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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로 본 트렌드: 『자유부인』

타락이라는 호기심을 툭 건드리다

이경림 | 276호 (2019년 7월 Issue 1)
1954년 1월1일부터 8월6일까지 서울신문에 한 소설이 연재됐다. 대학교수 장태연을 남편으로 둔 주부 오선영이 파리양행이라는 사치품을 취급하는 양품점에 취직하고, 젊은 남자 대학생과 ‘댄스’에 빠져 댄스홀에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양품점 주인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다가 결국 남편에게 들켜 이혼의 위기에 몰린다는 줄거리다.

남편과 아이를 둘이나 두고도 가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히 ‘사회’에 진출해 ‘자유’를 만끽하려 한 여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의 제목은 『자유부인(自由夫人)』이다. 소설은 “중공군 40만 명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치는 소설” “북괴의 사주로 남한의 부패상을 샅샅이 파헤치는 이적 소설”이라는 규탄을 받고, 실제 대학교수와 문학평론가, 변호사들이 이 소설을 둘러싼 논쟁에 뛰어들어 설전을 벌일 만큼 장안의 화제가 됐다.



‘자유부인’을 둘러싼 뜨거운 관심

‘베스트셀러(Bestseller)’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옮기면 ‘가장 잘 파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언제부터, 어떻게 ‘잘 팔리는 책’ 혹은 ‘잘 팔리는 상품’의 의미로 바뀌게 됐을까? ‘베스트셀러’란 말은 본래 1895년에 창간된 미국의 문예지 북맨(Bookman)이 ‘베스트셀링 북스(bestselling books)’라는 목록 아래 전국적으로 잘 팔리는 책을 조사, 발표한 데서 유래한다. ‘베스트셀링 북스’에서 유래한 ‘베스트셀러’라는 용어는 1920년대에 전 세계로 보급됐고, 이 확산 과정에서 책에 국한됐던 사용도 다른 상품으로 확대됐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다. 출판 사상 최초로 10만 권 판매를 돌파한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바로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처음 적용된 소설이다.

『자유부인』은 사교춤의 유행, 전후 사회에 여성의 직업 진출과 이에 결부된 여성의 지위 향상, 전후 문화계를 지배한 미국 문화에 대한 선망, 동시에 개방적 섹슈얼리티의 표현과 자유, 허영, 퇴폐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에 대한 반감 등 이른바 전후 한국 사회의 ‘핫이슈’들을 모두 끌어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낸, 전후 한국 사회의 박물지(博物志)와 같은 소설이다.



당대의 뜨거운 감자들을 한데 모아 대학교수 부인의 불륜과 춤바람이라는 과감한 틀에 녹여낸 이 소설에, 전후의 새로운 풍조와 유행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대중은 열광했다.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연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행본 출판 광고가 나왔는데 초판 규모가 500부에서 1000부 즈음이던 시절에 출판 당일 3000부를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 소설을 가지고 만든 영화 ‘자유부인(1956)’의 연이은 대성공으로 자유부인 열풍은 1950년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파장을 살펴보면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당시 이 영화는 영화 검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본격적으로 촉발하며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1950년대 당시 검열 대상은 주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 장면들이었는데 ‘자유부인’은 처음으로 성(性) 표현의 수위 때문에 ‘가위질’을 당한 영화였다.

1956년 6월5일, 개봉 예정일을 사흘 앞두고 열린 검열 시사회에서 작품 곳곳의 키스와 포옹 장면들이 ‘한국의 사회도덕 기준과 너무 어긋난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통과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불륜 관계의 남녀가 보여주는 ‘러브신’이 잘못된 윤리의식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원작 작가 정비석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영화의 지독한 애욕 장면은 허용하면서 국산 영화에 한해서만은 키스도 불허한다는 것은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관객 대중의 실생활은 천 리나 앞서갔는데 지도층 인사의 감각이 십 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영화에 러브신을 허용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각계각층 사람들이 검열 찬반을 밝힌 견해를 정리한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논쟁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네 군데, 필름상에서 약 백 피트(약 30m)에 달하는 부분을 잘라내고 상영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무자비하게 검열당할 만큼 화끈한 러브신이 있다는 기대감이 아마 이 영화의 선풍적인 흥행을 이끄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영화 ‘자유부인’은 1956년 6월8일 수도극장에서 개봉한 이후 45일간 상영되며 대히트했고 서울 관객만 10만8000명에 7000만 환의 수익을 올리며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를 당당히 기록했다.

