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설계형 위기대응

이제 적응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한민국號, 리셋버튼을 눌러라

172호 (2015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삶은 개구리 증후군의숨은교훈

목욕탕 물이 뜨거워지면 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과 달리 물 온도가 계속 올라가는데도 개구리가 물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는 이유는 사람은항온 동물이고 개구리는변온동물이기 때문.

문제해결형(problem-solving) 위기 대응법 vs. 재설계형(redesigning) 위기 대응법

위기에는 개구리가 물 속에 머물러서 체온을 올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위기가 있고, 물 밖으로 즉시 뛰쳐나가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위기가 있음.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해 있는 위기는 환경에 적응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위기가 아니라 물 밖으로 당장 뛰쳐나가 근본적인 게임의 룰을 바꿔야만 해결 가능한 위기임.

당연한 참사(Normal Accidents) 이론

원래 사고(accidents)는 개념정의상 비정상적(abnormal) 사건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설계된 체제에서는 오히려 사고가 발생하는 게정상(normal)’이 돼 버림. 이런 당연한 참사 상황에서는 기존 체제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봉착한 만큼 전면적인 재설계가 필요함.

 

최근 국내외에서대한민국 위기설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공공 부문, 가족공동체 등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동시에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사회 분위기를 주도해야 할 21세기 초에 세기말적인 무질서와 혼란, 갈등과 불안감이 사회 전체를 어둡게 짓누르고 있다. 사회 각 부문의 핵심 구성단위들이 한꺼번에 고장 나버린 듯이 전혀 제 기능을 못하면서 사회 전체가 마비된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이 침몰 직전의세월호처럼 절체절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이제 물 새는 틈만 임시방편으로 막는 땜질식 문제해결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새로운 배로 갈아타는 정도의 근본적인 재설계가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만드는대한민국 재설계를 위한 리셋(reset) 버튼을 누를 때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위기론에 대해 지도층들은현재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가장 잘살고 있는데 무슨 뜬금 없는 위기설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재설계론을 허무맹랑한 공상 정도로 치부해버릴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2014년 우리나라 경상수지를 보면 흑자가 8942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런 수치들만 보면 언뜻 우리나라가 호황기형 성장일로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내부를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때 온 국민이 느꼈듯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으며 도대체 이게 제대로 된 나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위기의 대한민국호()

우선 거시경제 환경을 보자. 1960년대 이래 한국 경제는 개발주의 경제체제가 출범한 이래 우여곡절과 부침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빈국에서 불과 반세기 만에 10대 경제대국의 문턱까지 치고 올라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혁신과 품질, 디자인, 기술력으로 세계 경제의 발전방향을 선도하는 선진국들 같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다. 더욱이 싼 비용구조를 기반으로 양적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해왔던 기존 경쟁 방식에서조차 중국을 위시한 후발국들의 맹렬한 추격으로 그 입지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성장의 탄력과 동력이 한풀 꺾이면서 고용이 위축돼 대규모 실질 실업, 특히 매년 역대 최고를 경신하고 있는 청년 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비정규직 비율도 우리 경제의 또 다른 잠재적 뇌관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양극화와 역대 최고를 기록 중인 극빈층 비율은 우리가 같은 나라의 국민이 맞는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심각해졌다.

 

기업 경영에서도 1960년대 이래 경제성장의 주역이었던 재벌기업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동안 국가 경쟁력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비판을 잠재워왔던 재벌기업들은 글로벌 경쟁력 자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몇 년 사이에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포스코 등 대표적 글로벌 기업들이 동시에 정체기에 빠져들고 있다. 그동안 재벌기업들의 경쟁우위 원천으로 강조됐던 오너 중심의 강력한 리더십이 이제는 오너 개인의 독단적 취향과 의사결정에 의해 기업의 생존이 위협받는오너 리스크가 되고 있다. 그 와중에 고질적인 노사 간 갈등구조는 이미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에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사회문화적으로도 세월호 참사를 필두로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충격적 사고들, 언급하기도 끔찍하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엽기적인 흉악 범죄들, 보육교사가 어린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강타할 정도로 통제되지 않는 분노, 지도층 인사들까지 망라하며 광범위하게 퍼진 도덕적 타락, 적대감과 증오로 가득 찬 계층·세대·지역 간 갈등은 우리나라가 더 이상 순결과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나라가 아니라 이글거리는 욕망과 이기적 탐욕, 통제되지 않는 충동으로 들끓는 혼란한 사회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기득권 집단이 보여주는 소위갑질은 우리나라가 더 이상 동방예의지국이 아니라 천민 자본주의의 극단적 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혼율로 가정이 파괴되고, 독거 노인과 소년소녀 가장들, 가출 청소년이 양산되고 있으며, 세계 최고의 자살률은 우리 사회에서 삶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육 부문 역시 심각한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다. 일제 강점기와 개발주의 체제하에서 구축된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과 권위주의적 교육행정이 21세기 창조사회의 도래로 그 효력을 상실했으나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은 아직 오리무중이다. 청소년들은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지옥과 사교육에 시달리거나 일부는 아예 공부에 관심을 잃고 일탈에 빠지고 있으며, 학원폭력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교사들의 교육자적 소명의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교육부가 시대착오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중앙집권적 교육정책은 매년 바뀌면서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고등교육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학은 논문의 양적 숫자와 대학평가 점수에 집착하는 왜곡된 성과주의 행정 때문에 교수 업적평가 점수에 반영되지 않는 강의는 아예 포기하다시피 하고 연구실 컴퓨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승진이나 재임용에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논문점수 입력에 목숨을 거는새가슴교수들만 양산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나 국회, 그리고 범정치권은

