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몰 중심의 D2C 모델 정착시켜
홈 뷰티 디바이스로 틈새 공략
Article at a GlanceK뷰티 기업 에이피알은 창업 10여 년 만인 올해 8월 시가총액 기준으로 ‘K뷰티 공룡’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을 제치며 국내 화장품 업계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에이피알은 창업 초기부터 자사몰 중심의 D2C 모델을 정착시키고 SNS 기반 비디오 커머스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 자사 제품의 카피캣 범람을 계기로 경쟁사가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을 모색한 끝에 홈 뷰티 디바이스 ‘에이지알(AGE-R)’을 론칭하며 카테고리를 확장했다. 이는 기존 피부과 시술 시장의 고가·고품질 중심 구조 속에서 ‘충분한 성능(Good enough)’과 높은 접근성으로 비소비자층(non-consumption)을 끌어들이는 파괴적 혁신 경로에 진입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이후 에이피알은 자체 공장과 R&D센터 ‘ADC’를 설립하는 등 ‘제품 기획-R&D-임상 효능 검증-생산’까지 전 밸류체인을 내재화하며 기술 및 IP 경쟁력을 확보했다.
올해 8월 국내 증권가에 뷰티 업계를 뒤흔든 소식이 전해졌다. 2014년 창업해 업력이 10여 년에 불과한 에이피알이 ‘K뷰티 공룡’ 아모레퍼시픽의 시가총액을 추월한 것이다. 에이피알은 지난해 2월 코스피에 상장한 지 약 1년 반 만에 주가가 250% 이상 올라 올해 8월 6일 종가 기준 시총 7조9322억 원을 기록하면서 국내 화장품 업종 시가총액 1위였던 아모레퍼시픽(7조5339억 원)을 제쳤다. 주가 상승은 이후에도 계속돼 12월 1일 기준 시총은 9조3000억 원에 달한다. 오랫동안 국내 화장품 산업의 상징처럼 자리 잡아온 전통 강자를 K뷰티 스타트업인 에이피알이 시총 기준으로 역전했다는 소식은 시장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매출 규모만 놓고 보면 여전히 아모레퍼시픽이 아성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2024년 매출 4조2599억 원, 영업이익 2493억 원을 기록했고 에이피알은 같은 기간에 매출 7228억 원, 영업이익 1227억 원을 기록했다. 에이피알의 매출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더 높은 기업 가치가 형성돼 있다는 것은 에이피알의 성장 가능성과 사업 모델의 확장성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잘 파는 화장품 브랜드를 넘어 뷰티 디바이스, 의료기기까지 아우르는 뷰티테크 기업으로의 진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시가총액에 선반영된 셈이다.
실제로 에이피알은 2014년 첫 화장품 브랜드 에이프릴스킨 론칭을 시작으로 2016년에는 더마 코스메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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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메디큐브(medicube)를 론칭했다. 이내 대표 상품인 ‘제로모공패드’를 히트시키며 기능성 스킨케어 시장에서 확실한 입지를 다졌다. 이후 메디큐브라는 단일 브랜드 아래에서 다시 한번 카테고리 확장을 시도하면서 2021년 홈 뷰티 디바이스 브랜드 ‘에이지알(AGE-R)’을 출시해 피부과 시술을 대체·보완하는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에이피알의 화장품 및 뷰티 디바이스 에이지알은 국내는 물론 해외 소비자의 호응을 얻으며 꾸준히 성장해 2024년 12월 31일 기준 해외 매출 비중이 55%로 국내 매출을 넘어섰다.