영화 검열과 흥행을 둘러싼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자유부인 이야기가 그토록 인기를 끌었던 핵심적 배경을 짚어준다. 여성의 성과 자유를 향한 대중의 호기심, 그리고 여성의 성과 자유라는 렌즈를 통해 사회 전반에 만연한 ‘타락과 방종’을 질타하고 싶은 식자층의 계도 욕망이 바로 자유부인 오선영을 통해 사이좋게 손잡았던 것이다.


‘타락’의 수사학

1940년대 후반 미 군정기와 1950년대를 통과하며 쏟아져 들어온 미국 대중문화는 전후 한국 사회를 강렬하게 매료했다. 그 핵심 이미지는 자유, 허영, 섹슈얼리티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 ‘고급’ 미제 물건을 사용하고, 일상 회화 속에서도 영어 단어를 섞어 쓰며 자신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고, 미국 영화에 나오는 남녀처럼 관능적인 키스와 포옹을 대범하게 즐기고, 불륜이건 어쨌건 열정적 사랑에 서슴없이 몸을 던지고, 댄스홀 같은 곳에서 자유롭게 자기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그런 새로운 행동 양태가 유행하는 당대 사회의 모습은 자유부인이 가장 예민하게 포착하는 부분들이다.

특히 1950년대에 댄스는 상류층에서부터 하류층에 이르기까지 크게 유행했는데 1957년 무렵 서울 시내에는 모감보, 삼일구락부, 뉴스맨 구락부, 동화홀, 컨티넨탈, 파라다이스, LCI(자유부인에 등장하는 그 댄스홀이다), 국일관 등 20여 개 댄스홀과 카바레가 존재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홀터넥, 오픈 숄더, 민소매처럼 피부를 노출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진한 화장, 사치스러운 액세서리를 걸치고 자유롭게 춤을 추고 즐겼다. 1950년대 대중이 눈뜬 새로운 욕망, 즉 마음껏 자기 섹슈얼리티를 발산하고 소비의 즐거움을 만끽하려는 욕망이 바로 댄스홀에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집약됐던 것이다.

이 소설을 ‘중공군 40만 명보다 더 무서운 해독을 끼친다’고 맹비난하게 만든 이유는 이와 같은 ‘새로운 욕망’의 과감한 묘사에 있었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의 부인, 두 아들의 어머니로 가정 안에 안주해 있던 오선영이 사치품을 파는 가게 점원으로 취직하면서 사회에 진출하는 모습, 댄스에 빠져 아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대범하게 젊은 외간 남자와 껴안고 돌아가는 모습, 불륜의 쾌감에 취해 서슴없이 몸을 허락하려는 모습 등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자기 생활 속에서는 도저히 오선영처럼 과감하게 타락할 수 없는 대중은 오선영의 행적을 따라가며 “전신이 송두리째 입술로 변해버린 듯 오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은 오직 입술의 감각”뿐이라는 관능적이고 과감한 키스, “일순간의 행복에, 영원의 불행을 초래해도 조금도 뉘우칠 것이 없는 법열의 시간”이라는 댄스를 대리 체험한다.



최첨단에서 유행하는 것들은 항상 대중의 호기심을 끈다. 그러나 이 유행에 자신이 직접 박차고 뛰어드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사회적 논란을 몰고 다니는 댄스홀 같은 유행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너무나 궁금하다. 이러한 지점에서 자유부인은 독자들에게 ‘안전한 타락’을 제공했다. 소설을 통해 이러한 타락의 맛을 엿보더라도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는 안전하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를 핵심으로 하는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가 우리에게 주는 쾌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이 금단의 과일을 먹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안전하게 그 맛을 대리 체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화 콘텐츠들이 종종 지극히 보수적인 문법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용이 안전하다고 자기주장을 하려면 이와 같은 타락의 전시가 교육적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우겨야 하기 때문이다.


