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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4. 게임 창작 생태계의 변화

“게이머 입맛대로” 제작 도구 제공
창의성 주도권,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경혁 | 346호 (2022년 0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게임 엔진이 발전하면서 소수의 인원도 디지털 게임을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게임의 제작-수용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유니티, 언리얼 같은 전문 게임 엔진은 게임 이외의 분야로 진출하는 한편 로블록스와 같은 게임 플랫폼은 이용자에게 콘텐츠 제작 도구를 제공하고 결과물의 수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광범위한 소비자를 창작자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앞으로 창의성의 주도권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이동하는 경향이 강화될 것이며 기업은 소비자의 창의성을 독려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해야 한다.



2019년 정식 출시된 카드 기반 전략 게임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출시 후 꽤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수많은 게이머의 입에 회자되는 명작으로 남았다. 판매량 또한 만만치 않아 얼리억세스(정식 발매 이전의 판매)만으로 100만 장을 달성했고, 정식 발매 이후에는 150만 장의 판매량을 보였다. 명작으로 소문이 나고 유사한 장르의 게임들이 잇달아 출시되면서 게이머들의 입소문을 탄 덕에 ‘슬레이 더 스파이어’는 아직까지도 유의미한 판매량을 보이는 ‘롱테일’ 게임의 대표작으로 거론된다.

200만 장을 팔아 치운 이 게임은 그럼 얼마나 많은 제작비를 들였을까? 걸핏하면 수백 명이 넘어가는 스태프가 투입되는 요즘의 대형 게임을 상상하면 놀랍게도, 제작사인 메가크릿게임즈는 단 두 명으로 이뤄진 초소형 스튜디오다. 게임 자체가 대작 게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한 그래픽이니 그럴 수 있는 걸까?

한편 최근 게임 커뮤니티 등지에서 큰 화제를 모은 한국의 소규모 개발사 류프로덕션은 ‘프로젝트 류’라는 이름의 게임 데모를 선보였다. 서울 도심의 구석구석을 마치 실사처럼 담아낸 그래픽에 모두가 놀란 이 결과물은 단 6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개발팀에 의해 만들어졌다. 더 이상 게임 개발에 대규모 제작 시스템이 필수가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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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상품의 시대에 이르러 혼자 작업하는 고독한 창작자의 시대는 저무는 것처럼 보였다. 게임 한 편의 제작 참여 명단에 수백 명의 이름이 올라가는 시대가 대세를 이뤘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규모 제작의 반대편에서 다시 또 혼자 게임을 제작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이런 작은 프로젝트들의 결과물이 상업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대작 게임만이 정답은 아님을 입증했다.

방대한 제작을 소규모 팀으로도 가능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게임 엔진이 있다. 현대 디지털 게임 제작 환경에서 게임 엔진의 역사는 갈수록 방대해지는 콘텐츠 제작 비용의 효율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대규모 제작의 시대를 지나 어느새 게임 제작 환경은 특출한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발달한 제작 도구들을 통해 보다 효율적인 제작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는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단지 게임뿐 아니라 오늘날의 콘텐츠 업계 전반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방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작 환경을 가능케 한 게임 엔진의 등장과 발전, 현재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게임이라는 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대중문화 산업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새로운 트렌드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게임 엔진의 시작과 발전

최초에는 지금의 jpg 파일보다도 작은 용량으로 작동했던 디지털 게임은 오늘날 게임 하나에 수십 기가바이트에 이르는 방대한 용량으로 변화했다. 제작 분량이 늘어남에 따라 제작 시간과 해야 할 일들 또한 크게 증가했는데 대규모 콘텐츠 산업이 된 오늘날의 게임 제작 환경은 그렇기에 개발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별도의 도구를 필요로 했다. 게임 엔진이란 그런 게임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일련의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말이다.

3차원 기반의 사람 캐릭터 하나가 걸어가는 장면을 게임으로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먼저 실제 사람의 신체와 유사한 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이 모델은 그냥 외형만을 닮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실제 수행할 수 있는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관절 등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모델이 완성되면 이 모델이 자세를 취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필요하고, 단순한 뼈대뿐 아니라 근육과 피부, 복장 같은 외형을 덧씌워야 한다. 실제로 그 캐릭터가 걸어가야 할 지형도 만들어야 하고, 중력에 의해 캐릭터가 땅에 발을 딛거나 옷, 머리카락 등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효과까지도 프로그래밍해야 한다.