에이피알은 어떻게 기존의 전통적인 뷰티 공룡기업을 위협하는 신흥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을까. DBR이 에이피알 최고재무책임자(CFO) 신재하 부사장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D2C 브랜드에서 시작해 파괴적 혁신 경로에 진입하고 있는 에이피알의 성장 전략을 분석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D2C 브랜드의 탄생2000년대만 해도 국내 뷰티 시장의 룰은 명확했다. ‘좋은 자리에 먼저 들어가는 브랜드가 이긴다’는 것이었다. 미샤, 더페이스샵, 네이처리퍼블릭 등 단일 업체의 화장품을 판매하는 저가형 로드숍 점포가 성행했고 명동, 홍대, 강남 등 서울 금싸라기 땅에는 원브랜드 로드숍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원브랜드 로드숍의 성공 공식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건 H&B스토어의 등장이었다. 국내 대표 H&B스토어인 올리브영은 2010년대 초반 점포를 연간 50개씩 새로 열면서 투자를 확대했다. 다양한 뷰티 브랜드가 입점한 H&B스토어는 한정된 브랜드들이 리뉴얼만 반복하는 원브랜드숍 시장에 권태를 느낀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올리브영 같은 H&B스토어는 클리오, 메디힐 등 국내 중소 브랜드와 키스미, 메이블린 같은 수입 브랜드 등 신선한 브랜드와 다양한 제품을 제공하며 소비자들의 갈증을 해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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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H&B스토어의 성장은 뷰티 시장에서 ‘언더독의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H&B스토어가 신규 중소 뷰티 브랜드들의 유통 채널이 되고 자체 공장 없이도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 ODM을 통해 고품질 화장품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자본과 매장 네트워크가 부족한 신생 브랜드들이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기획력과 감각이 뛰어난 중소 브랜드들이 빠르게 소비자 접점을 확보하며 기존 강자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화장품 시장이 신생 브랜드의 대거 유입으로 지형이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에이피알은 기존의 성공 공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대부분의 중소 브랜드가 올리브영 등 H&B스토어 입점을 목표로 할 때 에이피알은 처음부터 자사몰 중심의 D2C (Direct-to-Consumer) 모델을 구축했다. 에이피알이 이런 비전형적인 전략을 택한 데는 김병훈 창업자의 독특한 경력 배경이 영향을 줬다.
1988년생인 김병훈 대표는 대학 시절부터 창업을 꿈꾸며 여러 차례 도전에 나선 전형적인 ‘언더독 창업가’였다. 그는 연세대 경영학과 재학 시절,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머무르던 시기에 처음 본격적으로 사업 아이디어를 탐색했고 알람 앱, 커플 앱, 소셜 데이팅 앱 등 4년간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했다. 하지만 초기 아이템들은 시장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지 못했고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을 통해 그가 깨달은 건 ‘블루오션이 사실은 데드오션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소비자가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는 아무리 기발해도 살아남기 어려웠고 블루오션처럼 보이는 시장일수록 실제로는 니즈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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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의 시도와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은 온라인 광고 에이전시였다. 그는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마케팅 플랫폼이 막 성장하던 시기에 일찌감치 뛰어들어 뷰티, 패션 등 여러 브랜드의 광고를 집행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광고 성과는 좋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고객사는 첫 달 매출이 급증하는 경험을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두 번째 달부터 매출이 급격히 떨어지는 패턴이 반복된 것이다. 소비자가 광고를 보고 제품을 구매하지만 정작 제품의 품질과 효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재구매로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이 경험은 그가 직접 화장품 판매업에 뛰어드는 계기가 됐다. 광고로 주목을 끌 수 있지만 좋은 제품 없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2014년 10월 그는 첫 화장품 브랜드 에이프릴스킨을 론칭했다.
