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ue Review
이 세상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확실한 건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
-벤저민 프랭클린
‘증세’와 ‘정치적 위기’는 언제나 함께 온다.
각국의 많은 정부가 조심스럽게, 혹은 노골적으로 증세를 말하지만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 큰 곤경을 겪기도 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가 급증하는 국가부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증세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세에서 증세로의 전환은 부드럽고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증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집단들의 정치적 반발 때문이다. 2011년 7월 스탠더드앤푸어스가 재정적자 문제를 지적하며 미국의 국채 신용등급을 최고등급에서 한 단계 하향 조정한 이후 오바마 행정부는 재정절벽(fiscal cliff)을 피하기 위해 증세정책을 추진해왔다. 그 핵심은 부시 대통령 시절에 도입됐던 부자 감세안을 폐기하는 데 있다. 부유층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은 이러한 오바마 정부의 세제 개편안에 반대하고 있다.
작년 12월부터 추진된 아베노믹스에도 소비세 인상안이 포함돼 있다. 현재 일본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00%가 넘는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세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7월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아베 정부는 이제 막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이는 경기를 다시 침체의 늪에 빠뜨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소비세 인상을 주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사회당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100만 유로(약 14억 원) 이상 고소득자에게 최고세율 75%를 한시적으로 적용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작년 12월 프랑스 헌법재판소가 부유세율이 지나치게 높다고 위헌 판결해 부유세는 실시 직전에 폐기됐다. 부유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뻔했던 프랑스의 국민 배우 제라드 드파르디유는 2013년 1월 프랑스 국적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귀화했다.
정치가가 가장 피하고 싶은 정책이 바로 ‘증세’라는 말을 실감케 하는 일화들이다. 또 실제로 대규모 전쟁을 전후한 상황이 아니면 사실상 대대적인 증세는 불가능했다는 실증적 연구를 뒷받침해주는 사례들이기도 하다.1
1. 대한민국 증세 논란: “아프지 않게 뽑을 수 있는 털은 없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도 증세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졌다. 복지 공약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창의적인 방향’의 세법 개편안2 이 여지없이 역풍을 맞은 것이다. 개정안에 대한 조원동 경제수석의 해명은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먼저 “세목을 신설하거나 세율을 인상한 것이 아니므로 증세가 아니다”라는 정부 주장에 납세자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납세자의 입장에서 소득공제가 줄어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증세와 다를 바 없었다. 또 “거위에게서 고통 없이 털을 뽑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했던 게 이번 세제 개편안의 정신”이라는 변명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국민을 거위로 보는 발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절대왕정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게다가 “아무래도 봉급생활자들은 다른 분들보다 여건이 낫지 않나”는 주장은 더 큰 공분을 일으켰다. 고소득 전문직 및 자영업자의 탈세 문제에 대한 대책 없이 세금을 꼬박꼬박 내온 봉급생활자들에게만 추가 부담을 전가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조세의 형평성과 공정성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저도 16만 원을 빼가면 싫지만 그 정도는 어느 정도 감내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언급도 여론의 질타를 피할 수 없었다.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월세·전세 비를 내기 위해 큰 가계부채를 지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에게는 참으로 야속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수습과정에서 드러났다. 당정협의를 했던 여당은 정무적 판단이 부족했다고 질책하고 이미 보고를 받았던 박근혜 대통령은 원점에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가 나오기 무섭게 정책당국은 하루 만에 수정안을 제시했다. 하루 만에 원점에서 재검토를 했다는 것은 관료들이 초인적 능력과 의지를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대충 검토했든지 둘 중 하나다. 수정안의 내용을 보면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원안과 수정안의 핵심적 차이는 과세기준을 조금 더 높여 세금을 추가로 더 내야 하는 사람들의 수를 줄이는 데 있다. 따라서 수정안은 엑셀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몇 개 다시 조작한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기획재정부에 정무적 판단이란 경제정책 전반이 국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진지한 평가라기보다는 증세에 직접적 피해를 보는 납세자의 수를 줄여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대증요법에 그쳤다.
