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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일본 유통업계

위기의 일본 백화점, 이대로 몰락할 것인가?

유혁 | 52호 (2010년 3월 Issue 1)

끊이지 않는 백화점의 폐점
일본을 대표하는 번화가 동경의 긴자(銀座)는 세계 유수의 명품 매장과 일본의 대표 백화점이 집중돼 있는 일본 소비 문화의 상징이다. 동경의 긴자에 본점 또는 지점을 내는 것은 일본 대표 브랜드의 입지를 확보했다는 증거다. 1971년 큰 화제가 됐던 맥도날드 일본 1호점을 비롯해 일본에 첫 진출을 꾀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첫 매장으로 긴자를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 경제가 2008년 금융위기의 긴 터널 속에서 아직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2010년 1월 27 세이부(西武) 백화점이 긴자에 있는 유락초(有樂町)점 폐점을 선언했다. 긴자의 현관 역할을 하는 유락초에 위치한 매장의 폐점은 백화점의 위기가 그 심장부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근 일본의 주요 도심 지역에서 대형 백화점의 폐점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많은 백화점의 폐점이 예정돼 있다.(표1)
이러한 백화점의 폐점은 업계의 지속적인 합종연횡과도 관련이 있다. 2000년 소고 백화점의 파산으로부터 시작된 백화점의 통폐합은 이세탄·미쯔코시 홀딩스, 타카시마야·H2O 리테일링, 제이 프론트 리테일링(J. Front Retailing), 소고·세이부의 4개 그룹으로 재편됐다. 지속적인 매출 감소 속에서 운영 효율화가 중요 과제로 부상하자 과감한 점포 통폐합이 일어나고 있다.(그림1)

2009년 3월 기준 일본의 백화점 시장 규모는 6조 5842억 엔으로 13년째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는 정점을 기록한 1991년 9조 7125억 엔에 비하면 70%에도 못 미치며 1984년 시장 규모와 비슷한 수준이다. 일본 백화점 업계가 왜 20년 이상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사회 구조 변화가 백화점 쇠락의 요인?
백화점 쇠퇴의 이유를 유통 환경 변화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인구의 지속적인 감소와 세대원 수 감소가 소매 시장 위축으로 이어졌고 백화점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이다. 또 다양한 라이프스타일 등장으로 고객 욕구가 세분화되면서 백화점 업계는 과거보다 더욱 큰 규모의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됐다. 즉 고객 욕구에 부합하지 않거나 규모면에서 경쟁력이 없는 점포는 퇴출시켜 효율성을 높여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나 일본의 세대 구성의 변화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노무라종합연구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 소매 시장에서 ‘비정형 대가족’이라는 가족 형태가 새로운 소비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그림2) 일본 사회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대가족과 핵가족이 병존하는 가운데 단독 세대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단독 세대가 단독 세대로서의 소비 활동을 보임과 동시에 타단독 세대 또는 기존 핵가족 세대와 경제적인 의존 관계를 형성하면서 비정형 대가족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이러한 경향은 더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로 나타나고 구매 욕구와 구매 시간의 복잡성을 증가시켰다. 결국 소비자들은 기존 백화점이 제공하던 가치와는 다른 물품 제공 기능, 정보 제공 기능, 문화 엔터테인먼트 기능의 통합을 요구했다. 이런 경향은 백화점의 전문화 및 대형화 경쟁을 심화시켰다. 현재 일본 내에 3000여 개 쇼핑 센터가 존재하고 이들 전문 쇼핑 센터들이 백화점 주변 지역은 물론 주택가에까지 침투한 것은 백화점의 쇠퇴와 무관하지 않다.
선순환 구조의 위협 요인을 차단하라
하지만 유통 환경의 변화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항상 존재해왔다. 또 앞서 설명한 사회 구조적 변화가 아주 특별해 기존 패러다임을 완전히 새롭게 바꾼 것은 아니다. 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대응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매 기업으로서 소홀해서는 안 되는 필수 기능이다. 지배적 소매 기업이 시장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혁신자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시장 내 입지에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의 백화점은 지배적 소매 기업으로서 시장 우위 유지를 위한 변화 대응을 충분히 하지 못했고 고객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좋은 사례가 위탁 매입제의 고수다. 이는 특히 매출 감소폭이 큰 백화점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위탁 매입제는 진열한 상품 중 팔린 제품만 정산을 하고 남은 제품은 제조사나 브랜드 관리 업자에 반품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별도의 경영 자원 투입이나 상품 단위의 머천다이징 (MD)기능이 필요치 않아 효율적이라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위탁 매입제로는 고객의 감성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백화점에서 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는 판매된 물건 정도이고, 반품되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또 어차피 반품 리스크는 제조사가 책임지기 때문에 백화점이 고객 성향을 자세히 파악해야 할 인센티브도 별로 없다. 물론 고객 판매 데이터를 활용해 과거 판매 실적을 분석하고, 특정 고객층에게 인기가 많은 브랜드, 특정 상품군을 진열해야 하는 시기, 프로모션 타이밍 등은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고객의 감성을 움직이는 요소인 디자인, 컬러, 소재, 프린트 등의 유행 변화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매장의 신선도 유지를 중요 전략으로 하는 편집숍(select shop), 카테고리 킬러(category killer),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인터넷 패션 전문점 등의 등장으로 고객이 감성을 충족시킬 채널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객이 원하는 상품을 제공하지 못한 백화점에 다시 찾아올 이유는 별로 없다.
 