처음으로 출시한 제품은 커버력이 강한 ‘매직스노우쿠션’이었다. 에이피알은 처음부터 매장이나 타 유통 채널 기반이 아닌 자사몰 중심의 D2C 모델을 구축하고 SNS를 중심으로 한 디지털 소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것이란 확신 아래 비디오 커머스형 마케팅에 주력했다. 신 부사장은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모바일로 향할 것이란 디지털 전환 흐름을 읽고 발빠르게 움직였다”고 말했다. 매직스노우쿠션은 SNS에서 10∼20대에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들이 모델이 돼 제품을 사용하고 직접 효과를 보여주는 영상이 바이럴되면서 소비자들의 입소문을 탔다. 소비자가 단순히 제품 외형을 보는 것이 아닌 피부에 바르고 변화가 생기는 장면을 SNS 영상으로 생생하게 확인하면서 ‘나도 써보고 싶다’는 욕구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 영상에 첨부된 링크를 타고 들어가 쉽게 구매할 수 있게 하면서 자연스레 자사몰 구매 전환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에이프릴스킨을 통한 창업 첫해 매출은 2억 원에서 이듬해 125억 원으로 급성장했고 매출의 90%가 자사몰에서 발생했다.
카피캣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에이프릴스킨의 성공을 발판 삼아 2016년 4월에는 두 번째 뷰티 브랜드 메디큐브를 론칭했다. 더마 코스메틱 브랜드인 메디큐브는 처음부터 기능성 스킨케어 시장을 공략했다. 피부 문제 고민 해결을 위해 큐브를 풀듯 계속 노력한다는 의미가 담긴 사명에 걸맞게 소비자가 피부 변화의 효과를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브랜드의 핵심 전략이었다. 그 전략이 결정적으로 구현된 제품이 바로 ‘제로모공패드’였다. 제로모공패드는 패드에 토너가 미리 적셔진 형태의 올인원 스킨케어 제품이다. 둥근 패드로 얼굴을 닦아 피붓결을 정돈하거나 피부에 올려 팩처럼 사용할 수 있는, 당시 시장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스킨케어 제품이었다. 패드 형태의 편의성은 유지하되 피지와 모공 속 잔여물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스팟 팩’ 역할까지 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에이피알은 2017년 메디큐브의 제로모공패드를 아마존에 처음 선보이며 해외 진출의 첫 시동을 걸었다. 신 부사장은 “에이피알은 K뷰티의 수출 가능성을 엿보고 초기부터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시작한 사업”이라며 “단순히 규모가 큰 해외 시장이 아닌 한국처럼 온라인 이커머스 생태계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고 말했다. 결제 시스템, 배송 인프라, 플랫폼의 신뢰도 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에이피알이 가진 온라인 기반 D2C 모델의 경쟁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당시 베트남 등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는 가짜 플랫폼, 결제 오류, 배송 사고 등이 빈번해 온라인 전환이 쉽지 않았다. 이에 에이피알은 2018년 미국, 일본, 중국,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 이미 안정적 마켓플레이스와 이커머스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 6개국에 해외 법인을 일찌감치 설립해 글로벌 시장 기반을 다졌다.
제로모공패드를 출시한 이듬해인 2018년 에이피알의 해외 매출이 103억 원을 기록하고 2019년 384억 원으로 뛰는 등 성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러나 에이피알은 곧 예상치 못한 역풍을 맞았다. 제로모공패드가 시장에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자 유사 제품들이 우후죽순 쏟아진 것이다. 특히 에이피알은 자사몰 중심의 D2C 채널에 주력했는데 이 틈을 파고들어 일부 H&B스토어들은 다른 브랜드에 메디큐브와 비슷한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 보라고 요청하며 제로모공패드와 유사한 카피캣 제품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제로모공패드가 히트 상품이 되자 제조 역량이 높은 OEM, ODM 공장들이 순식간에 유사 제품을 생산해 H&B스토어 매대에 진열되기 시작했다. 