이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문제 해결자가 아닌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전락해버렸다.

 

사적 이해관계를 초월해 공익에 헌신함으로써 국가 경영의 중심을 유지해야 할 전문 관료와 공무원, , 사법부 등 공공 부문도 공복과 전문가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정권의 눈치를 살피며 권력을 가진 집단의 입맛 맞추기에 몰입하고 있다. 사회의 부패를 척결해야 할 공공 부문이 오히려 부패를 양산하면서 내각의 주요 보직자를 선임할 때마다 도덕적 흠결이 없는 후보 구하기가 힘들어서 청문회 등으로 홍역을 치르는 것이 연례행사가 됐다. 전관예우, 제 식구 봐주기, 관피아 등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제 익숙한 단어가 됐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현대 관료제 조직이 출현했던 1세기 전에 예측했듯이 그야말로영혼 없는 관료들만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중에서 단연 가장 심각한 것은 이런 사회적 혼란과 갈등을 해결하고 조정하며 발전적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할 정치 부문이다. 끝날 줄 모르는 진영·당파·파벌 간 대립과 갈등에서 이전투구하며 편협한 당파적 이해관계에만 모든 노력과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게 우리 정치권의 실상이다. 국민들이 각자가 가장 선호하는 최선의 후보를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논리와 지역감정을 자극해 상대 진영보다 덜 싫어하는 차악의 후보를 선출하도록 만드는 선거제도는 더 이상 대의정치의 기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정부나 국회, 그리고 범정치권은 이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문제 해결자가 아닌 문제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전락해버렸다. 정부는 완고한 권위주의와 편협하고 당파적 관점에 사로잡혀 다른 입장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고, 리더십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회는 전문성이나 도덕성, 특히 공공의 이익에 대한 투철한 사명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국가와 국민들의 삶과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이나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는 우리 정치권은 국민들과는 동떨어진 자기들만의 리그가 됐다.

 

삶은 개구리 증후군의숨은교훈

요즘 필자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통찰력이 있는 것은 필자가 존경하는 우리나라 대기업 CEO 한 분이 이야기한세상에서 제일 큰 애벌레론이다. 이 기발한 스토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나비의 일생을 단계별로 보면 알로 태어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애벌레로 부화하고, 또다시 어느 정도 시한이 경과하면 나비로 또 다른 변신을 한다. 그런데 애벌레 단계에 너무나 만족한 어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애벌레로 계속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오랜 애벌레 기간 동안 애벌레로서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경험과 역량을 충분히 축적한 반면 나비로 전환하는 과정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고 또 성공적으로 변신하더라도 애벌레 때처럼 나비로서도 잘 살아갈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익숙한 애벌레로 더 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와 우리 기업들이 바로 나비 되기를 거부하고 애벌레로 더 잘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대한 애벌레 같다는 것이 그 CEO의 신랄한 지적이다. 애벌레는 덩치가 커질수록 천적인 새들의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에 사냥 당할 위험이 더 커진다. 슬프게도 이 덩치 큰 애벌레는 나비로의 전환과정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잠재적 위기를 피하려다 오히려 더 큰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역설이다.

