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 전략
2012년 유로존 위기가 전 세계를 불황의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더구나 이 위기는 단순히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했다. 유럽 위기는 2008년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번지면서 시작됐다. 그 결과 글로벌 위기는 이전의 위기와 달리 선진국을 중심으로 발생하는 양상으로 전개됐고 전 세계를 저성장의 늪에 빠뜨렸다. 기업들은 향후 성장의 길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1980년대 마이클 포터가 주창한 경쟁 전략 이론으로 성장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할까? 해답을 찾기 전에 먼저 현재 경영 환경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저성장 시대의 개막
산업혁명 이후 300여 년간 세계를 제패해 왔던 미국과 유럽, 일본이 추락하고 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듯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던 강대국들이 흔들리고 있다. 약속이나 한듯이 선진국들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수요가 다 차서 더 이상 성장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수요 확대 정책은 과도한 재정적자와 가계 부채로 이어진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부의 집중과 고용 없는 성장은 내수를 위축시키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고착화는 도전정신을 사라지게 하고 수십 년간 지속돼 온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근본적인 수요 감소를 불러와 성장 잠재력을 훼손시켰다. 20세기를 지배했던 미국의 힘은 앞으로 서서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유럽과 일본의 위상은 향후 10년 이내에 확연히 추락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는 멀지 않은 장래에 산업혁명과 함께 구축된 유럽과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시기이자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이 변혁을 맞이하는 시기가 도래함을 의미한다. 수요 증가를 기대할 수 없는 저성장의 장기 불황 시대가 오고 있다.
성장할 길을 잃어버린 기업들
저성장만이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요의 포화와 함께 찾아온 풍요로움 역시 기업들에는 저주로 다가오고 있다. 사람들은 풍요의 시대에서 만족하고 있다. 기업들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가 더 어려워진 시대가 된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고착화도 성장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부자라고 밥을 하루에 열 끼, 스무 끼 먹는 것은 아니다. 부자라도 소비 증가에는 한계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 싶지만 돈이 없다. 승자 독식으로 굳어진 시장 구도 역시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더 이상 수요가 늘지 않는 기존 시장에서 성장하려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승자 독식 구조로 인해 소수의 승자를 빼면 대부분은 성장하기가 어려워진다. 결국 풍요의 저주와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 승자 독식 구조 등이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계에 다다른 경쟁 전략
그렇다면 성장의 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히 경쟁 전략이다. 성장하기 위해선 승자가 돼야 하고, 승자가 되기 위해선 남다른 경쟁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나만의 경쟁전략에 집중한다. 과연 수요의 포화와 풍요의 저주에서도 경쟁 전략을 구사하며 승자가 되면 성장의 과실을 챙기며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델은 20세기 후반 PC 시장의 리더로 등극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 휴렛패커드(HP)가 전략적으로 노트북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고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등 신흥시장을 집중 공략해 역전에 성공했다. 현재 이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2011년의 승자는 HP와 델 중 누가일까? 정답은 없다. 모두 패자다. 2011년 실적을 보면 HP와 델 모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둘 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델은 2011년 4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8% 줄어 7억6400만 달러를, HP는 전년 동기 대비 44%나 줄어든 14억7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HP는 매출마저도 전년 동기 대비 7% 줄어든 300억 달러를 기록했다. 델과 HP가 모두 패자로 전락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경쟁 우위에 서려고 치열하게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기존 시장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아무리 경쟁 우위를 외쳐봐야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기존 시장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장이 생기면 기존 시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PC 시장은 새롭게 부상하는 태블릿 PC 시장에 밀려 축소됐고 델과 HP는 패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기존 시장만을 두고 벌이는 과잉 점유율 경쟁은 극한 상황으로 치닫다가 새로운 시장의 등장과 함께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 지금처럼 수요의 포화로 인한 저성장 시대에는 경쟁 우위만을 추구하는 전략으로는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성장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애플과 삼성전자는 전 세계적으로 특허 소송전까지 벌이며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2012년 삼성전자가 앞서가던 애플을 역전하며 스마트폰 1위에 올랐으나 애플 역시 미국 특허 소송에서 승리하는 등 반격에 나서고 있다. 누가 승자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정답은 애플과 삼성전자 모두 승자다. 애플은 2012년 1분기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매출 293억 달러에 영업이익 115억 달러를 거뒀다.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매출 45조2700억 원에 영업이익 5조85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런 실적은 2분기와 3분기에도 이어졌다. 향후 특허전의 결과에 따라 애플의 이익은 늘고 삼성전자는 다소 줄겠지만 두 회사가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 과실을 함께 누릴 것이다. 두 회사 모두 승자가 된 이유는 델, HP와 달리 새로운 수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두 시장이 커지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PC 시장의 업체다.
