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고전 읽기

기술개발하면 끝? CEO가 그 가치를 이해해라

92호 (2011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경영학이 본격적으로 학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한 경영학은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이자 현대인의 필수 교양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경영학 100년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고전들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저자들의 통찰력은 무엇인지 가톨릭대 경영학부 이동현 교수가 ‘경영고전읽기’에서 전해드립니다.
 
 
18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본격적인 기술 혁신의 서막이었다. 이후 봇물처럼 쏟아진 새로운 기술은 인류 사회와 경제 구조를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마침내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확립시키고 기업이라는 조직을 탄생시켰다. 19세기 들어 몇몇 똑똑한 기업들은 기술개발이 이윤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깨달았다. GE, 듀폰, AT&T, IBM 등의 초일류 기업들은 연구소를 기업 내에 설립하고 과학자들을 고용해 연구개발과 신기술의 상업화에 몰두했다. 이어 전구, 나일론, 전화기, 컴퓨터 등 다양한 신기술들을 사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기술개발과 특허는 사업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공식이자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인식됐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이제 기업의 핵심 성공요소로 망설임 없이 기술을 꼽는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게 있다. 기술 혁신의 대명사로 칭송받던 바로 그 초일류 기업들이 속절없이 몰락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개발의 선두주자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잘한다고 자부하던 바로 그 기술의 문제 때문에 씁쓸히 무대에서 사라지는 기이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예컨대 컴퓨터 산업을 개척한 IBM이나 미니컴퓨터 시장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디지털 이큅먼트(DEC)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컴퓨터 산업의 강자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 PC 시장에서는 애플이라는 신생 기업에 선수를 뺏겼다. IBM은 뒤늦게나마 PC 시장에 진출했지만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시장에서 철수했다. DEC는 끝까지 개인이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다가 결국 컴퓨터 산업에서 사라졌다. AT&T는 유선 전화기를 개발한 선두주자였지만 휴대폰 개발에서는 시카고에서 워키토키를 생산하던 작은 기업 모토로라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영원할 것 같았던 모토로라의 위세는 1990년대 말 핀란드의 무명 기업인 노키아에 꺾였다. 노키아 역시 최근 스마트폰 열풍 때문에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코닥은 아날로그 카메라의 추억을 가진 세대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대표적 필름, 카메라 제조 회사다. 한때 코닥은 초우량 기업의 대명사였다. 1990년대 말 디지털 카메라 붐이 확산되면서 이 회사는 침체에 빠졌다. 91년 190억 달러에 이르던 코닥의 매출액은 2010년 72억 달러로 곤두박질쳤다. 이제는 갖고 있는 기술과 특허를 팔아가며 근근이 버티는 처지가 됐다.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 교수는 1997년 출간한 저서 <혁신기업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를 통해 기업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선도기업의 실패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시했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초기에 중점적으로 연구한 대상은 컴퓨터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ard Disk Drive)였다.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는 컴퓨터가 이용하는 정보를 읽고 쓰는 장치다. 이 산업에서 중요한 기술 혁신 중 하나는 드라이브의 크기를 작게 만드는 기술이다. 즉, 하드디스크 드라이브의 크기는 줄이는 대신 저장 용량을 크게 만드는 게 기술 혁신의 핵심이다.
 
IBM이 메인 프레임 컴퓨터를 내놨을 때 14인치였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는 미니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8인치로 줄었다. PC의 급속한 확산과 함께 5.25인치로 줄더니 노트북 컴퓨터가 등장하자 급기야 3.5인치, 다시 2.5인치로 축소됐다. 문제는 이 같은 기술발전 과정에서 한 시기를 주름 잡았던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산업의 선도 기업들이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었는데도 기술 변화와 함께 도태됐다는 점이다. 즉, 14인치 드라이브 시장을 지배하던 기업이 8인치 드라이브의 도래와 함께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고 8인치 드라이브 시장을 지배하던 기업은 5.25인치 드라이브 시장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크리스텐슨 교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핵심 개념으로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의 파괴력을 제시했다. 이미 주력 시장의 고객들이 잘 알고 있는 기술 패러다임하에서 점진적으로 제품 성능을 향상시키는 지속성 기술(sustaining technology)과 달리 와해성 기술은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서 등장한 기술을 의미한다. 지속성 기술이 현재 주력 시장에서 기존 제품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기술인 반면 와해성 기술은 소수의 기존 고객이나 아예 새로운 고객들로부터만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급진적인 기술이었다. 게다가 와해성 기술에 기반한 제품은 전형적으로 더 싸고, 단순하고, 작고, 종종 사용하기에도 편리한 경우가 많았다.
 