수정안이 원점에서 근본적 재검토를 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고민이 반영돼 있어야 한다. 어떤 문제 때문에 추가적인 재원이 필요했나? 세금을 올리지 않고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만약 세금인상이 불가피하다면 누가, 그리고 어떻게 더 부담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문제가 해결되면 어떻게 세금을 조정(즉 축소)할 것인가? 아쉽게도 수정안에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난관의 진짜 이유 1
- 전문가지배(Technocracy)의 신화와 그 폐해
똑똑한 정책 담당자들이 왜 이런 문제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을까.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전문가지배(technocracy)의 신화가 그 원인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비약적 경제성장 과정에 유능한 관료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인식이 그대로 남아 ‘신화화’됐다는 게 문제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와 유사한 발전수준을 가진 국가들과 비교를 해보면 우리나라의 관료들의 수준이 높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의 저명한 정치사회학자 피터 에반스(Peter Evans)는 정치적 고려나 경제적 능력이 아니라 엄정하고 객관적인 시험을 통해 관료를 충원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의 모범사례로 한국을 선정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관료제에는 정실주의(cronyism)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지적이 있다. 선발에서는 능력주의가 유지됐지만 승진과 보직에서는 능력 이외에도 학연·지연·혈연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정실주의 문제가 노출됐지만 관료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는 경향도 나타났는데 많은 관료들이 국내외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전문가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문적 지식의 측면에서 관료와 경쟁하기 힘든 국회의원들은 관료들을 제대로 견제하기 어렵게 됐다. 예산안 심사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국회의원들이 복잡한 예산안 내용을 세세히 보기보다는 자기 지역구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예산안 심사의 주도권은 심사를 하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심사를 당하는 관료에게 넘어간다.
또 시민사회단체 역시 관료들과 대등한 논쟁을 벌이기에는 역부족이다. 조직과 재원에서 훨씬 열등할 뿐만 아니라 정보도 부족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책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혹은 관료)은 결코 국민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더라면, 다시 말해 역으로 정치인이나 관료만큼 국민도 똑똑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뒀더라면 이 같은 역풍을 맞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난관의 진짜 이유 2
- 다른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의 부재
세재 개편안이 난관에 빠졌던 두 번째 이유는 대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부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바로 ‘문제의 정의’부터 ‘해법의 도출’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으로 철저하게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현재 증세정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진 건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는 당위가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지의 정의에서부터 시작됐다. 규범적 차원에서 국가가 당연히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복지를 북유럽의 복지국가 모델로만 한정짓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국가의 역할이 크다고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을 경우 경제활동에 참가하려는 의욕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이런 상쇄관계 때문에 적절한 국가의 비중과 역할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시대, 모든 국가에 적용될 수 있는 정답은 없다. 따라서 국가가 복지를 얼마나 어떻게 부담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사회적 합의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합의는커녕 논의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증세에 앞서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인 예산의 효율적 운영 내지 운영체계의 수정 등에 대한 고민도 찾기 힘들다. 증액이 필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한다면 예산을 늘리지 않고도 복지를 확충할 수 있다. 미국은 냉전 종식 이후 지속적으로 국방예산을 줄여왔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전비가 다시 증가했지만 최근 재정절벽(fiscal cliff) 위험에 직면하자 예산의 일괄적 감축(속칭 시쿼스터)을 통해 국방비까지 축소시켰다. 그럼에도 국민 건강증진을 위해 보건의료와 연구개발 및 교육 관련 예산은 증액했다. 북한의 위험이 실존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미국처럼 국방비를 감축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불필요한 전시성 사업에 대한 투자를 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곧바로 손쉽게 중산층 세금을 늘린다는 정책부터 내놓자 반발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최근 19명의 역대 국세청장 중 구속되거나 검찰 수사를 받은 인물만 거의 절반에 달하는 8명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조세제도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정부는 투자를 진작한다는 명분으로 법인세율도 낮춰준 상황에서 조세회피처 이슈까지 터진 상황이었다. 조세제도 형평성에 대한 불신, 조세 구멍에 대한 직간접적 증거가 나타나는 상황에서 다른 대안의 검토 없이 내놓은 정책이 난관에 빠진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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