특히 새롭게 창출되는 시장에서 벌이는 치열한 경쟁은 시장 규모를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흔히 시장에서 경쟁하면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사례는 제로섬 게임이라면 맞다. 그러나 플러스섬 게임에선 경쟁하는 업체 모두 승자가 될 수 있다. 경쟁자가 ‘적’이 아니라 함께 수요 시장을 개척하는 동반자인 셈이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특허 소송까지 벌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유도했다. 두 회사 모두 승자가 되는 길을 함께 개척한 셈이다.
결국 수요의 포화로 성장이 정체된 현 시점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에 달려 있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성공을 부른다’는 기존의 경쟁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경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 이런 방법이 유일한 성장 해법이다.
수요 창출에 대한 오해
어떻게 해야 새로운 수요 시장을 창출할 수 있을까? 독창적인 신기술이나 독특한 가치의 상품이 가능할까? 혹은 가격이 매우 저렴하면 구매를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급 경쟁력만 제고한다고 수요가 창출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륜 전동스쿠터인 ‘세그웨이’다. 세그웨이는 2002년 ‘교통의 대변혁을 가져올 발명품’이란 찬사와 함께 출시됐다. 그러나 출시 후 8년 동안 불과 5만 대밖에 팔지 못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9년 ‘지난 10년간 실패한 10대 제품’ 중 하나로 세그웨이를 선정했다. 판매 부진의 늪에 빠진 이유는 제품의 질이 나빠서가 아니다. 세그웨이는 오뚝이 같은 균형 메커니즘을 이용해서 탑승자가 잘 넘어지지 않는다. 몸을 앞뒤로 기울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전진, 방향 전환, 정지가 가능하다. 획기적인 제품이다.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수요 창출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판매 가격이 1000만 원을 훌쩍 넘겼고 1회 충전할 때 최대 39㎞밖에 주행하지 못했다. 인도에선 너무 빠르고 차도에선 너무 느렸다. 그 결과 소비자들이 구매를 꺼렸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례로 인도 타타자동차의 초저가 모델 ‘나노’는 ‘저렴한 가격 = 수요 창출’이란 일차원적인 접근으로 오히려 실패를 부르기도 했다. 의 사례를 살펴보자. 2009년 나노가 2000달러대의 초저가로 출시되자 대기자만 10만 명에 달했다. 폭발적인 인기였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총 판매대수는 10만 대를 겨우 넘겼다. 당초 연간 50만 대 이상 팔겠다는 장담과는 거리가 있었다. ‘인도의 포드차’가 되려던 나노는 저렴한 가격을 위한 기술 경쟁력에만 집중했지 수요 창출력은 갖추지 못해 실패했다.
타타의 나노는 포드자동차와 같이 비고객을 공략하는 방법으로 저렴한 가격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수요 창출력에선 포드자동차와는 달랐다. 포드자동차는 저렴한 가격이 ‘싸구려’가 아니라 기술 혁신으로 인한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식하게 했다. 대중의 구매를 유도할 수 있었다. 반면 타타의 나노는 낮은 가격이 ‘싸구려’로 여겨졌다. 이런 전략은 수요 창출로 이어지지 않았다. 구매력이 낮은 비고객이 원한 것은 저가이면서도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우수한 글로벌 브랜드 소형차였다. 그냥 값만 저렴한 ‘싸구려 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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