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보다 무서운 혁신 전쟁

91호 (2011년 10월 Issue 2)

 

 

경제·산업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요즘 정신 차릴 틈이 없다. 우선 유럽발 금융위기가 초미의 관심사다. 최악의 사태는 면할 것 같아 보이던 그리스 부도 위기는 자고 나면 다시 현실화돼 금융시장을 흔들어 놓는다. 주가는 널뛰기를 거듭하며 폭락하고 있다. 고환율 정책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학계와 정치권은 모두 환율 급등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유럽 금융위기만큼 언론 보도에 자주 등장하는 이슈는 주로 IT 산업과 관련돼 있다. 범위를 좁혀 휴대전화 산업만 들여다봐도 2011년 한 해에만 과거 몇 년간 변화에 필적할 만한 사건들이 이어졌다.

 

지난 2월 노키아의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븐 엘롭은 직원들에게불타는 플랫폼(Burning Platform)’이란 제목의 e메일을 보내면서 직원들은 물론노키아는 괜찮을 것이라 믿고 있던 대중을 놀라게 했다. 그는 노키아를 불길에 휩싸인 석유 시추 플랫폼에 서 있어 불에 타죽을 수도, 얼음장 같은 북해의 물속으로 뛰어들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 비유했다. 무결점 1위라고 칭송받던 노키아의 위기 원인은 무엇일까. 엘롭은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사실은 우리가 적합한 무기로 싸우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라며우리가 아직도 단말기 시장 차원에서 세분화해 접근할 때 경쟁사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개발자, 응용프로그램, 전자상거래, 광고, 검색, SNS, 위치기반서비스 등을 모두 아우르는 생태계(ecosystem) 전략으로 우리의 시장점유율을 빼앗아갔다고 말했다. 사실 노키아는 자사의 기술을 외부에 제공해 더 많은 회사들이 쓰게 함으로써 업계 표준을 장악하는 개방형 전략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했다. 그러나 단말기 시장에서의 과거 성공 방식에 얽매여 산업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애플과 구글의 개방형 생태계 전략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과거 휴대전화의 대명사로 불렸던 모토로라는 급기야 8월 휴대전화 부문을 구글에 매각했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애플에 대항하는 안드로이드 연합군의 든든한 축인 구글이 언젠가 유료화 및 독자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줬다. 노키아는 다시 한번 굴욕을 맛봤다.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 발표 후 노키아 등 일부 휴대전화 제조업체의 주가가 올랐는데 MS의 인수합병 타깃이 될 것이라는기대감때문이었다는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이 나왔다. 같은 달 HP는 더 이상 휴대전화와 태블릿PC를 만들지 않을 것이며 PC 사업도 재고하겠다고 밝혔다.

 

가을로 넘어오면서 경쟁은 더욱 격화됐다. 애플은 유력한 대항마 삼성전자를 특허 침해로 제소하면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삼성전자는 맞소송을 제기해 애플에 대항하면서 다시 MS와도 협력하고 있다. 자체 연구개발(R&D)과 인수합병으로 특허를 다수 보유한 MS와 오라클도 이미 특허를 무기로 공격을 시작한 터였다. 전자상거래 및 콘텐츠 분야 강자인 아마존은 저가 태블릿 PC를 출시하면서 애플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애플의 신화를 만든 스티브 잡스의 사망 소식은 애플의 주가를 폭락시키고 경쟁사의 주가를 올렸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단말기 제조업체 등 하드웨어 업체는 물론 소프트웨어, 콘텐츠 업계까지 모두 흔들고 있다. 자동차 등 내구재 산업, 에너지 산업, 소비재 산업에서도 이런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미래 시장을 주도하려면 개방형 협업으로 발 빠르게 기술과 아이디어를 모아 혁신하면서도 핵심 원천 기술은 내부에 보유하는 양손잡이형(ambidextrous) 비즈니스 모델을 갖춰야 한다.

 

잡스는 생전 한 연설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면서 항상 굳건하게 나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한 가지 사업만을 한 가지 방식으로 추구한 적이 없었던 그가 굳건하게 지켰던 원칙은 바로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었다. 산업의 경계마저 무너지는 초경쟁 시대에 그의 명언의 숨겨진 주어를 ‘You’에서 ‘Who’로 바꿔 달리 해석해 봐도 좋을 듯하다. “항상 배고픈 채로 남아 있는 기업은 그저 바보로 남을 것이다.”

 

“사람들은 경제위기에 파묻혀 패러다임 변화를 놓치고 있다.” 두바이월드의 모라토리엄, 고유가, 경기침체라는 삼중고 속에서도 회사를 급성장시킨 에미레이트항공 CEO 팀 클라크가 한 말이다. 세계 금융시장으로부터의 충격은 자연재해처럼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에만 매달리다가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무기로 패러다임을 바꾸는 기업들에 의해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문제는 어디서 이런 경쟁자들이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패러다임 변화는 산업 간 경계마저 무너뜨리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기 때문이다. 금융위기만큼, 혹은 그보다 더 혁신 전쟁이 무서운 이유다.

 

 

 

한인재 경영교육팀장 epicij@donga.com

필자는 듀크대 MBA와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한 후 AT 커니 코리아 컨설턴트/프로젝트 매니저, 에이빔 컨설팅 컨설턴트/매니저, 삼성생명 경영혁신팀 과장을 거쳐 현재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경영교육팀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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