요는, 민주 사상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턱대고 민주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뜻하지 않았던 혼란이 생겨난 셈이었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남녀가 불행에 허덕이게 되었던가. 현모양처이던 여성들이 자유라는 미명으로 얼마나 방종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릇된 민주 사조 때문에 미풍양속이 얼마나 문란해졌던가.


댄스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민주주의를 모르더라도, 행동만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는 오선영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 『자유부인』의 서술자는 위와 같이 준열하고 묵직한 비판을 내놓는다. 서술자의 이러한 논평은 『자유부인』이 실제로는 전후 한국 사회의 설익은 민주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 ‘진지한’ 작품이며 오선영의 타락에 대한 과감하고도 감각적인 묘사는 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원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짐짓 암시하는 듯하다.


묘사는 과감하게, 문법은 보수적으로

화수분은 그 안에 어떤 물건을 넣든 새끼를 쳐서 끊이지 않고 자꾸만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를 말한다. 쌀을 넣으면 쌀이 나오고, 비단을 넣으면 비단이 나오고, 금을 넣으면 금이 나온다는 보물단지. 대중의 호기심은 마치 화수분과 같다. 만일 어떤 콘텐츠가 대중의 호기심을 정확히 캐치했다면 그 콘텐츠는 끊임없이 변주되며 지속될 생명력을 얻는다. 가장 먼저 과감하게 대중의 호기심에 물꼬를 튼 소설 『자유부인』과 영화 ‘자유부인’이 대성공을 거두자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도록 ‘속 자유부인(김화랑 감독, 1957)’ ‘자유부인(강대진 감독, 1969)’ ‘자유부인(강대진·박호태 감독, 1981)’ ‘자유부인 2(박호태 감독, 1986)’ ‘90년 자유부인(박호재 감독, 1990)’이 지속적으로 제작되며 관객을 불러 모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중의 호기심을 안전하게 충족시킬 수 있을까? 호기심이 모이는 영역이라고 무조건 긍정해서 대중에게 아부하거나, 그렇다고 맹렬하게 비난만 퍼부으며 대중을 계도하려는 고압적 태도만 취한다면 실패하기 쉽다. 드라마나 책을 보며 계속 혼나기만 한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보겠는가?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자유부인』이 내놓은 모범답안은 “묘사는 과감하게, 문법은 보수적으로”이다. 새로운 욕망의 맥락과 쾌감과 행태를 자세히 묘사해 대중의 호기심은 최대한 만족시켜 주면서도 결국 자기 잘못을 깊게 뉘우친 선영이 남편의 손에 이끌려 가정으로 돌아가는 결말을 통해 타락을 안전하게 마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읽고 난 독자가 안전한 일탈을 경험했다고 안심시켜주는 설계, 도덕적 죄책감이나 혹은 질책을 당한 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수용자의 마지막 미학적 반응까지를 고려한 주의 깊은 설계. 대중의 호기심을 건드리고 싶을 때, 우리가 자유부인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필자소개 이경림 서울대 국문과 박사 plumkr@daum.net
필자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신소설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문화와 문학 연구가 만났을 때 의미가 뚜렷해지는 지점에서 한국 소설사를 읽는 새로운 계보를 구성하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 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 수집 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 연구 등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상아탑 너머에서 연구의 결실을 나누는 방식을 찾고 있다.
  • 이경림 | [現] 서울대 국문과 박사

    [前]
    육군사관학교, 국민대, 홍익대 등 강의
    국립중앙도서관 주관 한국 근대문학 자료 실태 조사 연구
    국립한국문학관 자료 수집 방안 마련 위한 기초 연구
    plumk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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