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이론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AS Q(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라는 학술지가 있다. 경영학의 물꼬를 바꾼 최고 수준의 지식이 소개되는 저널이다. 이런 유명 학술지에 한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가 가끔 실린다.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지고 글로벌화하면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ASQ 최근호(2007년 겨울호)에는 한국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논문이 실렸다. 하버드대 조던 시겔(Jordan Siegel) 교수가 한국의 기업과 정치 네트워크를 분석한 논문이다. 하지만 이 논문에는 한국인들의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논문의 취지는 이렇다. 지금까지 경영학계에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는 통상 기업 성과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정치권과의 네트워크가 어떤 경우에는 기업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게 시겔 교수의 가설이다.
예를 들면 최고경영자(CEO)나 회장이 전라도 출신이면 군사정권 때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또 대구 경북고 출신이 사장이라면 군사정권에서 혜택을 받았지만 YS나 DJ 정부에서는 불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시겔 교수는 한국의 각종 신문과 학술지 등을 참고해 기업 CEO나 회장의 출신 지역과 졸업한 고등학교에 따라 기업 성과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여러 가설을 세운 후 1987년부터 2003년까지 665개 기업의 데이터를 모아 통계 분석을 실시했다. 기업 성과에 대한 지표로는 외국 기업과의 제휴를 선택했다. 폐쇄 경제 시절에는 정치적 후원 없이는 외국기업과 제휴하기 어려운데다 제휴를 통해 선진 경영 기법과 노하우를 전수받아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재무적 성과의 경우 아주 많은 요인이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측정 지표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시겔 교수는 설명했다)
통계 분석 결과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과거 한국 상황을 반영했다. 전라도 출신 기업인은 군사정권 시절 해외 업체와 제대로 제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호시절을 누렸을 것 같지만 나산, 쌍방울, 거평, 해태 등 상당수 기업이 이미 어려운 처지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전라도 네트워크는 성과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 경북고 출신들은 군사정권 시절 해외 제휴선을 늘렸지만 TK세력을 견제하던 김영삼 정부시절에는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충청도 출신은 ‘DJP연합’이 이뤄진 김대중 정부 시절에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통계적 유의미성은 약했다. 이 통계 분석이 연합정권의 한계까지 설명한 것이다. 강원도 출신은 군사정권하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햇볕정책과 접경지역 지원법 등 다양한 지원책이 나온 김대중 정부 시절 해외 기업과의 제휴를 늘렸다.
기막히게 한국 상황을 반영한 이런 통계는 학술적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기업인에게 출신 지역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통제 불가능한 요소다. 이런 요소로 기업의 성과가 좌우되는 것은 분명 후진적 체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세계무역기구(WT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후에도 정치적 네트워크가 기업 성과를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이어졌다. 덕분에 시겔 교수는 경제 자유화 후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할 수 있었다. 과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이런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 글로벌 초경쟁시대 정치권과의 네트워크에 의존한다는 생각 자체가 기업의 경쟁력에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김남국march@donga.com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