기술 역량을 활용하면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도 충분히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봤다. 지역본부를 유치할 수만 있다면 엔지니어링이나 프로젝트 관리 역량을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수한 국내 업체들을 부품 협력사로 발굴할 수 있고, 국내 유수의 건설회사와도 협력해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수 있어 국가 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비록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한국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지멘스㈜는 물론 우리나라 토종 기업 모두가 ‘윈윈’ 하는 결과를 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역본부를 한국에 유치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매달렸다.” 김종갑 회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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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멘스㈜는 독일 본사에 지역본부 유치 대상 국가로서 한국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했다. 우선 한국이 EPC 역량과 관련해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즉, 현대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두산중공업 등 EPC 경험이 풍부한 기업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다 발전소에 들어갈 각종 부품 조달을 위한 협력업체들도 많아 중국 등 지멘스 내 경쟁 대상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 공급 확대 기조가 뚜렷하게 반영된 한국 정부의 전력수급 계획을 제시하며 한국 시장 자체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적극 알렸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독일 문화와 합쳐지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지역본부를 유치하는 주된 목적이 현지 시장의 니즈에 좀 더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인 만큼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은 중요한 평가 기준 중 하나였다. 김종갑 회장은 “지역본부 유치 업무를 전담하는 팀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본사에서 자료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오면 밤을 새워서라도 작성해 그다음 날 아침 일찍 보냈다”며 “며칠은 걸려야 답변을 받을 줄 알았던 독일 본사에서 이 같은 열성에 탄복해 후한 평가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인건비가 저렴하고 원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는 중국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지만 결국 숙련된 기술 인력과 EPC 인프라 측면에서 한국이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지역본부를 유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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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사업본부 산하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한국에 유치

2013년 10월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유치를 계기로 지멘스㈜는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Siemens Energy Solutions)8 를 설립했다.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의 초대 사장은 독일 본사 출신 후보들 중 김종갑 회장과 본사 PG 사업본부 대표가 협의해 결정했다. 이와 함께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국내에서 적극적인 인력 충원에 나섰다. 지역본부를 유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멘스㈜에선 에너지 솔루션 사업과 관련해 단순 영업 및 유지보수 서비스만 담당해왔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구매조달, 프로젝트 관리 등 새로운 업무를 수행할 인력을 확충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에 따라 두산중공업, 현대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대림건설 등 EPC 관련 다양한 국내 기업에서 최소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숙련 인력들을 중심으로 채용에 나섰다. 김영탁 지멘스㈜ PG 사업본부 이사는 “2013년 첫해에 엔지니어와 영업직, 지원 조직을 포함해 국내에서 60여 명을 뽑는 데 무려 6000여 명이 지원했다”며 “신규 채용한 국내 인력들은 독일 본사에 최소 2주에서 4주 정도 트레이닝을 거치며 지멘스의 문화와 지멘스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배우고 올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독일 본사에 적극적으로 인재 파견을 요청했다. 지멘스의 발전소 솔루션 설계 지식과 관련 노하우를 전수받아 한국 엔지니어들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김종갑 회장은 “솔직히 독일에서 직원을 하나 데려오려면 독일에서 받는 임금의 최소 2배는 줘야 하기 때문에 한국법인 입장에서 비용 부담이 상당하다”며 “당장의 손익계산만 따지면 가급적 국내 인력으로만 조직을 구성하는 게 훨씬 낫지만 최대한 많은 전문가들을 독일 본사에서 영입하기 위해 힘썼다”고 말했다. 설계 역량 같은 무형의 지식은 직원들끼리 같이 일하면서 실무적으로 교류해야 제대로 전수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13년 첫해 14명의 독일인 엔지니어가 본사에서 서울로 파견됐고, 이듬해엔 추가로 30명이 합류해 한국인 엔지니어들과 호흡을 맞췄다. 2013년과 2014년 한국인 엔지니어 수가 각각 32명, 98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 엔지니어 2명당 1명꼴로 독일인 전문가들이 배치되도록 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엔지니어링 부서의 경우 팀장은 모두 독일인들이 맡았고 그 외 팀마다 최소 2명에서 5명의 독일인 코치(한국인 엔지니어들에게 지식 및 노하우 전수 역할을 맡은 전문가)들이 배치됐다. 