 

이 이야기는 웃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시사점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필자도 강의 때 자주 인용하곤 한다. 큰 애벌레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1980년대 중반 GE의 잭 웰치(Jack Welch)가 인용하면서 전 세계 기업 경영자들은 물론 영리나 비영리, 공공 부문을 막론하고 모든 분야에서 개혁과 혁신을 추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회자됐던삶은 개구리 증후군(The boiled frog syndrome)’의 교훈과도 유사하다. 펄펄 끓는 물에 개구리를 집어 넣으면 개구리는 있는 힘껏 점프해 물에서 뛰쳐나오지만 냄비 속에 개구리가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채워 넣고 개구리를 집어넣은 후 서서히 가열하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물 속에서 헤엄치다 그대로 죽고 만다는 게 삶은 개구리 증후군의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이 개구리 이야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중요한 통찰이 한 가지 있다. 서서히 가열되는 미지근한 물에 있던 개구리가 왜 물이 뜨거워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들은 미지근한 목욕탕 속에 있다가도 뜨거운 물이 계속 주입돼 온도가 올라가면 그 변화를 깨닫고 물 밖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개구리는 실제로 물이 뜨거워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일까? 바로 개구리가변온동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체온이 36.5도로 일정한 항온동물이기 때문에 수온이 76.5도로 올라가면 그 차이인 40도를 느끼고 물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 그러나 변온동물인 개구리는 물 온도가 1도 올라가면 자기 체온도 1도 올리고, 2도 올라가면 자기 체온을 2도 올려서 환경변화에 그때그때 적응한다. 따라서 수온이 70도가 되면 자기 체온도 70도로 올리기 때문에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가 물의 온도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갑자기 생체구조가 파괴돼 죽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변온동물인 개구리는 작은 환경변화에도 끊임 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적응하는 환경적응과 문제해결적 개선의 달인이다. 거의 6시그마 마스터 블랙벨트 수준의 문제 해결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적응력과 문제 해결력이 개구리를 죽게 만든다는 게 흔히 놓치기 쉬운삶은 개구리론의 진짜 교훈이다. ‘큰 애벌레론의 교훈도 마찬가지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를 거부하는 대신 세상에서 제일 큰 애벌레로 살아가기 위해 문제 해결과 개선에 최선을 다하나 결국은 새들에게 맨 먼저 사냥 당해 죽게 된다. 즉 애벌레로서 잘 살기 위해 온갖 애벌레적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해야 할 때도 있지만 나비로 근본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이것이 큰 애벌레론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이다.

 

미국의 거대 자동차 기업들과 코닥, 소니, 노키아 등 최근 몰락한 무수한 과거 강자들의 사례는 아무리 덩치가 크고 역량이 뛰어난 애벌레라도 애벌레로는 절대 버틸 수는 없는 한계와 위기상황이 언젠가는 도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개구리가 물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체온을 올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위기가 있는 반면 물 밖으로 즉시 뛰쳐나가지 않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위기가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관건은 언제 물 안에서 체온을 올리며 대응하고, 언제 물 밖으로 나갈 것인가의 선택인데 이는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선택할 때문제해결형(problem-solving)’ 접근법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재설계형(redesigning)’ 접근법을 취할 것인가의 문제와 같다.

 

 

 

 

 

 

 

 

 

이들의 갑작스런 몰락의 원인은

일반인들이 말하는 것처럼방만한 경영

때문이 아니다. 급진적 환경변화로

기존 성공공식이 소용 없게 됐음에도

성공에 덫에 빠져 기존 강점의

방어와 개선에만 집착한 결과다.

 

위기에 대응하는 두 가지 접근법, ‘문제해결’과재설계

개인과 조직, 국가를 막론하고 치명적 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에는 이미 발생한 구체적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그 문제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가는문제해결(problem solving)’ 방식과 아예 그 문제들이 발생한 맥락, 즉 판 자체를 새로 짜는 근본재설계(redesign)’ 방식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위기대응 전략은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구체적 해결책의 내용보다 훨씬 중요하다.

 

문제해결형 위기대응 전략은 현재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되고 국가 경영의 틀이 되는 체제 자체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운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나 특정 사람들의 잘못이 위기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 오류를 일으키는 구체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 관점에서는 발생하는 문제들은 체제 자체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예외로 간주된다. 따라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속적인 문제해결과 개선활동을 통해 그 예외들을 최대한 제거하면 현 체제의 신뢰성을 완벽에 가까운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체제 자체의 지속가능성과 유효성을 전제로 반복적 문제 해결과 개선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거나 예방하겠다는 접근법이다. IMF 관리체제하에 기업들은 물론 공공조직들과 비영리조직들에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된 개혁열풍과 다양한 혁신활동들은 문제해결형 위기대응 전략의 전형적인 예다.