하지만 오직 하나의 게임만을 위해 이 모든 과정을 게임마다 개별적으로 만드는 일은 아무래도 부하가 크게 걸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게임 엔진이다. 게임 엔진은 여러 게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요소들인 사람 캐릭터, 무기와 의복, 지형과 물리현상 등을 사전에 세팅해 두고 여기에 간단한 조작을 통해 개별 게임이 특성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프로그래밍 도구다. 이렇게 미리 만들어진 프리세트 개념의 게임 엔진을 활용하면 가장 기초적인 영역에 들어가는 리소스를 크게 줄일 수 있어 게임 개발 전체의 시간과 비용을 효율화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대규모 게임 프로젝트는 상당수가 게임 엔진을 활용해 이뤄지고 있다.

게임 개발 초창기였던 1990년대에는 게임 엔진이라는 거창한 이름 대신 개발사가 자신들이 만든 게임을 좀 더 손쉽게 편집하고 수정할 수 있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시도들이 있었다. 사내에서 쓰기 위한 용도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어드벤처 게임의 명가였던 루카스아츠가 어드벤처 게임들을 쉽게 제작하기 위해 SCUMM(Script Creation Utility for Maniac Mansion1 , 매니악 맨션 제작을 위한 스크립트 도구)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이자 개발 환경을 제작한 것이 그 사례 중 하나다. 이런 도구는 ‘매니악 맨션’ 하나의 게임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원숭이 섬의 비밀’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유사한 여러 편의 게임을 만드는 데 활용되면서 상당한 효용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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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D 기반 그래픽이 3D로 중심을 옮기면서부터 게임 엔진의 활용도가 더욱 커졌다. 3차원 공간의 설계와 구성, 그 공간 안에 작용하는 중력의 문제 등은 대부분의 게임에서 공통적으로 쓰이지만 개별 게임마다 이를 만드는 일은 2D 기반 게임보다 훨씬 많은 작업량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둠’ 제작에 쓰인 이드테크(id-tech) 엔진, ‘언리얼’ 게임 시리즈 제작으로 시작됐지만 본편인 게임보다 엔진이 더 유명해진 언리얼 엔진 등이 이 무렵에 탄생했다. 3D 그래픽 기반의 게임에서 게임 간의 공통 요소가 크게 늘어나면서 게임 제작 도구들은 좀 더 통합적인 개발 환경 전반을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게임 엔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부터 특정 회사가 자사의 게임을 제작하는 것뿐 아니라 아예 라이선스를 타 회사에 제공함으로써 게임 제작 도구를 판매하는 형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전문 게임 엔진의 타 분야로의 확장:
유니티와 언리얼

게임 엔진은 게임사가 자체 제작할 수도 있지만 이미 완성된 외부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전문 게임 엔진의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두 개의 게임 엔진이 바로 유니티와 언리얼이다.

유니티는 가장 많은 게임에서 활용되고 있는 게임 엔진으로, 언리얼은 이른바 AAA급으로 불리는 대작 게임들이 자주 활용하는 게임 엔진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게임 디벨로퍼가 세계 최대 PC 게임 플랫폼인 스팀(steam)에 등재된 게임들의 엔진 활용 여부를 조사한 결과에서 유니티와 언리얼은 사실상 게임 엔진 분야에서 톱 2로 꼽을 수 있을 만큼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보였다.2 과거 게임 엔진은 라이브러리 활용 등의 영역에 머물던 서로 다른 게임들의 여러 공통 요소를 좀 더 편리하고 게임 제작에 바로 도입할 수 있게 만드는 전문 도구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정교해진 엔진 프로그램들의 효율성이 각광받으며 이제는 엔진 없이 게임을 만드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편적인 개발 방식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유니티는 최근 급성장을 보이는 모바일 게임과 같은 소규모 게임 개발 분야에서 널리 쓰이며 확장을 거듭했다.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인터페이스와 저렴한 라이선스 비용, 폭넓은 이용자층과 같은 강점을 토대로 2021년 전년 대비 44% 증가한 11억 달러3 의 매출을 달성하며 순항 중이다.

언리얼 엔진은 유니티에 비해 점유율은 낮지만 더욱 강력한 기능을 자랑한다. 즉, 고사양의 그래픽과 연산 처리를 빠르게 수행할 수 있는 기능으로 게임 제작 현장에서 대규모 게임을 제작할 때 1순위로 고려하는 엔진이다. ‘고스트 리콘’ ‘기어스 오브 워’ 등 대작 게임들의 상당수를 만들어낸 언리얼 엔진은 최근 ‘언리얼 5’라는 차세대 엔진의 성능 데모 버전을 공개하며 실사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의 아웃풋으로 세간의 집중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다.