제로모공패드가 인기를 끌수록 오히려 가격이 더 낮은 모방 제품들이 더 넓은 매대를 차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카피캣의 범람은 에이피알에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국내 화장품 산업의 구조상 단순히 패키징, 성분, 제형 혁신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우위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제품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도 타사가 형태, 제형, 성분을 조금만 변형해 출시하면 특허를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에이피알 역시 제조를 OEM사에 위탁하고 있는 만큼 화장품 제조와 판매가 분리된 OEM, ODM 중심의 생태계에서는 기술, 레시피의 귀속이 모호하다는 문제도 있었다. 신 부사장은 “타사가 모방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이동해 비가역적 혁신을 이뤄내야 했다”며 “이때부터 에이피알 내부에서는 ‘경쟁사가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카테고리는 무엇인가?’라는 전략적 질문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피부과 시술의 틈새를 파고든 ‘파괴적 혁신’눈에 들어온 건 뷰티 디바이스였다. 당시 글로벌 화장품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CAGR)은 3~4% 수준에 머물렀고 물가 상승률을 제외하면 실질 성장은 2% 남짓에 불과했다. 이미 포화 단계에 이른 화장품 시장에서 가격과 마케팅 경쟁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 있는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반면 같은 기간 홈 뷰티 디바이스와 의료기기 시장은 연 10~25%씩 성장하며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울쎄라, 슈링크, 써마지 등 피부 미용 목적의 의료기기 시장이 확대되며 피부과 시술 시장 역시 급성장하고 있었다. 점 제거, 토닝 수준에 머물던 기존 시술을 넘어 리프팅, 타이트닝 등 본격적인 안티에이징 시술이 대중화됐다. 이런 변화는 소비자 지출의 흐름까지 뒤바꿨다. 과거에는 비싼 화장품을 더 두껍게 바르는 것이 안티에이징 방법이었다면 피부과 시술을 받는 것이 소비자 사이에서 새로운 루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부과 시술은 여전히 구조적 제약이 큰 상황이었다. 한국과 비교했을 때 대부분의 해외 국가에서 피부과 시술은 고가의 비용이 든다. 가령 고주파 리프팅 시술인 써마지의 경우 한국에서는 시술 비용이 90만~200만 원인 데 반해 미국에서는 360만~730만 원(2500~5000달러)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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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선 피부과 방문을 위해 차로 4~8시간 이동해야 하는 등 접근성도 떨어지고 의료진의 숙련도 역시 큰 격차를 보인다. 반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미용 의료 기술을 도입하고 장비를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뷰티 선진국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국의 피부과 시술 품질은 세계적 수준으로 고도화돼 외국인 의료관광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에이피알은 이런 변화 속에서 뚜렷한 기회를 봤다. ‘피부과에서만 받을 수 있던 시술을 집 안에서 안전하게 구현할 수 있다면 시장은 완전히 새로 열린다’고 판단한 것이다.
에이피알은 2021년 3월 홈 뷰티 디바이스 전문 브랜드 ‘메디큐브 에이지알’을 론칭하며 경락 마사지 기능을 담은 ‘더마 EMS샷’을 출시했다. 이어 2022년에는 리프팅 시술 기능의 ‘유쎄라 딥샷’, 레이저 및 프락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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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술 기능을 제공하는 ‘ATS 에어샷’, 피부 광채 케어 전용 ‘부스터 힐러’를 출시했다. 에이피알이 출시한 홈 뷰티 디바이스 에이지알은 집에서 세안 후 스킨케어 제품을 바르고 사용자가 기기를 얼굴 라인을 따라 천천히 쓸어 올리기만 하면 되는 편의성이 강점이었다. 피부과에 방문하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효과적으로 피부 관리를 할 수 있는 에이지알은 점점 소비자들의 입소문을 타며 출시 첫 해 5만여 대에 그쳤던 연간 기기 판매량이 이듬해인 2022년 약 60만 대로 증가했다.