 

반면 재설계 방식은 기존 체제 자체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현 체제하에서는 아무리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더라도 결코 위기를 극복할 수 없고 반드시 시스템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재설계 관점에서 문제란 예외적이거나 일시적인 오류 혹은 일탈이 아니라 그 체제의 본질적 속성이다. 따라서 재설계 접근은 체제의 구조나 프로세스, 제도뿐 아니라 그 기반이 되는 논리와 핵심 가치에 이르기까지 체제의 모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들을 동시에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직변화이론에서는 이런 근본 재설계를 변화(change)를 넘어서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 부르고, 기술혁신론에서는 구성요소들의 변화(component change)를 넘어서는 구조설계적 변화(architectural change)로 일컬으며, 과학철학에서 패러다임 자체의 교체를 뜻하는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으로 칭한다.

 

위기의 본질은 특정 문제나 사람이 아니다

문제해결 방식과 재설계 접근은 어느 쪽이 항상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 기능과 필요한 상황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를 아무리 잘하더라도 결코 다른 쪽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결국 위기대응의 두 가지 접근법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는 당면한 위기의 본질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나라의 위기대응 전략은 문제해결형 방식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문제해결형 전략으로 대응할 수 없는 위기 국면이다. 이런 면에서 필자의 은사였던 조직이론의 거장인 예일대 찰스 페로(Charles Perrow) 교수의당연한 참사(Normal Accidents)’ 이론은 큰 통찰력을 제공한다.

 

작년에 전 국민을 엄청난 충격과 슬픔에 빠뜨린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자 우리나라의 재난대응과 안전유지 체제의 무수한 문제점들이 지적됐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정책들이 신속하게 제정됐다. 그러나 이런 안전확보와 재난대응을 위한 새로운 해결책들이 제정되고 유병언 씨 일가가 체포된 후에도 성남 지하통풍구 추락 참사 같은 대형 참사들이 계속됐다. 이런 참사들의 원인으로 파악된 문제점들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이제는 정부의 재난대책 담당자들이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재난이나 참사의 원인과 대책과 관련해 페로 교수는 미국 정부의 재난대책 체제의 근간을 바꾼 명저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 대형 사고와 공존하는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새로운 물음(Normal Accidents: Living with High-Risk Technologies)>에서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페로 교수는 참사의 원인을 특정 인물이나 사건, 또는 구성요소 등에서 찾으려는 파편적 접근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는 미국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 사고, 인도 보팔 화학공장 사고,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사고 등 엄청난 충격과 피해를 발생시켰던 대참사와 재난들의 주 원인으로 복잡성과 효율성이 결합된 체제구조 설계의 본질적 특성을 지적했다. 많은 구성 요소들과 다수의 참여자들이 서로 연결돼 있는 복잡한 체제를 엔지니어적 사고방식으로 군더더기나 중복 없이 완벽하게 효율적으로 설계하려고 시도하는 경우 구성 요소들 사이에 설계자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호작용이나 충돌이 발생해 체제의 일부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게 된다. 이런 특정 부분의 사고는 엔지니어적 효율성 관점에서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인식되는 완충지대가 없기 때문에 걷잡을 수 없이 전체 체제로 확산돼 대참사를 초래하게 된다는 게 페로 교수 주장의 핵심이다. 따라서 원래 재난이나 참사 같은사고(accident)’는 개념정의상 비정상적(abnormal) 사건이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설계된 체제에서는 오히려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정상(normal)’이기 때문에당연한 참사라는 모순적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런 체제 설계상의 구조적 모순 때문에 발생하는 위기는 개별 문제들의 해결이나 책임자의 처벌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반드시 체제 자체의 근본적 재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기존 체제의 한계봉착 위기 원인:

내재적 모순과 외생적 충격

문제해결형 접근과 근본 재설계형 접근 사이의 선택은 결국 기존 체제가 더 이상 문제해결로는 버틸 수 없는 결정적 한계에 봉착했는가 여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체제나 패러다임이 문제해결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고 반드시 재설계돼야 하는 결정적 한계와 치명적 위기는 언제 발생하는 것일까? 어떤 조직이나 사회를 지탱하는 체제의 결정적 한계와 위기는 내재적 모순과 외생적 충격의 두 가지가 각각 혹은 동시에 발생할 때 도래한다.

 

 

 

 

 