‘전통적인 마케팅 이론에서는 경영자들이 고객의 욕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사업에 반영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와해성 기술 혁신에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경영자들은 와해성 기술이 처음에는 주력 고객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크리스텐슨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선도 기업이 몰락하는 위기의 발단은 와해성 기술의 잠재력에 관한 경영진의 판단에서 비롯됐다. PC시장의 성장과 함께 등장한 시게이트(Seagate)는 5.25인치 드라이브 시장을 지배하는 선도 기업이었다. 하지만 시게이트는 뒤이어 등장한 3.5인치 드라이브 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시게이트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빨리 3.5인치 드라이브 기술을 개발했다는 점이다.
 
시게이트 기술진이 개발한 3.5인치 드라이브의 성장 잠재력에 대해 이 회사의 경영진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당시 시게이트의 기존 고객들은 신제품인 3.5인치 드라이브보다는 기존 제품인 5.25인치 드라이브의 성능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 결과 3.5인치 드라이브의 성장 잠재력이 낮다고 봤다. 경영진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3.5인치 드라이브 관련 프로젝트를 취소해버렸다. 그들은 시장이 확실한 5.25인치 드라이브의 성능 향상에 주력하는 게 불확실한 3.5인치 드라이브를 개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고 단정했다. 그런데 무시했던 바로 그 3.5인치 드라이브가 노트북 컴퓨터의 등장과 함께 시장을 석권하면서 위기가 초래됐다.
 
이처럼 와해성 기술은 처음 등장했을 때 이미 존재하는 기술보다 성능이 낮은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기존 기술 관점에서 바라본 와해성 기술의 수준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진공관 라디오가 진짜 음질이라는 RCA 같은 기업의 비웃음을 이겨내고 라디오의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델컴퓨터도 싸구려 조립품이라는 비난을 극복하고 저가 PC를 원하는 고객들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PC 산업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다. 이처럼 경영자는 기존 제품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기술 외에도 소수지만 새로운 고객들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급진적인 기술의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가까운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기술 변화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
 
또한 경영자들은 지속성 기술에 집착하고 와해성 기술을 폄하하는 기존 조직의 특성도 잘 이해해야 한다. 선도 기업의 경영진은 그 기업의 성장을 이끈 일등 공신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지속성 기술을 발전시켜 사업을 성공시킨 사람들이다. 이들이 알고 있는 지식도 지속성 기술과 관련된 게 많다. 게다가 이들은 고위층으로 의사결정 권한의 상당 부분을 갖고 있다. 자원 배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기존 경영진에게 와해성 기술은 사업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조직 내 위상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와해성 기술을 제대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조직 문화와 단절된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력 시장을 관리하는 기존 조직은 현재 고객들이 선호하는 지속성 기술을 개선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조직에 와해성 기술을 활용한 신사업 임무를 맡기면 신사업은 주력 사업으로부터 핍박받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 차라리 신사업만 전담하는 조직을 기존 조직으로부터 분리시켜 별도의 임무를 주는 게 이런 모순을 피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실제 코닥은 1975년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 기술을 개발했다. 하지만 기존 주력제품이던 필름 시장이 잠식될까 두려워 디지털 카메라의 개발과 마케팅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디지털 카메라 제품을 내놓았고 2000년대 들어 시장의 대세는 디지털 카메라로 완전히 넘어갔다. 코닥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에 HP는 기존의 레이저 프린트 사업부에 신사업인 잉크젯 프린트를 맡기지 않았다. 별도의 사업부로 분리시켜 두 사업부를 경쟁시켰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프린트 시장에서 모두 성공을 거뒀다.
 
그동안 기술은 경영 측면보다는 주로 연구개발(R&D) 투자 차원에서 다뤄졌다. 경영자는 새로운 기술이 사업에 미치는 근본적인 영향을 이해하기보다는 투자 규모를 결정하는 데 관여했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도 경영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한다. 기술개발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개발된 기술의 전략적 가치를 올바로 판단하는 경영진의 안목 없다면 신기술은 시장은커녕 연구실 문턱조차 넘을 수 없다.
 
 
이동현 가톨릭대 경영학부 교수 dhlee67@catholic.ac.kr
 
이동현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 방문 교수로 연구 활동을 벌였다. <MBA 명강의> <경영의 교양을 읽는다: 고전편, 현대편> <깨달음이 있는 경영> <초우량 기업의 조건> 등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경영학 지식을 다양한 조직에 확산하는 일에 역량을 쏟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34호 세계관의 세계 2021년 12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