유니티, 언리얼 양대 엔진사로 대표되는 게임 엔진 분야의 다음 목표는 범용성을 향한다. 오직 게임 제작에만 활용되는 엔진이 아니라 게임 제작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를 다른 산업군에도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양사 모두 드러낸다. 가깝게는 3D 그래픽을 필요로 하는 콘텐츠 업계 전반이 대상이다. 풀 3D 그래픽으로 가상 세계를 그려내는 영화나 방송 등에서도 게임 엔진에 이미 내장된 기능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리얼 엔진은 고품질의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린 버추얼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실제 영화 화면의 연출뿐 아니라 프리비즈(기획 단계에서의 아이디어 시각화 작업) 등을 제작할 수 있는 다채로운 기능으로 게임 밖의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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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엔진의 영역 확장은 콘텐츠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자동차 회사인 BMW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기술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의 테스트를 위해 유니티로 도로와 환경,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그 안에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를 탑재하는 방식을 운영 중이다.4 삼성중공업도 선박 설계 과정에서의 3D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 기능을 유니티 엔진 도입으로 해결하기 위한 MOU를 체결하는 등5 가상공간을 다루는 데 특화된 게임 엔진들은 갈수록 게임을 넘어선 산업 전반에서의 범용성을 얻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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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티와 언리얼은 소구하는 시장은 다소 다르지만 게임 엔진이라는 사업 영역에서 엄연한 라이벌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고품질, 고비용은 언리얼, 저렴하고 신속하게 개발할 땐 유니티와 같은 단순한 속성으로 구분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세세한 라이선스 정책에 들어가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두 회사는 모두 자사 엔진의 라이선스 비용을 엔진을 사용해 제작한 결과물의 매출에 맞춰 책정한다. 이를테면 이제 막 개발을 시작한 소규모 게임스튜디오나 개인 개발자, 학생들은 해당 엔진의 기능을 그대로 사용해 개발하고 완성된 게임을 시장에 출시하는 과정까지를 무료에 가깝게 활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게임 엔진이 이름처럼 ‘엔진’에 익숙한 엔지니어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비롯된다. 즉, 게임 개발자가 학생, 초급 시절을 거치면서 자사의 엔진 활용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엔진 이용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자사 엔진의 범용성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게임 창작의 대중화: 로블록스

최근에는 누구나 게임 엔진을 쉽게 활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존 게임의 수정과 변경 또한 손쉽게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최근 게임 시장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로블록스’를 사례로 들 수 있다.

사실 로블록스는 게임 이름이라기보다는 게임 플랫폼, 혹은 게임 엔진을 가리키는 말에 더 가깝다. 로블록스에 접속하면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게임 중 하나를 선택해 플레이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로블록스에 구현된 각각의 게임은 로블록스 제작사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별 창작자가 로블록스가 제공하는 도구를 사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직접 만들고 이를 로블록스 서버를 통해 서비스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로블록스는 아예 새로운 캐릭터와 배경, 물리 환경까지 새롭게 창조해낼 수 있는 전문 게임 엔진인 유니티, 언리얼에 비해 게임 속 캐릭터, 나무, 벽, 바닥 등 주어진 오브젝트(object)들만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게임 제작을 위한 도구로서의 범용성 측면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로블록스는 오히려 전문성이 부족한 만큼 상대적으로 전문 개발자가 아니어도 간단한 지식만으로도 손쉽게 게임을 만들고 바로 플레이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대중적 범용성은 전문 게임 엔진에 비해 월등하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잘 구성된 도구를 활용해 게임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로블록스의 범용성은 ‘모딩’이라는 개념과도 유사한 흐름에 서 있다.6