이념적 지향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역사적 사회 변동의 기반 원리에 관해 가장 체계적인 논리를 제공한 학자들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자신을 비롯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이다. 특히 체제 변동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5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대표하는 두 학자였던 영국의 모리스 돕(Maurice Dobb)과 미국의 폴 스위지(Paul M. Sweezy) 간의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로의 역사적 전환에 대한 논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거장 마르크스주의자 간 논쟁의 핵심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의 역사적 전환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스위지는 지리상의 발견과 항해술의 발전으로 원격지 무역이 급증하면서 축적된 상업자본이 재화의생산에 주로 초점을 맞췄던 봉건제 체제를 재화의교환을 통한 잉여 창출에 초점을 맞춘 자본주의체제로 전환시켰다고 주장했다. 반면 돕은 봉건제 체제 내부의 억압적 구조와 모순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소생산자층이 발생하면서 이들이 양극으로 분화돼 자본가와 노동자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체제가 도래했다고 주장한다. 즉 돕이 체제 전환의 원동력을 체제 내부의 모순과 한계에서 찾고 있는 데 반해 스위지는 외생적 충격에서 찾는다. 필자가 볼 때 이 두 가지 체제변동의 원인은 둘 다 중요하며 많은 경우에 동시에 발생해 상호작용하면서 역사적 변혁을 이끌어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두 가지 변혁의 원천들의 작동 원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내재적 모순과자기파괴의 씨앗’:

성공의 덫과 핵심 경직성

먼저 체제의 내재적 한계와 모순이 심화돼 더 이상 기존 체제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체제 자체의 재설계 압력이 발생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내재적인 모순과 한계의 상당수는 그 체제의 기존 장점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체제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체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부와 생산력을 창출한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나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불평등과 착취, 갈등을 초래해 체제 자체의 몰락 원인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체제의 기존 장점이 치명적 위기의 원인이 되는 이 원리에 대해 마르크스는 모든 체제는자기파괴의 씨앗(seed of self-destruction)’을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파괴의 씨앗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력은 스탠퍼드경영대학의 거장 조직이론가 제임스 마치(James G. March) 교수의성공의 덫(succession trap)’ 이론이나 MIT의 전략경영학자 도로시 레너드-바턴(Dorothy Leonard-Barton) 교수의핵심경직성(core rigidity)’ 개념과 일치한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자기파괴의 씨앗으로 표현했던 성공의 덫은 개인, 조직, 국가에 모두 적용되는 원리지만 기업경영의 예를 보면 가장 이해가 빠르다. 기업이 높은 성과를 내려면 전략이나 문화, 시스템, 역량 등 경영 체제에 뭔가 뛰어난 성공공식(success formula), 즉 핵심역량이나 강점이 있어야 한다. 일단 자신의 성공공식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면 대부분의 기업은 그 강점에 선택과 집중해 이를 반복 활용하게 되고 학습효과 덕택에 성과는 점점 더 높아진다. 성공공식으로 증명된 경영체제는 다른 사업이나 분야에도 계속 확장돼 사용되는데, 이를 경영학에서는 핵심역량의 레버리지(leverage), 혹은 베스트 프랙티스 공유 등으로 부른다.

 

그런데 기존 성공공식에 대한 선택과 집중, 반복적 활용은 단기 성과를 향상시키지만 치명적 위험도 수반한다. 기존 성공공식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다른 대안적 가능성들로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고립되기 때문이다. 특정 경영체제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다른 대안들의 배제와 포기를 의미한다. 그러다 기존 성공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급진적 환경 변화가 발생하면 대안의 부재로 기업 자체가 갑자기 붕괴하고 만다. 과거 경쟁력의 기반이었던 성공공식이 환경변화로 인해 성공의 덫이 되는 것이다.

 

최근 노키아, 씨티, 시어즈, 코닥, 마쓰시타 등 20세기를 지배하던 전통적 강자들이 갑자기 몰락한 이유도 성공의 덫이란 관점에서 보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 필름과 인화지 기술을 선도하며 100년간 세계 필름시장을 지배했던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이라는 급진적 환경변화로 필름과 인화지가 필요 없어지면서 단숨에 무너진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휴대폰 기기를 싸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대량 생산 게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노키아가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디바이스 생산 효율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급감해 위기가 발생했는데도 계속 더 싸게 디바이스를 만드는 전략만 강화하다 몰락한 것도 성공의 덫의 전형적 예다. 이들의 갑작스런 몰락의 원인은 일반인들이 말하는 것처럼방만한 경영때문이 아니다. 급진적 환경변화로 자신의 기존 성공공식이 소용 없게 됐음에도 성공에 덫에 빠져 기존 강점의 방어와 개선에만 집착한 결과다.

