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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옛 소련의 흔적’에서 기회 찾기

오영일 | 28호 (2009년 3월 Issue 1)
러시아는 이대로 추락하는 것인가. 국제유가 상승에 힘입어 고속 주행을 해 오던 러시아 경제에 우려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러시아는 풍족한 원자재와 많은 인구, 넓은 영토 등 고성장을 위한 3가지 조건을 확실히 충족하는 나라다. 그러나 국제유가가 하락세로 들어서면서 러시아 경제에도 위기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일부에서는 1998년 모라토리움(채무 지불 유예)의 악몽이 재현되는 게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글로벌 슈퍼 파워인 미국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러시아만 위기 상황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전문가들은 심각한 위기가 올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경제의 ‘기초체력’이 1998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유가 하락, 환율 절하 등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우려를 자아낼 수는 있지만 러시아의 내적 상태는 보기보다 견고하다. 금융권의 부실 채권 비중도 선진국 수준으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부동산 가격 폭락도 보이지 않는다. 루블화 평가절하는 유가 하락 상황 속에서 러시아에는 오히려 교역 조건 개선이라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 경제의 최대 관심사라 할 수 있는 유가 역시 더 이상의 하락보다는 점진적인 상승에 무게가 실리는 상황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글로벌 투자 은행들은 러시아 경제가 올 여름을 전후로 저점을 찍고 하반기부터는 회복세에 들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러시아의 ‘블루 오션’은 어디에?
러시아는 앞으로도 매력적인 신흥시장으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다만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여파와 러시아 시장 자체의 변화로 인해 유망 분야의 종류와 영역은 계속해서 달라질 전망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브릭스(BRICs)란 용어가 회자되며 러시아 경제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이 즈음 러시아를 둘러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천했던 유망 분야는 고급 부동산 건설과 물류기지에 대한 투자였다. 급증하는 고소득층 및 중산층의 수요를 받쳐 줄 고급 아파트와 밀려드는 외국 기업들의 눈높이에 맞는 고급 오피스, 소비재의 원활한 공급을 지원해 줄 물류센터 등이 구체적인 투자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분야는 매력이 많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러시아 국내외 금융 여건상 대규모 프로젝트에 투자할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또 지난 5년 동안 이미 많은 투자가 진행돼 공급 부족이 어느 정도 해결된 상태다. 이에 따라 고급 부동산과 물류센터의 임대수익률은 10% 미만으로 떨어졌다.
 
그러면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러시아의 어떤 비즈니스 분야에 주목해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러시아는 ‘자원 강국’이라며 원유·가스·석탄 등을 거론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원만 있는 곳이 아니다. 1억4500만 명에 이르는 인구와 넓은 국토가 있다.
 
필자는 기업들이 조금만 시각을 달리하면 의외의 곳에서 새로운 시장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의 ‘블루 오션’ 역시 그렇다. 러시아 시장에서의 새로운 기회는 다름아닌 ‘옛 소련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주의 종주국이던 소련은 사회 기반 시설과 보건 복지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그러다가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 이전의 인프라가 붕괴했으며, 유가 급등으로 인해 경제가 발전하는 와중에서도 예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최근의 경제 수준 향상은 또 다른 수요를 만들어내 새로운 공급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이런 부분들에 신시장 개척 기회가 있다.
 
1. 전력 현대화 장비 옛 소련은 전력 분야의 세계적인 선두 주자였다. 전 국토에 각종 발전소부터 송·변전 시설까지 국민과 국영 기업이 활동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원활한 시스템이 구축돼 있었다.
 
그러나 현재 소련 시절에 만든 전력 공급 시설은 전력 손실률이 10%를 넘을 정도로 노후화되어 있다. 개방 후 경제난으로 제때 시설 개·보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경제 성장에 따른 신규 전력 수요도 계속 늘고 있어 대대적인 송·변전소 개·보수와 확충, 송전망 건설 사업은 러시아 전국에서 매우 긴 대기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현재 러시아 송·변전소 개·보수 시장은 스위스 ABB, 독일 지멘스 등 유럽 업체들이 독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분야에서는 한국 기업들도 세계적으로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한국 기업들이 가격 및 품질 면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스절연변전소(GIS) 방식의 설비는 현재 러시아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구형 방식은 물론 유럽 업체들이 공급하고 있는 방식의 설비보다 여러모로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지난해 6월 전력 공급 분야의 독점 사업자이던 국영 통합에너지시스템(RAO UES)이 각 지역본부 단위로 해체되면서 신규 설비 사업자가 시장에 파고들 기회가 커졌다. 지역 단위의 신생 전력 공급 업체들은 독립 후 러시아 유일이자 최대 기업이라는 프리미엄을 활용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기존의 외국계 납품사들이 과거보다 까다로운 계약 조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점에 한국 기업들이 파고들 수 있는 틈이 있다. 전력 공급 회사의 규모가 줄어들긴 했지만 이들은 절대적인 규모 면에서 결코 작은 회사가 아니다. 워낙 땅이 넓은 러시아이다 보니 분사된 회사가 관할하는 지역 단위가 한국 전체 면적보다도 넓다. 한국의 전력 산업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해 있는 만큼 설비와 기술 경쟁력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국내 공급 업체들은 앞으로 15년 이상을 파먹을 수 있는 금맥을 찾게 될 것이다.
 
2. 교통시스템 러시아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교통 체증에 몸서리치는 경우가 많다. 모스크바 인구는 서울과 비슷하지만 차량 숫자는 서울보다 약 15% 많은 340만 대나 된다. 밤 10시에 출발하는 비행기 탑승을 위해 시내에서 늦어도 오후 4시 이전에는 공항으로 출발해야 할 정도다. 그런데 교통 혼잡 문제는 비단 모스크바만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차량이 많지 않은 지방 도시에서도 평소보다 차량이 조금만 더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는 여지없이 교통 대란이 발생한다.
 