오늘날 출시되는 많은 게임은 게임 내용을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직접 수정할 수 있는 편집 기능을 추가해 이들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보는 창작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기 게임 ‘배틀그라운드’는 ‘H1Z1’이라는 다른 게임의 모딩으로부터 파생됐고, ‘리그 오브 레전드’ 또한 ‘워크래프트 3’의 이용자 모딩으로 만들어진 ‘DOTA’라는 게임으로부터 시작돼 독립한 게임이다. 동시대 최고 인기 게임들의 상당수가 모딩으로부터 나왔다는 점은 콘텐츠 산업의 수요와 모딩의 결과가 크게 겹친다는 점을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로블록스라는 플랫폼이 작동하는 요인 또한 모딩과 다르지 않다. 로블록스는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기보다는 콘텐츠 제작 도구만을 제공한다. 이용자들은 게임을 만드는 재미로 만들고 재미로 플레이한다. 여기까지가 무료 이용의 영역이다. 한편 로블록스는 ‘로블록스 스튜디오’라는 이름의 게임 제작 도구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게임 내 화폐를 사용해 이들 게임을 플레이하면 그 수익을 일정 비율로 콘텐츠 제작자와 로블록스가 나누는 방식으로 제작 생태계를 수익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기존의 게임 모딩이 창작자의 자유로운 의사에만 기댄 방식이었다면 이 창작의 재미를 수익으로 연결하고자 구상한 것이 로블록스가 구축한 생태계인 것이다.

오늘날의 콘텐츠 산업은 과거처럼 제작-수용이라는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누기 어려운 구조에 이르렀다. 콘텐츠 이용자들은 완성된 콘텐츠를 자유롭게 변형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전통적인 제작, 생산이 아닌 ‘재미’라는 콘텐츠 수용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런 이용자들의 창의적 행동은 게임 회사 입장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적은 자원을 들여 시장 수요를 충족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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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엔진이라는 제작 방식의 도입 또한 이 트렌드와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게임 하나를 만들더라도 기초적인 설계부터 일일이 수동 코딩으로 작업해야 했던 시절과 달리 오늘날에는 게임 엔진이라는 통합된 개발 환경이 보편화됐다. 이제 아주 전문적인 기술 수준이 아니더라도 간단한 게임을 혼자서도 만들어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조금의 관심과 노력만 있다면 전산 기술의 핵심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게임 제작에 호기심을 내 도전해볼 수 있는 시대이다. 이는 곧 게임 엔진이 가진 범용성의 두 번째 의미, 즉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제작에 뛰어들 수 있다는 제작 대중성의 시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트렌드는 비단 디지털 게임이라는 특수한 영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용의 이분법을 넘어서

한때 사진 기술은 매우 전문적인 영역에 속했다. 일단 사진을 찍는 기계 자체가 비쌌고, 이를 다루는 방법 또한 아무나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엔지니어로서의 사진가와 그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인 스튜디오 혹은 사진관, 그리고 촬영한 필름을 인화할 수 있는 암실과 같은 전문적인 장비와 공간과 인력이 필요했다.

1980년대 들어 코닥이 출시한 휴대성 높은 스냅 카메라가 점차 가정에 보급되면서 사진 기술은 좀 더 대중적인 기술로 편입됐다. “당신의 행복한 순간을 기록하세요!”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휴대용 카메라는 일반인들도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 주고 촬영된 필름이 자동으로 감겨 사진관에 맡기기만 하면 사진을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사진 기술이 대중화됐다.

21세기 이후 디지털카메라의 보급은 인화라는 전문 과정마저도 파일 저장-인쇄라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며 더욱 일상적인 기술로 카메라 활용법을 보편화시켰다. 이제는 포토샵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이미지 도구들을 활용하는 일이 일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 아닌 시대가 됐다.

유사한 흐름은 영상 매체에서도 감지된다. 막대한 전력과 거대한 장비, 넓은 공간과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방송, 영화 같은 제작 시스템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점차 대중적인 기술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아이폰은 아예 아이폰만으로 영화 한 편을 찍을 수 있음을 광고한다. 개인들은 제작뿐 아니라 송출까지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된 유튜브, 트위치 같은 인터넷 스트리밍 환경을 맞아 전문 방송국이 아니더라도 손쉽게 자신만의 방송을 제작해 송출하기 시작했다.

디지털 게임에서 일어나는 제작-수용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현상 또한 이러한 기술의 범용화와 대중화라는 트렌드와 맞물려 일어나는 현상이다.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이제는 과거처럼 ‘공장’으로 불릴 수 있는 전문적인 생산 시스템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충분한 퀄러티의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 만큼 콘텐츠 창작 도구들은 범용화, 대중화됐다. 오히려 다양한 아이디어의 신선함과 창의성이 업의 본질에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 산업에서 이러한 기술 변화는 생산 양식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중이다.