코치들은 엔지니어링 분야별로 최소 10년에서 30년 가까이 전문 지식을 쌓은 이들이었다. 김영탁 이사는 “지역본부 출범 이후 대형 강당에서 여러 사람이 앉아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형식의 ‘집체 교육’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철저한 ‘1대1 멘토링(mentoring)’ 방식으로 실제 업무를 같이하면서 독일 본사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받는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가령 제안서를 작성할 때는 어떤 툴을 활용하는지 같은 사소한 사항부터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을 실무를 통해 익혔다고. 김영탁 이사는 “독일의 경우 전문 분야가 세세하게 나뉘어져 있고 분야마다 전문 기술자가 있기 때문에 이런 멘토링 훈련 방식이 유효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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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당진·위례 3개 프로젝트 성공적 완료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별도 법인 출범 6개월여 만인 2014년 3월 지멘스㈜가 입주해 있는 기존 충정로 풍산빌딩에서 나와 서울스퀘어로 사옥을 옮겼다. 당시 독일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을 포함해 전체 직원 수가 144명으로 늘어나면서 더 이상 기존 지멘스㈜ 사옥에서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 인력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그해 4월부터 11월까지 장문 복합화력발전소(1800㎿), 당진 4호기 복합화력발전소(903㎿), 위례(450㎿) 열병합발전소 등 3개 프로젝트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H클래스 가스터빈이 도합 7개나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한 것이다.

장문, 당진, 위례 3개 프로젝트는 고객사에 발전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사업이었을 뿐 아니라 지멘스㈜ 내부적으로 독일 본사의 지식 및 노하우를 내재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엔지니어링 파트의 경우 프로젝트매니저(PM)들은 모두 한국인이 맡았지만 PM마다 짝을 이뤄 일할 독일인 코치를 한 사람씩 배치했다. 2014년과 2015년 당시 무려 40명이 넘는 독일 본사 엔지니어들이 서울로 파견됐던 것도 거의 동시에 진행된 3개 프로젝트에 투입할 코치들이 대거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인 코치들은 한국인 PM들이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조언자 역할을 했다. 장문 및 위례 프로젝트의 프로세스 엔지니어링 PM을 맡았던 이경훈 지멘스㈜ PG 사업본부 차장은 “처음엔 지멘스 시스템에 대해 속속들이 잘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내릴 때 독일인 코치에게 상당 부분을 의지했다”며 “하지만 1년 정도 시간이 지나 지멘스의 설계 철학(design philosophy)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코치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멘스㈜의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독일인 전문가들과 함께 3년여의 긴 기간 동안 3개의 발전소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며 독일 지멘스 본사에서 일하는 방식이나 문제 해결 방법 등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특히 경력직으로만 구성된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지멘스의 경쟁사인 GE와 미쓰비시히타치파워시스템(MHPS) 기기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독일 본사의 노하우를 익히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 EPC 회사들은 특정 제조사의 가스터빈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회사의 가스터빈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이경훈 차장은 “기본적으로 발전소 핵심 주기기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데다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학습 시너지가 컸다”며 “이해의 폭 측면에선 평생 지멘스 기술만 최고로 여겨왔던 본사 엔지니어들보다 지멘스㈜의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훨씬 더 낫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 배경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어려움도 많았다. 이경훈 차장은 “초기에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때에는 ‘외부’에 있는 고객사 요청을 들어주는 것보다 ‘내부’에 있는 동료 독일인들을 이해시키는 게 더 힘들 때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원리 원칙’을 고집하는 독일 방식과 ‘융통성’을 중시하는 한국적 방식이 부딪히며 갈등을 겪었다고. 구체적으로 독일 전문가들은 소위 ‘지멘스 스탠더드’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고집해 발전 설비의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까지 그 어떤 변형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터페이스 설계에 대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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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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