 

환경변화가 발생하면 그때 기존 성공공식을 바꾸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위기 상황에서 강점 자체의 근본 변화를 주장하면 대부분의 경우이 방식이 우리의 DNA이고 핵심이며, 뿌리이고, 전통이며, 이 성공공식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우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으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반응을 듣게 된다. 또 높은 성과와 성장을 창출하게 되면 자신의 성공공식을 ‘∼식 경영또는 ‘∼Way’ ‘∼식 성장모델같은 방식으로 정리해 애지중지하며 철저하게 지키곤 한다. 이렇게 성문화되고 정형화된 기존 성공공식은 기존 성공공식의 계속적 심화와 반복적 활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기반이 되지만 성공의 덫으로 작용해 치명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성공공식이 강할수록 발목을 잡는 성공의 덫은 비례해서 더 강해진다고 한다.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강한 핵심역량(core competence)은 급진적 환경변화 시 거꾸로 강한 핵심경직성(core rigidity)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기업뿐 아니고 개인이나 국가, 혹은 한때 높은 성과를 창출했던 집단의 몰락은 대부분 성공의 덫이 원인이다. 기업 CEO나 정치인들의 경력을 보면 어떤 직책에서 성공적 성과창출의 기반이 됐던 리더십 스타일을 전혀 다른 새로운 직책을 맡아서도 똑같이 반복하다 좌절하는 수가 많다. 언뜻 초지일관의 리더십 같아 보이지만 실은 환경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성공의 덫과 핵심경직성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할 정도로 개방적이었던 로마가 그 개방성 때문에 야기된 정체성 혼란과 이민족 진입에 의해 무너진 것이나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로 급성장한 나라들이 전체주의의 획일성과 경직성 때문에 대부분 몰락한 것 등은 국가 수준 성공의 덫의 예다.

 

 

 

 

 

기존 체제의 자기 파괴의 씨앗 때문에 성공의 덫에 빠져 한계에 봉착한 위기의 경우 기존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새로운 성공공식과 핵심역량을 구축하지 않는 한 어떤 개선적 문제해결로도 극복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60년대에 시작된 산업화 모델과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민주화 모델이 결합된 현재 우리의 사회체제는 과거에는 급속한 성장과 사회발전의 기반으로 탁월한 성공공식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수한 문제점들을 자기 파괴의 씨앗으로 잉태하게 돼 이제는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의 결정적 한계에 봉착했다. 지금 대한민국 시스템의 근본적 재설계가 필요한 이유다.

 

외생적 충격과 체제 위기:

역량파괴적 환경변화의 위협

내재적 모순과 한계 이외에도 매우 특수한 환경변화가 밖에서 발생하면 기존 체제로는 아무리 문제해결을 잘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생존 자체를 보장할 수 없는 위기가 도래하게 된다. 기업경영의 경우 경쟁의 규칙 자체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경쟁의 강도가 과거에 비해 급증했다거나 기술발전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등과 같은 연속적 환경변화는 그 정도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문제해결과 개선에 최선을 다하면 충분히 대처 가능하다. 이 경우 대부분은 약자들이 심해진 경쟁을 못 견디고 퇴출되면서 기존 강자들의 경쟁력이 더 강해지는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는 특수한 환경변화의 결과 발생한 위기다. 이런 위기를 초래하는 환경변화는 개인, 조직, 국가를 막론하고 기존 강자들의 장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무용지물화시킨다고 해서 핵심역량의 가치 자체를 파괴한다는 의미로역량파괴적 환경변화(competence-destroying environmental change)’라고 부른다. 기업의 예를 들면 대체기술이나 대체상품의 출현, 기술 분야나 시장 간 경계의 파괴, 규제환경의 변화, 기존 시장의 소멸, 새로운 시장의 등장, 경쟁규칙의 변화 등으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역량파괴적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장애요인이 바로 자신의 기존 성공공식, 즉 자신의 기존 강점과 핵심역량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앞에서 설명한 성공의 덫 현상이다. ‘자신의 강점에 선택과 집중하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강점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개인과 기업, 국가를 막론하고 가장 자주 회자돼 온 합리적 의사결정의 원칙이다. 기업의 경우 낯선 분야를 기웃거리기보다는 자신이 경쟁우위를 가진 핵심사업이나 기술을 선택해 집중하고, 개인 또한 자신의 강점을 찾아 한 우물을 파는 것을 합리적 태도로 당연시해왔다. 국가발전 전략에서 다른 나라들에 대해 비교우위를 가진 분야에 선택과 집중하는 것이나 대학과 같은 비영리조직들의 화두인 특성화 또한 선택과 집중의 예다.

 

시간과 자원, 역량의 한계를 고려할 때 선택과 집중이 성과와 성장에 유리한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성공의 덫과 핵심 경직성의 원리가 시사하듯이 역량파괴적 환경변화가 발생할 때는 기존 강점에 선택과 집중하는 전략이 역설적으로 치명적인 위기의 원인이 된다. 과거에 높은 성과와 성장의 기반이 됐던 기존 성공공식이 역량파괴적 환경변화 시 성공의 덫으로 작용해 근본적 변혁의 발목을 잡아 몰락의 원인이 되는 현상은 내재적 모순과 외생적 충격이 결합될 때 가장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며 이런 특수한 위기 상황에서는 기존 체제 자체의 근본적 재설계만이 유일한 위기극복의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각계각층의 리더들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위기가 바로 근본 재설계를 요구하는 그런 특수한 위기가 아닐까에 대해 심사숙고 해야 한다. (DBR Mini Box 참조.)