에이지알의 초기 성공은 단순한 신제품 히트를 넘어 에이피알이 기존의 고가·고품질 중심 피부과 시술 시장의 ‘하단부(Low-end)’를 공략해 ‘파괴적 혁신’ 경로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탄이었다.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 개념을 주창한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경영대학원 교수에 따르면 파괴적 혁신자는 기존 제품 대비 저렴하고 단순한 대안으로 기존 시장의 하단부(low-end)를 공략하거나 기존 제품이나 서비스가 너무 비싸거나 접근성이 낮아 소비 자체가 불가능했던 비소비(non-consumption) 집단을 새로운 시장으로 끌어들인다. 에이피알은 시간을 내 피부과를 예약,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 통증에 대한 두려움이나 시술 과정에 대한 부담, 지리적 제약 등으로 인해 관심은 있지만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비소비 집단을 에이지알 기기를 통해 홈 뷰티라는 새로운 시장으로 끌어들였다. 집에서 원하는 시간에, 짧게는 5분에서 10분만 투자해 반복적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기존 시장 밖에 머물러 있던 비소비자층을 흡수한 것이다.물론 집에서 사용하는 기기 특성상 출력을 피부과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위험하기에 에이지알 기기가 의료 시술을 완전히 대체할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에이지알은 기존 피부과 시술 시장에서 시술 효과는 원하지만 비용이나 접근성 면에서 부담을 크게 느끼는 소비자층, 즉 로우엔드(low-end) 사용자를 공략해 20만~30만 원대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기기로 피부과 시술과 스킨케어 사이의 적절한 효능을 제공하며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즉 피부과 시술이라는 고가 시장의 틈새에서 출발해 크리스텐슨 교수가 말한 파괴적 혁신자의 전형적 특성인 ‘충분한 성능(Good enough)’과 저렴한 가격, 높은 접근성으로 시장 지형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전 밸류체인 내재화로 경쟁력 강화파괴적 혁신자는 시장 하단부에 머물지 않는다. 크리스텐슨 교수에 따르면 진정한 파괴(disruption)는 기술과 성능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기존 주류 시장의 ‘성능 기대치’를 따라잡을 때 완성된다. 에이피알 역시 1세대 제품이 가진 ‘충분한 성능’ 수준을 넘어 2세대 에이지알부터는 기술과 성능을 본격적으로 개선하고 있다. 에이피알은 기존의 에이지알 1세대 제품을 OEM 방식으로 제조했다. 홈 뷰티 디바이스 관련 경험이 많은 OEM사가 없었던 탓에 전자체온계, 전자담배 업체들과 함께 만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에이피알이 요구하는 기술 수준을 OEM사가 따라오지 못하기 시작했고 관련 기술 및 IP 귀속 문제도 생겼다. 결국 디바이스의 핵심 기술을 내재화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경쟁우위를 가지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에이피알은 에이지알 2세대부터 R&D–설계–제조–임상–사후관리까지 전체 밸류체인을 내재화하는 전략적 전환을 단행했다. 2023년 7월 뷰티 디바이스 생산 시설 ‘에이피알팩토리 제1공장’을 준공한 후 첫 자체 생산 뷰티 디바이스인 ‘부스터 프로’를 출시했다. 단순한 생산 방식의 변화를 넘어 기기 성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엔진을 회사 내부에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부스터 프로는 기존 1세대 제품이 제공하던 기능을 기기 하나에 올인원으로 모두 담았다. 토닝 광채 케어 기능의 ‘부스터 모드’, 콜라겐 생성을 촉진해 주름 라인에 볼륨을 더하는 ‘미세전류 모드’, 얼굴 근육을 자극해 윤곽을 관리하는 ‘더마샷 모드’, 모공 탄력을 관리하는 ‘에어샷 모드’ 등 네 가지 모드를 탑재했다.
또한 1세대 제품에서 축적된 소비자 피드백도 신제품에 적극 반영했다. 기존의 OEM 구조에서는 에이피알이 원하는 기능 개선을 빠르게 적용하기가 어려웠다면 밸류체인을 내재화한 후에는 소비자의 개선 요구가 제품에 즉각 반영됐다. 예컨대 “기기에 스크린이 있으면 좋겠다” “기기를 블루투스로 연결할 수 있게 해달라” 등 1세대 제품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모아 자체 생산한 2세대 제품에 반영했다.
