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금융위기는 한국 투자은행(IB) 업계에는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호기입니다. IB의 핵심 경쟁력은 인력인데 지금 월가 인재들이 헐값에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것도 없습니다. 현 상황을 세계 시장의 중심으로 나아갈 발판으로 이용해야 합니다.”
골드만삭스 출신의 호바트 엡스타인 KTB 투자증권 사장이 동아비즈니스리뷰(DBR)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포부다. 오랜 월가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아시아 선도 IB를 탄생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그는 시종일관 ‘이미 벌어진 상황’을 보지 말고 ‘앞으로 무엇이 벌어질지’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다.
모두가 합심해서 금융위기에 대처해야 할 상황에 뒤늦게 남을 비판하는 소위 ‘세컨드 게스’가 횡횡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예로 아직까지도 금융계 일각에서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했어야 하느니 마느니 하는 논란이 나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엡스타인(한국명 이병호) 사장은 미국, 아시아, 유럽에서 25년의 국제금융 업무 경력을 지닌 기업금융 전문가다. 1957년생인 그는 유년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남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제학,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에서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베어스턴스, CSFB, 골드만삭스 등을 거쳤으며 로스앤젤레스(LA) 페퍼다인대 경영대학원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올해 3월 KTB 투자증권 사장으로 부임했다.
정부의 여러 대책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주가 하락이 계속될 것으로 보나
“지금 주가지수를 예측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부동산 시장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 한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다. 미국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거래 규모는 조금씩이나마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 부동산 시장은 거래 자체가 사라졌다. 이 때문에 가격 자체는 고점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경제 규모나 근로자들의 평균 소득에 비해 집값이 너무 높아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날 수 없다. 고점 대비 가격이 덜 떨어진 것보다 거래 자체가 없다는 게 훨씬 무서운 사건이다.
현 상황에서 실업률이 올라가고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시장의 펀더멘털은 좋기 때문에 주식시장의 장기 전망을 낙관하고 있다. 우수한 인재 등 한국이 가진 경쟁력이 있는 한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별도로 한국 주식시장 하락폭이 유달리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국내 기업의 부채 비율은 아직 낮고 영업 실적도 좋은 편인데…
“아이러니하지만 IMF 때 선진국의 충고를 상당부분 따른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당시 IMF는 한국에 ‘결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되고, 시장을 대폭 개방하라’고 거듭 주문했다. 그 결과 지금 전 세계에서 한국 시장만큼 외국인에게 열려 있는 곳이 없다.
나는 미국 시민권자지만 거래 장벽이나 투자 장벽이 가장 심한 곳이 바로 미국이다. 외국인이 미국 은행을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아는가. 미국 정부는 이를 철저히 막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는 이런 식의 규제가 없다. IMF 이후 시장을 대폭 개방했으며, 경제 규모와 자본시장의 깊이도 커졌다. 한국의 주가지수 선물옵션 시장은 세계 1위 아닌가. 투자금을 청산하기 쉽고 청산 물량을 받아 주는 세력이 많기 때문에 외국인이 가장 먼저 한국시장을 떠난 것이다. 한국의 잘못이 아닌데도 피해를 본 사례라고할 수 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일부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더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펴는 주장에 불과하다.”
한국 금융시장의 변동성이나 하락폭이 커진 이유로 일각에서는 정부 관계자들의 부적절한 언행을 문제 삼기도 한다. 장관의 바람직하지 못한 구두 개입이 환율 상승폭을 키웠다는 주장도 많다
“미국적 시각에서 한국 상황을 볼 때 가장 아쉬운 점이 이와 연관이 있다. 한국인은 결과가 다 밝혀진 뒤 뒤늦게 남을 비판하는 소위 ‘세컨드 게스’가 너무 심하다. 뒤돌아보면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인다. 그러나 막상 그 상황이 눈앞에 닥쳤을 때 상황이 끝났을 때처럼 모든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 경제를 망치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이미 끝난 일을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