이런 문제의 원인에는 물론 열악한 도로 사정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현실과 맞지 않는 러시아의 교통 시스템에 있다. 러시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도로에서 무분별하게 좌회전을 허용하는 등 차가 그리 많지 않던 옛 소련 시절에 개발한 교통 시스템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교통 체증이 극심한 모스크바의 경우 어느 정도 개선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교통 시스템의 효율성은 떨어진다. 이것이 바로 조금만 차가 막혀도 교통 경찰의 수신호가 등장하는 이유다.
 
러시아의 당사자들은 답답하기 그지없겠지만 이 부분 역시 한국 업체들이 파고들 수 있는 숨어 있는 시장이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한 한국의 기업들은 지능형 교통정보 시스템과 감시 카메라 등 하드웨어 부문에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교통 시스템 분야는 러시아의 현지 행정 기관과 협상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 부문에 진출하고자 하는 기업들은 현지 한국 대사관 등을 통한 유기적인 사전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단순히 시장 크기만 보고 모스크바로 직행하기보다 지방 소도시를 우선 공략해 러시아 교통 시스템에 대한 경험을 쌓고 이 실적을 바탕으로 대도시 공략에 나서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교통 시스템과 연계한 또 하나의 틈새시장은 교통카드 시스템이다. 이 분야에서는 한국의 모 업체가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이미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경험을 점차 대도시로 확산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블루 오션이 될 것이다.
 
3. 의료 시장 러시아는 아직도 전 국민에게 무상 의료 혜택을 주는 나라다. 병원 치료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점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 지원이 원활치 않을 때는 엄청난 의료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단점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는 바로 후자 사례에 속한다. 소련 붕괴 후 극심한 경제난을 겪으며 의료 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이 줄자 의사도 줄어들고 현대적 의료 시설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됐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에는 자본주의 바람이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부유층이 점점 늘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게 됐다는 말이다. 이를 반영해 2000년 이후 러시아에는 크고 작은 민간 병원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러시아 고소득층은 여전히 독일·싱가포르·호주 등지로 ‘의료 쇼핑’을 다니고 있다. 민간 병원들이 양과 질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증거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높은 의료 수준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거리를 기반으로 러시아 환자들을 유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동서양의 사고방식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지역이란 점에서 양방은 물론 한방 의료계에도 기회가 있다. 러시아에서는 약초 등을 통한 민간 요법이 정식 의학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병원이나 약국에서 약초를 처방해 주기도 한다.
 
실제로 국내 S병원은 러시아 환자 유치를 위해 담당 부서를 만들고, 러시아어 통역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러시아 에이전트와 접촉하고 있다. H 병원에서는 몇 년 전부터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심장 질환 치료 차 한국을 찾는 러시아 환자가 늘어나자 국내에 러시아인 직원을 상주시키고 있다. 또 러시아 체육 단체 중 일부는 한국 침술과의 협의(協醫) 방안에 적극적인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서비스 사업의 가능성은 이미 어느 정도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
[DBR TIP] 제2의 러시아 모라토리움 가능성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와 함께 러시아 경제에 대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경제는 고유가 시대에 축적한 외화와 그 동안 다져온 ‘체력’을 갖추고 있어 이번 위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지나친 낙관은 금물임을 항상 명심할 필요는 있다. 예기치 않은 사태는 언제나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넘어야 할 ‘산’은 아직도 많다. 다음은 현재의 러시아 경제를 비관보다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근거들이다.
 
1. 유가 폭락 국제 유가가 폭락했지만 러시아의 무역수지는 2008년 176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고, 2009년에도 570억 달러 흑자 수준을 유지할 전망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국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수준이었을 때도 러시아는 6%대의 고성장을 유지했다. 최근 대부분의 글로벌 투자 은행들이 내놓는 2009년 평균 유가 전망치가 배럴당 50달러를 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러시아 경제가 디폴트로 치달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2. 외환보유액 급감 지난해 여름 6000억 달러에 육박하던 러시아의 외환 보유는 올해 2월 현재 4000억 달러 미만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이외에 국제 유가가 상승하던 2004년부터 유가 하락에 대비해 조성해 둔 2000억 달러 이상의 안정화 기금이 버티고 있다. 외환보유액과 안정화 기금을 합치면 러시아의 대외 부채 규모를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이는 러시아의 연간 총 수입액(2008년 약 2900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은 수준이다.
 
3. 루블화 평가절하 2008년 여름에 달러당 25루블 수준이던 루블화 가치는 올해 2월 초 기준 약 35루블 수준으로 40%나 평가절하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인 신흥 성장국이다. 지난해 13% 이상의 인플레이션율을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루블화의 실제 절하 수준은 15% 안팎이라고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율이 3%도 채 안되는 한국 원화도 40% 이상 평가절하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환율 인하로 인해 러시아가 받는 충격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최근의 국제 유가 하락 폭을 감안할 때 현재의 루블화 평가절하는 자국 수출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용인할 만한 수준이라 볼 수 있다.
 
4. 증시 폭락 러시아의 대표적인 증시인 RTS 지수는 지난해 고점 대비 70% 이상 떨어졌다. 인덱스가 하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신흥국들이 그렇듯이 러시아 역시 증시와 실물 경제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즉 선진국처럼 증시가 자본 조달을 하거나 실물 경제를 선행하는 지표로 해석되는 경제 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지수가 빠진다고 국민이나 기업들이 크게 동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지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러시아 국립경영대에서 국제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극동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투자증권 신사업추진본부 CIS·동유럽 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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