 

21세기 창조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과

Redesigning Korea

양적 효율성과 안정성, 규모를 강조하던 20세기 산업사회와 달리 새로운 가치를 끊임없이 남보다 먼저 만들어내야 하는 21세기형 창조사회의 도래는 전형적인 역량파괴적 환경 변화다. 최근 기존 강자들의 갑작스런 몰락이 유독 잦은 이유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게임의 규칙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환경이 도래했는데도 대부분의 기존 강자들이 성공의 덫과 핵심 경직성 때문에 근본 재설계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이나 혁신기법 채택으로는 불연속적인 역량파괴적 환경변화의 게임 규칙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체제 자체의 기본 전제와 논리로부터 구체적 프로세스와 제도까지 모든 것이 동시에 일관성 있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 패러다임 전환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앞에서 제시했던 여러 가지 증거들은 이제 우리나라가 기존 패러다임의 개선과 단편적 문제해결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결정적 한계에 봉착했다는 판단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나라가 현재 처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읽을 줄 알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 모습에 대한 가슴 뛰는 비전, 무엇보다 개인이나 당파적 사리사욕이 아닌 시대적 소명의식과 진정성에 기반한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 시급히 요구된다. 드디어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할 때가 온 것이다. 이 근본적 재설계의 성공 여부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DBR Mini Box

현재 우리의 기존 사회체제가 과연 결정적 한계에 봉착했으며 반드시 근본적 재설계가 필요한 정도의 치명적 위기에 처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최근 환경변화들이 역량파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필자가 볼 때 이런 환경변화는 21세기로의 전환기인 2000년을 전후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부문들에서 동시에 본격화되기 시작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필자의 전문 분야인 경영경제 분야에서의 최근 환경변화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위해 다음 네 가지 질문들에 답해보기 바란다.

 

Q1. 최근 중국 경제가 우리를 급속하게 추격해오지만 우리 실력이 아직 글로벌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아래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는 샌드위치 혹은 넛크래커(nut cracker) 위기에 빠졌다고 한다. 이 샌드위치 혹은 넛크래커 위기론은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위기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중국보다 더 빨리 위를 향해 한 길로 매진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Q2.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내우외환에 빠져 있다. 주요 금융그룹들의 최고경영진 인사에 정부가 영향을 미치고 주요 의사결정을 규제하는 관치금융의 잔재가 여전히 강한데다 조직 내부적으로도 심각한 비효율성과 후진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금융시장 개방 및 글로벌화로 이미 국내 주식시장의 80% 이상은 외국계 증권회사들의 소유다. 조만간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막강한 월스트리트 메이저 금융기업들에 의해 무너질 것인가?

 

Q3. 삼성전자가 방수기능을 중심으로 자신만만하게 출시한 신제품 갤럭시S5의 판매가 예상보다 훨씬 부진했던 데 비해 라이벌 애플의 아이폰6는 역대 최고 판매 기록을 세웠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중국 시장에서 후발업체 샤오미에도 추월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갤럭시S5의 부진은 디바이스의 기술적 약점 때문일까? 전 세계 어떤 업체도 엄두조차 내기 힘든 스마트폰의 완전 방수기능 등을 고려하면 갤럭시S5가 오히려 공학적 기술혁신 측면에서 훨씬 더 뛰어난 제품 같은데 왜 시장에서의 반응은 반대일까? 만일 갤럭시S5 출시 때 한 걸음 더 나아가 방수보다 기술적으로 더 어려운 접는 화면 스마트폰을 출시했더라면 성공했을까?

 

Q4. 품질경영과 디자인경영을 앞세워 800만 대 생산을 돌파하며 단숨에 글로벌 5위까지 치고 올라온 현대차가 갖가지 내·외부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조만간 미국의 메이저 자동차업체들처럼 위기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의 위기는 라이벌 업체들인 도요타, 다임러, 폴크스바겐, BMW 등과의 경쟁 때문에 발생할 것인가? 글로벌 자동차산업의 미래 발전방향을 가장 생생하게 목격하려면 자동차산업의 세계 수도로 불리는 미국 디트로이트로 가면 될까?

