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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로스쿨의 Negotiation Newsletter

상대의 아픔 보듬은 ‘베이커式 외교’

윤자영 | 121호 (2013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글은 하버드대 로스쿨의 협상 프로그램 연구소가 발간하는 뉴스레터 <네고시에이션>에 소개된 ‘James Baker’s Lessons in Diplomacy’를 전문 번역한 것입니다. (NYT 신디케이션 제공)

 

포드 행정부에서 상무차관을, 레이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한 제임스 베이커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부시의 신임을 등에 업은 그는 NATO에서 동서독 통일 문제를 협상하고 걸프전쟁의 다국적군 구성을 논의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마드리드 콘퍼런스에서 활약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그는 2012년 하버드 로스쿨 내 협상 프로그램과 케네디 스쿨 내 외교의 미래 프로젝트에서 공동으로 수여하는 위대한 협상가상을 받았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그는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이 시절 협상의 기초, 특히 장기간 지속되면서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부시 행정부에서 일할 당시, 그는 부시 대통령과 이미 30년간 같이 일해 온 사이였다. 그들은 1959년 휴스턴 컨트리클럽에서 테니스를 함께 치는 동료로 만났는데 아내의 권유로 부시의 정치 캠프에서 부시를 돕기 시작했다. 곧 베이커 자신의 정치 커리어도 시작됐다. 부시 대통령의 깊은 신뢰 덕에 베이커는 미국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협상에서 전례 없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내가 외국 정상과 얘기할 때 그들은 내가 부시를 대변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신뢰를 쌓는 것은 베이커식 외교 협상의 중요한 요소였다. 1990년 베이커 및 부시 대통령과 헬무트 콜 서독(西獨) 수상이 캠프 데이비드에서 가진 만남은 미국과 서독 모두 상당한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부시 대통령은 콜 수상이 통일 독일이 NATO에 가입하도록 힘쓴다면 동서독의 통일을 지원하겠다고 동의했다.

 

베이커는회담이 끝나자 콜 수상은 약속을 지켰고 우리도 약속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했다.

 

1989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부시 행정부에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었다.

 

“우리는 동유럽과 중앙유럽 국가들의 자유에 대해 40년간 얘기해왔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현실로 만들 기회가 온 것이지요. 당연히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베이커에 의하면 부시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로 미국이 사실상 냉전의 승자가 됐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축하하지 않는다는 미국 내 비판에 맞닥뜨려야 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 사실에 대해 우쭐해 하는 걸 싫어했습니다. 소련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베이커가 회고했다.

 

이 같은 요령은 부시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와 건설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부시 정부는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도록 돕기로 했다. 베이커와 다른 미국 관료들은 고르파초프가 동의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제거하려 했다.

 

“우리는 냉전을 평화롭게 종식시키기 위해서 계속 도우려고 노력했습니다.” 베이커가 말했다.

 

일례로 베이커는 자신의 설득 스킬을 모두 동원해서 NATO 회원국들이 NATO를 안보 협력체 대신 정치 협력체로 새롭게 정의하는 선언에 서명하도록 했다. 소련에 대한 NATO의 전투적 자세를 공식적으로 누그러뜨린 일, 소위런던 선언은 부시 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었다.

 

“협상의 중요한 원칙 하나는 상대편이 겪고 있는 정치적 제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베이커가 말했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 상대방이 동의하는 데 방해가 되는 내부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도우면 협상에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다. 런던 선언과 같은 제스처 덕분에 베이커와 부시 및 그들의 팀원들은 고르바초프가 독일 통일의 불가피성을 점진적으로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베이커는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 후 부시 행정부가 걸프전쟁에 대한 지원을 이끌어낸 것은 협상의 정석과 같다고 말한다.

 

“이는 냉전 후 세계 평화에 대한 첫 위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UN에 가서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얻어야 할지 우왕좌왕했지요.”

 

베이커는 다섯 번의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정치적 신뢰의 가치를 배웠다고 말한다. 만약 미국이 UN 결의를 얻지 못한다면 전혀 시도를 하지 않은 것만 못한 처지에 놓일 게 뻔했다. 베이커가 UN과 협상에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중국의 거부를 막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중국을 설득해 투표하지 않고 기권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쿠바와 예멘, 두 나라가 반대했고 중국은 기권했지요.”

 

이는 안전보장이사회가 회원국에 무력사용을 승인한 처음이자 유일한 사례였다. 베이커는 그의 팀이아랍국가에 대응하는 미국과 이스라엘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연합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한다. 베이커에 따르면 사실 부시 정부는 이스라엘이 후세인의 공격에 군사대응을 하지 않도록 설득하려고엄청 애쓰고 많이 협상했다. 좀 더 확장해보면 ‘UN 결의안을 얻을 수 있다면 이라크 대 전 세계라는 대결 구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결의안은 공화당인 부시 정부가 민주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의회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원을 얻어내는 데 도움이 됐다.

 

“우리는 의회를 동참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미국인들을 동참시키는 길이니까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과 의회 지원을 얻고도 베이커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도록 설득하는 외교적 노력을 계속했다. 이라크 정부는 베이커가 철수의 대가로 양보할 것을 요구했지만 베이커는 미국이 UN 결의에서한발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것임을 단호히 못박았다.

 

몇몇 백악관 관료들은 베이커가 부당하게 양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베이커는 말했다.

 

“나는 대통령과 완벽한 관계였습니다.”

 

번역 |윤자영 pompom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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