또한 에이피알은 자체 연구개발(R&D) 센터인 ADC(APR Device Center)를 통해 원천 기술을 내재화하고 있다. 기존 뷰티 디바이스 시장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은 약한 전류의 음(-)극과 양(+)극으로 화장품 성분을 이온화해 피부에 침투시키는 ‘갈바닉(Galvanic)’ 방식이다. 갈바닉 방식은 비타민 C처럼 분자량이 상대적으로 작은 성분만 해리할 수 있어 침투력과 적용 범위에서 한계를 가진다. 반면 ADC는 피부 인지질층에 자극을 주고 인지질층이 벌어진 틈 사이로 영양분을 넣는 기술을 개발해 더 뛰어난 침투력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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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ADC 소속 석·박사급 인력 30~40명이 기존 뷰티 디바이스 개선, 신규 디바이스 개발, 관련 특허 출원까지 총괄하고 있다. 2025년 3분기 기준 에이피알은 국내 111개, 해외 198개 특허를 출원 및 등록했다.
나아가 에이피알은 뷰티 디바이스의 효능도 연구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에이피알 기업부설연구소인 글로벌피부과학연구원은 ‘부스터 프로’ 관련 인체 적용 시험을 직접 설계·수행하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해 국내 학술지인 『한국미용학회지』에 등재했다. 의공학대학과의 협력 연구도 확대하고 있다.
뷰티 디바이스 넘어 의료기기까지토털 안티에이징 솔루션을 향해에이지알 2세대를 기점으로 전 밸류체인을 내재화한 에이피알은 뷰티테크 기업으로 본격 진화하고 있다. 특히 피부과 시술의 접근성이 낮은 해외 시장에서의 반응이 뜨겁다. 헤일리 비버, 켄달 제너, 카일리 제너 등 세계적인 인플루언서가 에이지알을 사용하는 모습을 올린 SNS 영상이 바이럴되며 글로벌 소비자들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해외 시장에서의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2024년 12월 31일 기준 에이피알의 매출 비중은 화장품 및 뷰티 47%, 홈 뷰티 디바이스 43%이며 국내 45%, 해외 55%로 해외 매출이 국내를 넘어선 상황이다.
에이피알은 현재 미국, 일본, 중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 등 홈 뷰티 디바이스 시장이 이미 형성된 국가에서는 D2C 자사몰 방식으로 직접 진출해 판매하고 그렇지 않은 국가는 B2B 형태로 진출하는 투 트랙 전략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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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B 형태는 실리콘투, 예스아시아 등 글로벌 유통 전문회사를 통해 진입장벽을 낮추고 시장 적합도를 빠르게 검증하는 방식으로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글로벌 넘버원 안티에이징 스킨케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에이피알은 항노화 신소재 기반의 헬스케어·스킨부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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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으로 확장하는 중장기 전략도 병행하고 있다. 에이피알은 최근 조직 재생과 항염 효과로 주목받는 PDRN·PN 소재의 자체 생산에 착수하며 스킨케어–뷰티 디바이스–의료·헬스케어로 이어지는 새로운 성장축을 마련하고 있다. 경기도 평택에 구축한 1296평(약 4284㎡) 규모의 자체 생산 시설은 PDRN·P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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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료 생산은 물론 향후 스킨부스터 형태의 다양한 제품까지 생산할 예정이다.
이 같은 PDRN·PN 생산 역량을 기반으로 에이피알은 단계적으로 ‘PDRN 밸류체인’을 완성할 계획이다. 우선 PDRN·PN 원료를 외부 제조사에 공급하는 B2B 소재 사업에 진출하는 동시에 메디큐브 브랜드를 통해 자체 생산한 PDRN이 함유된 앰풀·크림 등의 화장품을 출시해 소비자 접점을 확대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관련 의료기기 품목 허가를 확보해 PDRN·PN 적용 범위를 의료기기인 ‘스킨부스터(피부)’ 영역까지 확대해 뷰티 헬스케어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화장품과 홈 뷰티 디바이스를 넘어 재생의학 기반의 고부가가치 분야에까지 밸류체인을 확대하려는 에이피알의 파괴적 혁신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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