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날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세계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미미하다. 세계 일류 기업을 여럿 보유하고 있지만 M&A 분야에서 세계적 흐름을 주도하는 기업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반면 중국 기업들은 지난 몇 년 사이 공격적으로 외국 기업 사냥에 나서고 있다. 금융위기 전에는 유동성 과다로 세계 M&A 시장의 과열이 심했다. 이 기간에 M&A를 시도했던 기업들은 과도한 웃돈을 지불하는 바람에 ‘승자의 저주’를 경험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거품이 꺼지면서 M&A 시장이 실수요자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기업들은 이 점을 포착, 세계 각국의 대표 기업들을 사들이고 있다. 2008년 이후 중국이 사들인 유명 기업만 해도 미국의 볼보와 델파이, 일본의 닛코전기와 혼마골프, 독일 모터 보딘, 스위스 석유회사 아닥스, 호주 광산회사 펠릭스 리소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탠더드 은행 등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런 움직임에서 뒤떨어져 있다. 한국 기업들의 해외 투자는 여전히 M&A보다 현지에서 공장을 짓고 회사를 직접 설립하는 ‘그린필드(Greenfiled)’ 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설사 현지 기업을 인수했다 하더라도 한국보다 발전 단계가 낮은 개발도상국의 기업을 사들이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리딩투자증권은 다른 한국 기업과 차별화된 M&A 전략을 수립했다. 국내 증권회사 중에서도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리딩투자증권은 일본 증권회사, 영국 브로커리지(주식 위탁 매매) 관련 업체를 잇따라 사들이며 선진국 기업 인수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리딩투자증권은 세계 경제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2008년 11월 일본의 소형 증권회사였던 지크증권(현 일본 리딩증권)을 인수했다. 이는 국내 증권회사가 일본 증권회사를 인수한 최초의 사례로 많은 화제를 낳았다. 리딩은 이에 그치지 않고 올해 초에는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브로커리지 의사결정 솔루션을 제공하는 영국의 아이앤디엑스(IND-X) 홀딩스도 인수했다. 영국과 홍콩에 자회사를 둔 INDX 홀딩스의 고객은 주로 유럽의 기관투자가들이다.
리딩투자증권은 2000년 출범해 기업 역사가 10년 밖에 안 되고, 자본금도 1500억 원에 불과하다. 자본금 규모로만 보면 61개 한국 증권사 가운데 45위에 해당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던 금융위기의 와중에 소형 증권사가 해외 M&A에, 그것도 선진국 기업 인수에 나선다는 점에 대한 안팎의 우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리딩투자증권은 치밀한 준비와 과감한 결단으로 선진 금융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했다. 적자에 시달리던 피인수 회사도 예상보다 빨리 흑자로 변모시켰다.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DBR이 서울대 CFO 전략과정과 공동으로 리딩투자증권의 지크증권 인수 사례를 통해 그 성공 요인을 심층 분석했다.
틈새시장 특화 증권사로 ‘작지만 알찬 성장’
리딩투자증권은 지난 2000년 LG증권 런던 법인장 출신인 박대혁 리딩투자증권 부회장이 설립했다. 박 부회장은 국제 금융의 중심지인 영국 런던에서 오랫동안 선진 투자 금융을 익히고 돌아와 회사를 세웠다. 설립 초기부터 리딩투자증권은 여러 모로 달랐다. 리딩은 규모의 경쟁으로는 오랫동안 시장을 선점한 대형 증권사와 경쟁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많은 비용 투자가 불가피한 지점망 위주의 영업 대신 강남 본사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토록 하는 운영 체계부터 만들었다.
특히 리딩투자증권은 해외 주식투자를 회사의 핵심 사업으로 내세웠다. 내수시장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데다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이 같은 전략을 취한 것이다. 리딩투자증권은 2002년 국내 최초로 미국 주식을 안방에서 실시간 매매할 수 있는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을 구축한 후 미국 주식 거래에 나섰다. 이후 2004년 중국, 2005년 일본, 2007년 인도네시아 및 베트남 등지로 주식 거래 가능 지역을 확대했다. 리딩투자증권이 제공하는 HTS서비스는 한 화면에서 국내외 주식거래 서비스뿐만 아니라 해외주식에 대한 다양한 분석 툴을 제공해 왔다. 대형 증권회사도 이를 벤치마킹해 유사한 시스템을 내놓았을 정도다. 현재 리딩투자증권의 해외 주식투자 부문 시장 점유율은 40%로 독보적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흥제 리딩투자증권 최고 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ng Officer)는 “주식 펀드 붐이 일어난 후 지금은 해외 주식에 직간접 투자를 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2000년대 초반 개인이 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사례는 드물었다”며 “위험을 분산하고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기회를 발굴하려면 해외 투자가 불가피한데도 이런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는 증권사가 드물었다. 창립 초기 개인이 설립한 증권회사가 얼마나 오래 가겠냐는 우려의 시선도 많았지만 우리는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리딩투자증권의 틈새시장 발굴 능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이어졌다. 리딩은 최근 몇 년간 중소기업 전문 자금 조달이라는 시장을 개척했다.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경영 안정성 강화에 초점을 두면서 가뜩이나 돈을 빌리기 힘든 중소기업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설사 가능성이 보이는 중소기업을 발견했다 해도, 상환 불능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소기업에 대출해주려는 은행들은 많지 않았다. 리딩투자증권은 제1금융권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알짜 중소기업을 발굴해 이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바로 메자닌(mezzanine) 금융이다.
메자닌 금융은 주식과 채권의 중간 형태인 전환사채(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이용해 수익을 올리는 금융 기법을 말한다. 리딩투자증권은 될성부른 중소기업을 발굴해 이들에게 CB 및 BW 발행 등을 통한 자금 조달 방법을 컨설팅했다. 틈새시장을 발굴한 일은 좋았지만 이를 통해 돈을 벌기는 쉽지 않았다. 최고경영자(CEO)를 겸직하고 있는 대부분의 중소기업 오너들은 주식 발행을 통해 자신의 지분이 낮아져 경영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또 이름없는 중소기업에 적극 투자하려는 투자자들 또한 많지 않았다. 리딩투자증권은 보유 지분 희석을 우려하는 중소기업 오너에게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한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현 단계에서 자본 확충에 나서지 않으면 기술 개발이나 생산성 향상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회사의 가치 하락으로 이어져 오너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 투자를 꺼리는 투자가에게는 대기업에 비해 신용 등급이 낮지만 기대 수익이 훨씬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리딩투자증권은 2010년 한 해 동안 동부제철 공모 BW 500억 원, KIC 공모 CB 250억 원, 모린스 사모 BW 200억 원 등 총 2000억 원에 달하는 발행 실적을 올렸다. 이는 대우, 삼성, 우리투자증권 등 메이저 증권회사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