 

위의 질문들에 대해 필자가 생각하는 답변은 일반적 상식과는 다르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현재 우리나라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은 기술력과 품질, 디자인 등에서 과거 우리나라가 거쳐온 길을 가공할 스피드로 따라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중국 기업들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전혀 시도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게임을 하고 있으며 이미 전략적 혁신성에서는 우리를 추월했다.

 

두 번째로, 조만간 도래할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엄청난 위기는 월스트리트 거대 금융기업들의 공세 때문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치명적 위협이 올 가능성이 크다. , 우리나라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산업 강자들의 경쟁력을 뿌리째 흔들 위협은 기존 금융기업들이 아니라 구글, 페이스북, 애플, 알리바바, 텐센트 등 ICT 기업들에서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은 스스로를 미래형 금융기업으로 부르며 어마어마한 자원과 최첨단 기술을 금융에 퍼붓고 있다. 이들 ICT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천문학적 숫자의 고객 데이터베이스와 금융정보 프로세싱 기술력을 고려하면 실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중국은 최근 알리바바, 텐센트, 샤오미 등 ICT의 강자들이 모두 금융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의 금융업 진출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규제를 풀어줬다. 그 결과 이들이 금융업에 진출한 지 불과 몇 달 만에 중국에서만 100조 원대의 거액이 전통적 금융업에서 이들 21세기형 금융업으로 빨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로, 스마트폰 분야에서 갤럭시S5와 아이폰6 간 결정적 차이는 디바이스의 기술이 아니라 애플페이(Apple Pay)라는 핀테크 전략이다. 정말 아쉬운 것은 스마트폰을 통한 지문인식이나 암호화 등 핀테크 관련 기술들에서 삼성전자가 애플보다 훨씬 뛰어난 역량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에도 애플보다 먼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별 산업의 기존 경계 안에서 개별 상품의 현재 시장 경쟁력에만 집착하는 전략적 근시안 때문에 삼성그룹의 양대 사업군인 전자와 금융 산업군을 연결해 새로운 글로벌 금융 패러다임을 선도하겠다는 전략적 비전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마지막으로, 현대차의 위기는 도요타나 폴크스바겐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게 구글이나 폭스콘 같은 ICT 분야 기업들에서 올 가능성이 훨씬 높다. 최근 애플의 생산기지 정도로만 알았던 폭스콘이 우리 돈으로 1500만 원대 초저가 전기차를 5년 내 대량 생산하겠다고 공언하며 테슬라와 손잡고 중국 산시성과 대만 타이중의 전기차 생산기지 건설에 8000억 원이 넘는 투자를 결정했다. 폭스콘은 애플 제품들의 주 생산기지로서 정밀 제조업 역량을 축적한데다 테슬라에 이미 핵심 부품들과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전기자동차용 배터리의 원가가 급속히 하락하는 추세로 중국 정부가 중국 전역에 전기차용 충전소를 빽빽이 건설하고 있어서 허언으로 들리지 않는다. 중국은 기존 가솔린 엔진 자동차에서 선진 기업들을 따라잡는 지난한 게임을 하지 않고 아예 한 단계를 통과해 미래의 길목을 지키겠다는 혁신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전기차와 함께 미래 자동차의 또 다른 발전 방향인 무인자동차의 최강자는 도요타나 폴크스바겐이 아니라 구글이다. 구글 본사 밖에는 두 대의 무인자동차가 건물 주위 트랙을 24시간 돌고 있다. 무인자동차의 현재 기술발전 정도는 완전 실용화에 99% 수준으로 접근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현재 세계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자동차산업 R&D 중심지는 세계 15개 자동차 회사들의 R&D 기지가 밀집해 있는 실리콘밸리다. 디트로이트엔 새로운 혁신은 없고 자동차 부품업체들이 밀집해 있어서 두둑한 지갑을 가진 중국 업체들의 부품업체 쇼핑장이 되고 있을 뿐이다.

 

위에서 제시한 최근 경영경제 환경 변화와 기업들의 대응 사례들은 모두 역량파괴적 환경변화를 맞아 기존 전략의 틀 안에서 문제해결을 통해 효율성과 경쟁력을 높이려는 접근법과 전략의 기본 틀 자체를 완전히 재설계한 전혀 다른 접근법을 대비시키고 있다. 경쟁의 강도나 기술발전의 속도가 빨라지는 연속적 환경변화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는불연속적이고 역량파괴적인 환경변화의 결과 기존 성공공식과 핵심역량이 더 이상 경쟁우위의 기반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는 치명적 위기상황에서는 이 두 가지 위기대응 전략 간 선택이 생사를 가르는 단초가 될 것이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직이론 분야의 세계 최고 학술지 등 저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다. 서울 스프링실내악축제 공동 대표도 맡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29호 Fly to the Metaverse 2021년 09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