여기서는 고객 감성 만족만 예를 들었지만 경영난에 봉착한 대부분의 백화점들은 고객에게 줄 수 있는 자신만의 차별화 가치가 무엇이고, 그 가치를 어떻게 키워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부재했다. 이를 위한 경영 자원 투입도 소홀했다.
 
시장 우위를 유지하려는 소매 기업은 항상 외부 요인의 위협을 받는다. 외부 위협 요인을 차단하고 경쟁 우위의 선순환 구조를 유지하는 것은 자신만의 경쟁력을 잘 이해할 때 가능하다.(그림3) 백화점 업계가 전반적으로 쇠퇴의 길을 가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백화점들이 가치 혁신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 백화점의 통폐합 및 수직 계열화는 백화점이 갖는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가치 혁신 없이 규모 확대나 부분적인 기능 획득만으로 위기를 타개하려는 전략은 가격 등에 있어 소모적인 경쟁만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경쟁 우위를 유지하는 선순환 구조를 재구축하려면 우선 비용 구조 개선을 통한 철저한 효율화를 추진해야 한다. 둘째, 백화점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쇼핑 센터나 전문점 등과의 과감한 협업 체계 구축을 검토해봐야 한다. 셋째, 백화점의 협상력을 되찾기 위해 내수 시장에서는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공격적 입지 개발을 해야 하고, 동시에 적극적인 해외 진출도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체 관리 브랜드를 도입 개발 육성하고 고객 행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다른 업체와의 차별화를 이뤄야 한다.
 
지나온 100년, 새로운 100년
한국의 백화점들은 고객 욕구의 복잡화·고도화에 부응하기 위해 신세계 센텀시티점과 영등포 타임스퀘어와 같이 대형화와 복합화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직매입의 확대, 전문점이나 명품 매장 및 대형 할인점 운영, 패션 브랜드 사업으로의 진출 등 기존 백화점 사업자로서는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으로 보였던 영역에도 뛰어들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기존 백화점들이 제공하는 가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소비자의 변화를 제때 이해하고 전략적 방향을 잘 설정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세이부 백화점 긴자 유락초점의 과거 전략을 잘 들여다보면 이번 폐점 선언이 한국 소매 시장에 특별한 의미를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이부 백화점의 긴자 유락초점 또한 1990년대부터 패션 전문점 형태를 지향하면서 고객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쉼 없는 개혁을 추진해왔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세이부 백화점 긴자 유락초점은 MD를 비롯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고객과의 접점은 전문점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근본적인 백화점 운영 형태는 바꾸지 않았다는데 그 패인(敗因)이 있다. 전문점의 가치 사슬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남은 재고는 도매상에 떠넘기면 된다는 기존 운영 방식만 고수해서는 전문점의 차별화된 역량을 갖출 수 없다. 고객에 대한 이해도 떨어지고, 기획에서 판매에 이르는 시간 단축도 결국 경영자의 훈계나 서랍 속 기획서에서나 접하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일본 백화점들은 오랜 성장기 동안 시장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물론 일본 백화점들이 이대로 몰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계 어느 시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높은 서비스 수준과 매장 운영 능력을 갖추고 있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재도약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적시(適時) 대응을 놓친 상황에서 문제 해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설사 이에 성공한다고 해도 과거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한국 백화점들은 지난 100년간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문화로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다. 새로운 100년에도 이들 백화점이 우리 생활의 중심에 서 있을 수 있을지 아니면 변화 시기를 놓쳐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지는 앞으로의 전략에 달려 있다.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 조짐이 보이고 있는 국내 백화점이 일본처럼 과거 성공 경험에 얽매여 고객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혁신에 실패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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