카메라 대중화의 시대에 코닥은 휴대용 카메라와 필름으로 사진이라는 콘텐츠 자체보다 사진관과의 제휴, 필름 판매와 같은 사진 촬영 도구와 인화를 위한 플랫폼을 구축하며 사진이 아닌 ‘사진 찍기’라는 행위 전반을 회사의 수익원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오늘날 영상 편집 프로그램 제작사, 인터넷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들 또한 마찬가지로 직접 영상을 제작해 송출하는 방식을 쓰지 않는다. 대신 영상 제작 및 송출을 위해 필요한 도구들을 대중에게 제공하며 영상 산업의 중심을 생산자-소비자 관계에서 도구 제공자-이용자의 구도로 변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다. ‘로블록스’의 사례가 보여준 디지털 게임 산업의 트렌드도 과거 일반인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게임 제작이라는 전문 분야를 누구나 좀 더 손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유니티와 언리얼 같은 게임 엔진 제작사들의 발 빠른 행보도 이러한 트렌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의성 경쟁의 주도권이 생산자에서 소비자로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크게 두 축으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지적한 바대로 콘텐츠의 생산-소비라는 이분법이 모호해지면서 창작과 소비가 모두 기존의 소비자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변화다. 그리고 산업은 이러한 변화에 맞춰 직접 콘텐츠를 생산하는 방식에서 점차 콘텐츠 제작의 도구를 제공하고 그로부터 이윤을 얻는 방식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두 번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 변화의 흐름은 가끔 착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방송에서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기존의 방송 시스템은 영상을 직접 제작해 송출함으로써 콘텐츠를 제작, 판매하는 방식이었으나 인터넷 동영상이 보편화하면서 변화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방송국들은 인터넷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유튜브 등지에 채널을 개설하고 자신들이 만든 콘텐츠를 업로드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상 콘텐츠 송출권이 오직 방송에 있던 시절을 생각하면 방송국 입장에선 스트리밍 시대가 그다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다.

이는 동시대 게임 산업에도 적지 않은 인사이트를 주는 사례다. 게임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고 서비스하는 업의 본질이 쉽사리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갈수록 게임 이용자들은 직접 콘텐츠를 만드는 재미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또한 이용자들이 스스로 원하는 게임을 쉽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뜨고 지는 이용자들의 요구를 유연하게 수용하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직접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 가능한 게임 플랫폼으로 변해야 할 필요가 있단 뜻이다. 이러한 변화는 콘텐츠 이용자가 단순한 이용자로 머무르지 않게 된 오늘날, 게임 서비스라는 산업의 본질을 재고할 때 고려해야 할 변수가 됐다.

물론 모든 게임사가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도구로서의 엔진, 플랫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능동성과 창의성이 확장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그에 맞게 대응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접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고객 접점을 강화해 서비스 이용자의 요구를 더욱 빠르게 파악해 서비스에 반영하는 것도 한 방안이 될 수 있다. 또한 게임사가 제공하는 콘텐츠 안에서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게임 이용자들의 새로운 놀이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도 소비자 변화에 대한 좋은 대처법이 될 것이다.

대중문화 상품 시장에서 언제나 강조돼 왔던 참신함과 창의성은 이제 제작사만의 노력으로는 미처 시장 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다. 오늘날 게임 엔진이나, 직접 게임 제작과 수정이 가능한 플랫폼들이 각광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생산자가 창의성을 시장 수요만큼 따라갈 수 없다면 아예 그 시장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새 플랫폼을 제공하는 방식이 기존의 제작 방식과는 다른 차원을 열어낼 것이다. 생산자가 소비자만큼 창작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콘텐츠 생산 현상을 받아들이고 소비자의 넘치는 창의성을 끌어안아 새로운 산업 구조를 설계하는, 기존과는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한 때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grolmarsh@gmail.com
필자는 디지털 게임이 매체로서 현대사회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게임 연구자이자 연구 결과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임 칼럼니스트이다. 게임 문화 웹진 ‘게임제너레이션’ 편집장, 게임연구소 ‘드래곤랩’ 소장을 맡고 있으며 다수의 신문, 방송 등에서 게임의 문화적 측면을 조망하고 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으로 『게임 아이템 구입은 플레이의 일부인가?(2016)』를 발표했고 주요 저서로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2016)』 『81년생 마리오(2017, 공저)』 『슬기로운 미디어 생활(2018, 공저)』 『게임의 이론(2019, 공저)』 등이 있다.
  • 이경혁 | 현)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게임문화 연구, 게임연구자
    현)시사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게임 관련 패널
    grolmar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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